373화. 유군 출격 (3)
탕마대검을 검집째 풀어 땅에 박고, 손잡이 위에 양손을 올려놓은 모용우의 모습은 그야말로 일국의 대장군 같은 풍모를 자아내고 있었다.
전신을 단단하게 감싼 중갑주.
하지만 평범한 중갑은 아니었다. 탕마군이 쓰는 중갑은 여느 갑옷과 달리 대(對) 무림인 용으로 개량된 것이라, 이음매가 부드러워 움직임에 제약이 없고 부위별로 탈착이 가능했다.
그러나 정복(正服) 차림은 아니었다. 모용우를 위시한 탕마군 전원 모두 출정에 나가는 복장이었다.
그리고 그건 멸사군도 마찬가지였다.
모용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좋군.”
어느새 추운 겨울이 지나고, 이제 완연한 봄이었다. 새로운 시작의 한 걸음을 내딛기에 딱 어울리는 계절이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모용우가 눈을 감았다.
‘형님.’
그는 모용군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미안하다. 말도 없이 이런 짓을 벌였다.’
‘그 어인 말씀이십니까. 이미 형님께 온 그 순간부터 어떤 일이라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다짐했습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래도 미안하구나. 너보다도 어린 사람을 상관으로 모시게 했으니, 제아무리 멀리 내다본 결정이었다 해도 마음이 좋지 않아.’
‘괜찮습니다. 형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연 군장의 능력은 진짜입니다. 아닌 말로, 제가 품을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 말하지 마라. 물론 연호정, 그 녀석의 능력이 출중한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난 네가 연호정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과찬이십니다.’
‘다만 연호정에게 없는 것이 네게 있듯, 너에게 없는 많은 것들이 연호정에게 있다. 비록 그 녀석과 오랜 시간 치고받았으나, 확실히 배울 점이 많은 놈이야. 그놈과 함께하며 많이 훔쳐 배우거라.’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너에게 따로 부탁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너도 알다시피 연호정은 연가주의 장남이다. 그리고 연가주는 군사와 당가주 등과 친분을 쌓고 있지. 듣기로는 공공대사와 무당의 승현진인 역시 연 군장을 제법 기특하게 보고 있는 모양이더라.’
‘그럴 만한 인재지요.’
‘다른 육가 중 첨예하게 대립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가문이 둘 있다. 남궁과 팽가지. 그중 남궁은 나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연호정 휘하에 팽가의 자식이 있다. 아마 팽가주 역시 우리 쪽보다는 저쪽에 더 마음을 쓸 것이다.’
‘…….’
‘세력에서의 유불리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저쪽에는 그만큼 많은 정보가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야.’
‘정보를 탈취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능동적으로 탈취할 필요는 없다. 연호정은 눈치가 빠른 놈이다. 무리하다간 네가 위험해질 수 있으니, 그저 네 귀로 들어오는 것들을 내게도 알려 주면 된다.’
‘…….’
‘왜? 마음에 걸리느냐?’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요. 저는 무림인이기 전에 무림맹의 맹원이고, 맹원이기 전에 탕마군의 군장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탕마멸사 합군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탕마멸사 합군의 일원이기 전에 모용가의 일원이기도 하다.’
‘…….’
‘정히 마음에 걸린다면, 내 너에게 더는 권하지 않으마.’
‘아닙니다. 제 마음이 그렇다는 것일 뿐, 제가 들은 정보를 알려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고맙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저 이 일이, 형님께서 맹주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이다. 나는 내 꿈을, 목표를 잊지 않았다. 다만 그에 앞서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을 뿐이야.’
‘삼교 말씀이로군요.’
‘그렇다. 내, 새외의 천한 잡것들이 중원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귀에서 연기가 날 만큼 화가 났다. 그러나 놈들의 출신이 어떻든, 놈들에게는 중원을 전화(戰火)로 들끓게 할 힘이 있어. 제아무리 우리의 꿈이 중하다 한들, 그 일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여, 저 역시 말씀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냐?’
‘묵룡부.’
‘……!’
‘저는 형님께서 묵룡부주와 손을 잡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손을 잡았다면, 최대한 그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지요.’
‘음.’
‘다만 묵룡부를 세우는 데에 삼교의 한 조직이 큰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 부분도 정리를 해야겠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묵룡부주 양천은 성천십삼좌의 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삼교는 그런 사람에게 힘과 권위를 주었고, 나아가 묵룡부를 세우게 하였습니다.’
‘서로가 이용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양천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겠지.’
‘양천이 그리 생각하는 것은 자유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삼교가 그만큼 능력이 있고 위험한 집단이라는 사실이지요.’
‘그렇지.’
‘묵룡부를 오롯이 형님 휘하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다른 영역에서 삼교와의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그리되면 자칫 형님께서 양천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개될 수도 있습니다.’
‘…….’
‘삼교와 싸우기 전, 그들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염두에 두고는 있다. 그러나 쉽지는 않을 것이야.’
‘물론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 하여 언제까지고 뒤로 미뤄 둘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음.’
‘그래서 제안드립니다. 이번 합군 출정의 목표지를 흑도로 고정했으면 합니다.’
‘흑도? 묵룡부 측을 타격하자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안 돼! 그것은 지나치게 위험하다!’
‘침공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양천에게 경각심을 주고, 아군으로 끌어들일 명분을 제공하자는 것이지요.’
‘명분이라니?’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흑도를 타격하게 될 때…….’
그때, 저 멀리서 강력한 기파가 번져 나왔다.
모용우가 눈을 번쩍 떴다.
“전원 정렬.”
촤륵!
도열한 군병들이 재차 자세를 꼿꼿이 하였다.
어두운 중갑주를 입은 오백 명의 전사들과 그들 앞, 보다 기동성이 중시된 경갑 갑주를 착용한 오십 명의 전사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 중의 장관이었다.
“…….”
연호정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뻣뻣하군.’
성격이 다른 두 유군이 갑작스레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상부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명령이 떨어졌으니, 당연히 그대로 이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두 유군은 제각기 성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성격이 확연히 다른 두 부대가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선 나름의 과정이 필요하게 마련이다. 그 과정을 짧고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상관의 역량이겠지만, 그래도 너무 느닷없는 명령이었다.
‘처음 이 제안을 한 것은 모용군이었지. 이런저런 의도를 떠나, 그 역시 아는 것이다. 흩어진 것보다 하나로 합쳐졌을 때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꿍꿍이속이 전혀 없지야 않겠지. 아마 형님에게 뭔가를 시켰을 거다. 목숨을 미끼로 적의 심장부에 눈을 박아 넣는다…… 실로 모용군다운 처사야.’
그걸 알기 때문에 연호정은 모용우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물론 그럴 생각도 없었고, 그럴 사이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것 외에, 삼교와 싸우기 위해서는 유군 역시 힘을 합쳐야 할 순간이 올 거다. 그때를 대비해, 지금부터 합을 맞춰 보라는 뜻이렷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모용군도 마음이 급했군.’
잠시 후, 연호정이 단상 위에 올랐다. 같이 온 묵비는 모용우의 뒤에 서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광룡부를 견봉에 걸친 채, 하나가 된 유군을 내려다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상부에서 정해 준 이름이 있다.”
복잡한 심경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던 군병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첫마디부터 저게 무슨 말인가?
연호정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탕마군과 멸사군이 합쳐진 우리를 의정군(義正軍)이라 부르겠다고 하더군. 재미있지? 웃음이 나올 정도로 고전적인 이름 아닌가? 하하!”
연호정 딴에는 군병들의 긴장을 풀어 줄 요량으로 농담 삼아 건넨 말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농담 아닌 농담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연지평 때도 그랬지만, 그는 수십 년을 살다 과거로 돌아온 사람이었으며 심지어 온갖 전쟁으로 감정이 마모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따위 같잖은 농담이 통할 리가 없었다.
“…….”
군병들이 당황스러운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을 본 연호정 역시 당황했다.
그가 모용우와 묵비를 힐끔거렸다. 두 사람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호정이 멋쩍은 듯 웃었다.
“그래, 나답지 않게 머리 굴리다가 분위기만 더 박살 냈군. 그냥 나답게 가도록 하지.”
“…….”
“앞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새로이 하나가 된 우리는 의정군이라 불릴 것이며, 대수(大帥)는 나다.”
연호정이 은근한 눈으로 탕마군을 둘러보며 말했다.
탕마군 전원은 무표정을 고수했지만, 멀리서 봐도 몇몇의 눈빛은 일그러져 있었다.
“갑작스러워서 당황스럽기도 할 거고, 자존심이 상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개중에는 의심병이 도져서 뒤에서 날 씹어 대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감히 예상해 본다.”
상당히 직설적인 발언이었다. 적어도 창설식에서 대장이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연호정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욕을 하든 의욕을 잃었든 뭐든, 거기까지는 상관 않겠다.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또 관여한다고 해 봤자 의미도 없고.”
“…….”
“다만 내가 너희에게 바라는 건 하나다. 명령이 떨어졌을 때 훈련받은 대로 즉시 반응할 것. 오직 그것뿐이다.”
순간 연호정의 눈빛이 바뀌었다.
“너희에게 명예를 안겨 줄 자신은 없다. 하지만 개죽음당하게 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그거 하나다.”
“…….”
“이만 해산하라. 괜스레 도열하느라 고생 많았다.”
단상에서 내려온 연호정이 모용우에게 말했다.
“모용 군장은 군병들 해산시키고 잠시 나 좀 볼까?”
모용우가 절도 있게 포권했다.
“대수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가 몸을 돌려 외쳤다.
“전원 해산. 금일 훈련은 없다.”
탕마군이 자세를 풀었다. 입을 닫고 있던 그들 사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번졌다.
그때, 연호정이 버럭 외쳤다.
“멸사군!!”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무시무시한 위엄이 실렸다.
그 외침이 주는 위압감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웅성거리던 소리가 쏙 들어갔다.
탕마군과 멸사군 전원이 긴장해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모용 군장의 명령이 안 들리나? 분명 해산하라는 소릴 들었을 텐데?”
“……!”
“상관의 명에 즉각 반응해라. 내가 부재 시, 모용 군장은 내 대리로 의정군을 지휘할 수 있는 최고 사령관이자 너희 모두의 상관이다.”
“…….”
“처음이니 봐주마. 다시 한번 그따위 못난 모습을 보였다간 전원 중벌로 다스리겠다.”
매서운 엄포에 연무장의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연호정이 모용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우가 외쳤다.
“전원 해산!”
그제야 탕마군과 멸사군 모두가 자세를 풀고 해산했다.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식들이 빠져 가지고.”
그의 곁으로 다가온 모용우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대낮부터 머리가 엄청 아프군요. 술 한잔하시겠습니까?”
“뭐야? 소름 돋게. 그냥 하던 대로 해.”
“좋네. 술은 연제가 사게나.”
“냅다 반말이네. 빠졌네.”
“…….”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