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4화. 유군 출격 (4)
조촐하게 마련된 술자리에는 연호정과 모용우, 묵비가 참여했다.
모용우가 물었다.
“제갈 군사는?”
“군사님은 군사부에 계시지.”
“아니, 멸사군의 군사 말일세. 제갈 소저.”
“그러니까. 아버지 일 도와드릴 거 있다고 군사부에 갔어.”
“그래?”
“요새 워낙 정신이 없으니까. 훈련도 멸사군이 알아서들 잘하고, 한 번씩 들러서 진법을 봐주거나 저마다 짠 군략을 봐주는 정도야. 출정하면 따라붙겠지만.”
모용우가 부러운 듯 말했다.
“예전부터 정말 부러웠다네. 군사의 존재 말이야.”
“이제는 부러울 일 없겠네.”
“통합 군사가 되는 겐가?”
“물론이지.”
“……제갈 소저에게 말은 했나?”
“안 했는데? 하지만 이미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모용우가 혀를 찼다.
“자네도 참.”
연호정이 잔을 들었다.
“됐고, 일단 한잔할까?”
“좋지.”
잔을 부딪친 세 사람이 시원하게 술을 마셨다.
모용우가 묵비에게 물었다.
“하면, 묵 부장께서는 어떻게 되는 거요?”
묵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아직 연 공자한테 따로 들은 게 없어서요.”
두 사람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상부에서는 대수 재량으로 인선을 재배치하라고 하더군.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생각해 둔 바가 있지.”
“그게 뭔가?”
“당분간 의정군은 이군 체제를 유지할 거야. 그러니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돼. 탕마군은 형님이 맡고, 멸사군은 묵비가 맡아. 아, 멸사군의 경우엔 때에 따라서 나도 같이 움직일 수 있어.”
모용우의 얼굴이 흐려졌다.
“물론 워낙 특색이 뚜렷한 부대들인 만큼 각자의 장기를 살리는 게 좋기는 하겠다만…… 괜찮겠는가?”
“사실상 의정군은 과거 회랑단을 작살내러 갔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말하자면 탕마멸사의 합군이지. 다만 그때는 일시적이었고, 지금은 분리 명령이 나올 때까지 영구적이라는 게 다를 뿐이야.”
“그게 다르니 문제지.”
“그렇다고 무리하게 합치고 싶은 생각도 없어. 출정일이 먼 훗날이라면 모를까, 상부에서는 곧 의정군을 맹 외로 보낼 생각이더군.”
“음.”
모용우의 표정을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알고 있었구만?”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따로 형님께 말씀드린 게 있었네.”
“들어 볼까?”
모용우는 얼마 전 모용군과 했던 대화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묵룡부를?”
“그렇다네.”
“흐음.”
“내 나름대로 이것저것 따져 본 연후에 내린 결론이었네. 연제에게 먼저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하네.”
“전에 말했지? 각자가 머문 환경이 다르니, 각자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자고. 미안할 거 전혀 없어.”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 그건 그렇고, 연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떤가?”
“묵룡부?”
“그렇다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괜찮아.”
“다행이군.”
“무림맹이 의정군을 출정시키려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의도가 있어. 함께 흙밭을 구르며 빨리 돈독해지라는 의도도 있고, 유군이면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맹에 묶여 있었으니 이 기회에 내보내려는 의도도 있지. 그리고…….”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해.”
“의정군의 존재를?”
“그래. 사실 머릿수로 따지면 탕마군에서 오십이 더 붙은 정도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중요한 건 상징이지.”
“상징…….”
“그래, 상징.”
연호정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무림맹은 최초로 창설된 이후 지금까지 순조롭게 커 가고 있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잘 커 가고 있지. 하지만 아직 세상엔 무림맹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야.”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하네.”
“멸사군과 탕마군이 몇 번 강호에 나가 활약상을 벌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애초에 중원인 모두가 지켜보는 싸움 자체가 없었어.”
“멸사군이 흑도의 여러 방파를 없애지 않았나? 게다가 멸사군이 없앤 흑도 무리들은 하나같이 양민들의 골수를 빨아먹는 진정한 악인들이었어.”
“맞아. 그것 덕분에 명성은 올랐지. 하지만 그뿐이야.”
“나는 그보다 더 큰 공(功)은 없다고 생각하네. 제국이 힘을 잃고 치안 능력을 상실한 이 시대에, 멸사군은 과감한 일 처리로 악인을 징벌했네. 양민들에겐, 거대한 악(惡)보다 흩어진 작은 악(惡)이 더 큰 피해를 주는 법이야.”
“큰 선(善)을 행하려 하지 말고 세상에 녹아들어 작은 선(善)들을 행하라. 그래, 맞는 말이지. 진짜 협(俠)이란 저 기우희처럼, 타인이 몰라줘도 묵묵히 선을 행하는 것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멸사군이 대단한 것일세.”
“그래서 무림맹은 부족하다고 생각한 거지.”
“……무슨 뜻인가?”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무림맹 정도의 거대 단체에게는 선과 악을 나누고 협행을 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아. 뭐가 어찌 되었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힘과 돈이지. 그리고 그 두 가지는 무림이라는 불합리한 세상에서 명성을 대가로 요구해.”
“…….”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확실한 명성이 필요하겠지. 그래서 의정군을 보내는 거야.”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무림맹의 명성을 위해?”
“그래. 회랑단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삼교? 가장 위험한 적이지만, 아직 세상은 그들에 대해 몰라. 어중간한 흑도 방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연호정이 모용우를 보며 말했다.
“모용군에게 묵룡부를 처리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아마 그 제안은 내일이 지나기 전에 어떤 방식으로든 승인이 될 거야. 왜냐고? 결국 무림맹에 필요한 것은 명성이거든.”
“그런……!”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용우가 모용군에게 묵룡부를 정리해야 한다고 건의한 것은 사음교 때문이었지,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 제안이 쉬이 통과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네. 이유인즉, 묵룡부는 거대한 조직이기 때문이야. 자칫 잘못하다간 전쟁이 날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지.”
“내가 형님께 그리 말한 것은 삼교의 끄나풀을 잡아내기 위함이었네. 그런 위험천만한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어.”
“알아. 알지만, 하나의 시문(詩文)을 두고도 백 가지의 해석을 내놓는 세상이야. 하물며 무림맹인데, 형님의 의도대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해?”
“……!”
“적어도 이번 건에 관해서는 그러지 않을 확률이 높아.”
“이럴 수가…….”
모용우는 믿을 수 없었다.
“내 제안이, 흑도와의 전쟁에 불씨를 틔울 수도 있다는 말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또 다른 문제지. 본맹의 봉공들은 바보가 아니야. 현 상황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킨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진 않을 거야.”
“그렇겠지?”
“다만, 의정군을 출맹시키는 것은 확정이니 우리를 최대한 잘 써먹어 보려고 할 거야. 그리고 우리가 존재감을 드리우는 데 있어 최고의 먹잇감이 묵룡부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
“……!!”
모용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네 말마따나 봉공분들은 하나같이 지혜로운 분들일세. 조직에게 힘과 돈이 중요한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묵룡부를 건드리려 하진 않을 거야.”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든 승인이 날 거라고 한 거야. 꼭 묵룡부를 건드리는 것만이 다가 아니지. 묵룡부와 연관이 있는 불법 사업장, 악랄한 문파들을 공격하라는 명이 떨어질 수도 있어.”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에 관해서는 내가 직접 침투해서 정보를 캐냈지. 만약 승인이 된다면, 내가 묵룡부에서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놈들을 타격하게 될 확률이 높겠지.”
“……후우.”
모용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으로 내 마음 같지가 않구먼.”
“언제는 세상이 편했던가? 내 마음 같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으니 본인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달려드는 거지.”
착잡한 얼굴로 잔을 내려다보던 모용우가 연호정과 묵비의 잔을 채웠다.
“어찌 되었든, 이번만큼은 상부의 결정을 믿는 수밖에 없겠어.”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이번만큼은?’
그 말은, 모용우가 어느 시기부터 상부의 명령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다.
‘흠.’
연호정은 모용우의 눈을 살펴보았다.
혼란스럽고 답답해 보였다. 걱정스러워 보였으며, 이 한스러운 세상을 향한 분노도 엿보이는 듯했다.
물끄러미 모용우의 얼굴을 살피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답답한가?”
“답답하지.”
“그래도 싸워야지. 별수 있나.”
“그리 말하지 말게. 상부의 명령은 절대적이지만, 적어도 백도에는 명령보다도 우선시되는 대원칙이 있네.”
“그게 뭐지?”
“협(俠).”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라? 조직은 그럴 수 있다네. 하지만 백도는 그래선 안 돼. 단 한 명을 불행하게 만드는 대가로 모두가 잘살게 된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얘기야.”
“하지만 그게 현실이야. 모두가 그런 말을 부르짖지만, 결국 세상은 이상대로 흘러가지 않았어. 무려 수천 년 동안이나.”
“그래도 추구해야 하네. 이유인즉, 그것이 바른길이기 때문이야. 현실적이지 않다고 하여 추구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를 어찌 백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며 후학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단 말인가?”
모용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명성이 부족하면 어떤가? 힘이 부족하고 돈이 부족하면 어떤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바른길이라면 그것을 추구해야 함이 마땅해.”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러나 모용우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가문을 바로잡기 위해 본심을 숨기고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이 모용우란 사람을 깎아내릴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모용우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그는 세상이 망해도 끝까지 버려선 안 될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만으로는 그 유구한 역사가 선택한 생존 원리를 바꿀 수 없어.”
“그것은 생존 원리가 아닐세. 그 역사를 만든 건 결국 사람이었어!”
“그렇다면 직접 그걸 바꿔 봐.”
“뭐……?”
“내가 도울 테니, 형님이 느낀 부조리함과 백도답지 않은 행위들을 몽땅 뜯어고쳐 봐.”
모용우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세상에는 선한 자보다 악한 자가 많아. 그리고 선하거나 악한 자보다, 자신이 저지르는 일이 선인지 악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만 배는 더 많지.”
“…….”
“나는 그들 모두를 교화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럴 입장도 아니고. 하지만 형님이 답답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내 기꺼이 목숨을 걸지.”
“연제.”
“물론, 삼교는 반드시 작살을 내야겠지만 말이야.”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한잔 마셨으면 충분하겠지. 따로 생각할 게 많을 듯한데, 오늘은 그만 파하자고.”
“연제.”
“내일 놀러 올 테니 밥이나 한 끼 사. 묵비, 가자.”
자리에서 일어난 연호정이 모용우를 내려다보며 첨언했다.
“명심해. 신화교와 한판 붙기야 했지만, 본격적인 싸움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어. 그 안에서 본인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 잘 고민해 봐.”
“…….”
“간다. 내일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