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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76화 (376/963)

376화.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1)

파아앙!

가볍게 내지른 주먹에 대기가 뒤흔들렸다.

강력한 내공을 담은 것도 아니요,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른 것도 아닌데 주먹을 중심으로 대기가 투명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어떠냐?”

절대자의 물음에 여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의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경지입니다.”

“물론 그렇다. 다만 네가 이 평범해 보이는 주먹 속에 깃든 무리(武理)를 알아본 것 같으니, 너의 깨달음도 멀지는 않은 듯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나. 일이 바빠 제자를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으니, 스승으로서 면목이 없다.”

여인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그녀가 아는 스승은 제자에게 저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없이 무뚝뚝하고 차가운 스승이 그였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무공이 존재한다. 하루에도 수백 개의 무공이 사장되고, 또한 수백 개의 무공이 탄생하지. 그러나 그 모든 무공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다.”

“…….”

“죽음이지.”

“…….”

“사람은 목이 달아나거나 심장이 터지면 죽는다. 피를 많이 흘려도 죽고, 단순한 상처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썩어서 죽을 수 있다. 심지어는 고통만으로도 죽을 수 있지. 사람은 그렇게나 연약하다.”

절대자가 주먹을 거두었다.

“무공이란 결국 내가 살고 상대를 죽이는 것에 그 본질이 있다. 쓸데없는 가르침에 현혹된 어중간한 자들은 군자연하며 무공에 도(道)가 있다고 믿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무공은 그런 것이 아니야.”

절대자가 검지를 들었다.

“딱 이 정도 길이다. 머리 혹은 가슴에 이 정도 깊이, 이 정도 두께의 구멍만 나도 사람은 죽는다. 그리고 천하 모든 무공은 이 결과를 효율적으로 내기 위해 만들어진 투쟁술이다.”

“…….”

“하여, 좋은 무공은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다. 그래서 그 안에 도(道)를 담을 수 있다. 그런 무공들이 바로 일류라 불리는 것들이지.”

무공엔 도가 없다더니, 결국 무공에 도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즉, 무공에는 도가 없으니 그 도를 담아내는 것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절대자, 양천이 말했다.

“무공, 무도(武道)에 발을 들이기 위해서는 솔직하게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다. 이후 그 본질을 완벽하게 체득하면, 방금의 평범한 주먹으로도 만근의 바위를 가루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게다.”

“예.”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이 경지가 네게도 찾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안 본 사이에 놀랍도록 늘었어. 참으로 고생이 많았다.”

여인이 눈을 감았다.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스승님의 뛰어난 가르침이 없었다면 감히 이룰 수 없는 성취였습니다.”

양천이 웃으며 태사의에 앉았다.

“중원은 넓다. 그리고 강자는 많지. 어쩌면, 세상에 이름을 날린 자들보다 훨씬 많은 강자가 은둔해 있을 수도 있다.”

“체감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강자를 쓰러트리고 비로소 지금의 위치에 올랐으니, 내 너에게 큰 상을 주고 싶다.”

“스승님께서 보여 주신 일권(一拳)이야말로 그 어떤 보물보다 소중한 상입니다. 그 일권을 목표 삼아, 하루하루 정진하겠습니다.”

“허허허.”

양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너답구나. 그래, 너는 항상 그랬지. 비록 첫째만큼 재능이 특출나지도, 셋째만큼 싸움에 능하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어.”

“…….”

“그런 너의 노력이 지금에 와서 비로소 만개하였구나. 첫째나 셋째라 해도 지금의 널 상대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여인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스승 외에 세상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스승을 넘어서겠다, 스승을 이겨 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반드시 짓눌러 버리고 싶은 상대가 둘 있었다. 바로 스승께서 말씀하신 대사형과 셋째였다.

스승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대사형과 셋째에 관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스승께서 그 둘을 언급하셨다.

‘이기기 쉽지 않은 게 아니라,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 하셨다.’

즉, 자신의 성취가 대사형이나 셋째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기쁨을 담담하게 다스렸다.

양천이 물었다.

“무공도 그리 발전했고 맡은 일도 기대 이상으로 해냈으니, 조만간 널 본부로 부를 것이다. 고생이 많았다.”

“감사합니다.”

“그 전에.”

양천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보타암(普陀庵) 건에 대해서는 따로 보고를 받지 아니하였다. 제대로 처리했겠지?”

여인, 부선이 재차 고개를 조아렸다.

“깨끗한 물에 보이지 않는 독을 풀었으니, 당분간 보타암은 강호의 일에 끼어들지 못할 것입니다.”

“확실하느냐?”

“확실합니다. 본디 갈등을 겪어 본 적 없는 집단이 혼란에 빠졌을 때, 비로소 욕망이 싹트는 법이지요. 차기 검후(劍后)의 위(位)를 자신들의 지파로 끌고 오기 위해 최소 삼 년은 강호에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제야 양천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했다. 마지막까지 잘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양천이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음신(陰神) 측에서는 따로 연락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습니다. 근 반년 동안 한 번도 제때 보고한 적이 없습니다.”

콰드득!

쇳덩이로 이루어진 태사의의 팔걸이가 진흙을 쥔 듯 처참하게 뭉개졌다. 양천의 무서운 아귀힘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재미있는 놈이군. 참으로 재미있는 놈이야. 하기야, 본부의 흑양과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니, 제 놈 역시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겠지.”

“…….”

“알겠다. 여로에 고생이 많았다. 이만 돌아가서 휴식을…….”

그때였다.

“부주님.”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양천이 눈을 빛냈다.

“무슨 일인가, 백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묵룡부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 판국이다. 하물며 부주의 손님이라니?

“모용가주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순간 양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잠시 후.

훅!

저 멀리, 우거진 숲속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강력한 기파에 모용군은 흔치 않은 긴장감을 느꼈다.

사박사박.

한 걸음, 한 걸음 땅에서부터 울리는 소리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이거, 이렇게 기별도 없이 찾아올 줄은 몰랐거늘.”

“…….”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네. 처음엔 자네를 다시 돌려보내려고 하였지. 하지만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어. 하여, 업무를 잠시 내려놓고 직접 찾아왔다네.”

담담한 목소리에서 무지막지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역시.’

모용군은 눈을 감았다.

‘성천의 강자라…… 고작 두 번 대하는 것이지만,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군.’

기파, 목소리, 존재감 그 어떤 요소도 상식을 초월한다.

일호무장? 비교도 안 되었다. 공공대사? 그의 전력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정도 압박감은 절대 줄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연위의 절대일검(絶對一劍)이라면 이 정도 강자에게도 상처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역량에서 비교가 안 되는 고수이니, 그만한 검격을 눈 빤히 뜨고 맞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웃기는군. 백도의 전대 고수가 아닌 이상, 당금 무림맹의 어떤 고수도 이 자의 상대가 될 수 없다니.’

인간의 한계, 무공의 한계를 모조리 초월한 일대 거인의 행차.

양천이 등장했다.

“오셨소이까.”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혼자 왔나?”

“그렇소.”

양천의 실력이라면 이 일대에 서식하는 동물은 물론 곤충의 작은 날갯짓까지 모조리 들을 수 있다. 모용군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양천이 그리 물은 것은, 기본적으로 모용군을 믿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 말했었지?”

“들었소.”

“그러니 단어 선택을 신중히 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조금이라도 내 시간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면, 자네의 뿌리 절반은 뜯어낼 걸세.”

모용군의 뿌리. 바로 호남의 모용세가를 뜻함이다.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나 역시 한가로운 사람은 아니니, 쓸데없이 시간을 끌진 않겠소.”

“현명한 판단일세. 그러나 그 전에, 하나 따져야 할 것이 있지 않나?”

“무엇이오?”

양천의 눈에서 살기가 드러났다.

“내게 따로 연락을 하지 않더군. 하물며 자네 딸년과 함께 보낸 수행원을 내쫓아 버렸어.”

“…….”

“내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이 위태롭기 짝이 없는 연수 관계는 오늘부로 끝이 날 걸세. 그리고 함께하지 않는 이상 자네는 명백한 적이니, 이 자리에서 죽여야겠지.”

“…….”

“말하게. 약속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한 이유가 무엇인가.”

모용군은 깊은 눈으로 양천을 바라보았다.

‘대단한 강자다. 의심할 나위가 없지. 홀로 대문파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니야. 내, 앞으로 몇 년을 수련해야 저자와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상상도 안 되는군. 하나…….’

그는 양천의 눈과 얼굴에서 진지한 분노와 상해 버린 자존심을 읽을 수 있었다.

‘무인으로서는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지만, 수장으로서 일류는 아니다.’

양천 정도면 충분히 훌륭한 수장이다. 보편적으로 그러했다.

그러나 모용군은 수장으로 한정할 시, 양천의 역량이 그리 대단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지금에야 느낀 것은, 그만큼 양천의 존재감이 엄청났기 때문이리라.

‘홀로 천하를 주유하며 세상과 맞서 싸웠지만, 본격적으로 조직을 운영한 시기는 얼마 되지 않아.’

모용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저처럼 초월적인 강자라도, 부족한 경험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지.’

양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답은?”

“하겠소. 하지만 이 대답보다 만 배는 더 중요한 사안이 있으니, 그것부터 말한 후에 대답해 드려도 되겠소?”

“……자네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야. 어떤 면에선 감탄이 나올 정도지. 내 그간 많은 사람을 봤지만, 자네처럼 내 앞에서 건방을 떠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어.”

“칭찬, 감사하오.”

“말장난은 사양이다! 당장 대답하지 않……!”

“삼교(三敎)란 족속들을 알고 계시겠지?”

“……뭐?”

“모르시오? 하면 달리 말하리다. 사음교(邪淫敎)를 아시오?”

훅!

순간 양천의 기도가 바뀌었다.

한층 더 거세어졌지만, 그 기파가 모용군을 향하지는 않았다.

양천의 얼굴에 드리워진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꾸며진 반응이 아니라 진심이다. 그는 순수하게 놀라고 있었다.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그랬구려. 양 부주께서도 놈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

“네놈…….”

후우우우웅!

쏟아져 나오는 기파가 일순 뜨겁게 타올랐다.

모용군은 순간 호흡이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다. 혼란과 분노, 의심과 격정으로 불타오르는 양천의 기도가 모용군의 전신을 휩쓸고 있었다.

양천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놈이 사음교를 어찌 아느냐?”

파지지지직!

순간 모용군의 몸에서 뇌정지기가 피어올랐다.

격정으로 타오르는 기파는 양천만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모용군은 분노로 가득 찬 두 눈으로 양천을 노려보았다. 투왕 양천에 비해 그 농도가 조금도 모자라지 않은, 진짜 격정적인 분노였다.

“놈들에 대해 아는데도, 이 병신 같은 굴속에 틀어박혀 대장 노릇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오?”

“뭐라?”

모용군이 버럭 소리쳤다.

“저 새외의 천한 것들이 중원을 통째로 집어삼키려 드는 지금, 그 개잡것들을 씹어 삼키려 들지 않고 제 배나 불리려 하고 있었느냐 묻지 않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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