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다 (4)
“허억! 허억!”
연지평의 모습은 십수 일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피폐해져 있었다.
언제 씻었는지 온몸에 땟물이 줄줄 흘렀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얼굴 전체를 가렸다. 무리한 수련을 지속했는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입가에선 굳은 핏물이 보였다.
심지어 입고 있는 무복도 군데군데 찢어지고 피딱지가 묻어서 참혹해 보이기까지 했다.
뚝. 뚝.
검을 쥔 손바닥에서 핏물이 흘렀다. 호구가 찢어져도 개의치 않고 검을 휘둘렀던 것이다.
“후우. 후우.”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살짝 허리를 굽히고 자연스레 팔을 늘어트린 연지평의 두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이윽고, 호흡이 잠잠해졌다.
‘여긴 어디지.’
멍하니 부서진 바위를 바라보던 연지평은 순간 입술에서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주르륵.
말라붙은 입술이 쩍 갈라지며 핏물이 굳은 자리 위로 또다시 피가 흘렀다.
연지평은 생각했다.
‘밥을 언제 먹었더라.’
아니, 밥 이전에 물을 언제 마셨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족히 사흘은 넘은 것 같은데 아직까지 멀쩡히 서 있는 게 신기했다.
물론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에 별 감흥은 없었다.
‘언제부터 검을 휘둘렀지.’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검을 휘둘렀는지조차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첫 하루는 가문의 비전 검법들을 수련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는 무슨 수련을 했는지 기억이 없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학대에 가까운 수련이었다.
노력과 수련이란, 자신이 어떤 곳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방법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막무가내로 검을 휘둘러 봤자 몸만 상할 뿐이었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연지평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감각은 누구보다 뛰어났고, 자신이 기울여야 할 노력의 방향성도 본능적으로 잡아낼 수 있었다.
한데 지금은?
‘모르겠다. 모르겠어.’
후우웅.
불어오는 바람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오감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멍하게 뜨인 눈은 바위의 잘린 표면 속 미세한 구멍까지 들여다보았고, 코로는 대자연의 온갖 냄새를 맡았으며, 귓가엔 멀찍이 떨어진 숲속의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입 안엔 짭조름한 피 맛과 공기의 단맛이 가득 느껴졌다.
‘아파.’
감각이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니, 사소한 자극에도 몸이 움찔거렸다.
그때였다.
‘……?’
누군가가 온다. 은밀하게, 조심스럽게.
멍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그의 감각은 은밀하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포착하고 있었다.
‘적의(敵意)가 없다. 그리고…….’
투명했던 두 눈에 은은한 광채가 일었다.
‘한 명이 아니야. 두 명이다.’
순간.
파아아아앙!
가까워져 오던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돌진했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피부에 이는 공기의 변화로 알 수 있었다.
‘빨라.’
엄청난 속도다.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폭발적인 가속을 끌어낸다 한들, 이 속도의 반이나 따라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놀랍게도, 돌진해 오는 사람에게서 강렬한 투기(鬪氣)가 발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투기가 향하는 목표는 자신이었다.
‘누구지? 갑자기 왜? 근데 내가 반응할 수 있을까?’
순간 연지평은 내심 의아한 것을 느꼈다.
‘한데 난 왜 이리 여유롭지?’
여유로워할 때가 아니었다. 비록 살기는 없었지만, 속도만으로도 위협적인 돌진이었다. 지금 이 몸 상태로는 주먹 한 방만 잘못 맞아도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빠른데…… 그리 빠르게 느껴지지 않아.’
저 무지막지한 속도와 가속 지점을 생각하면, 이 정도 고민을 하기도 전에 당해야 정상이었다.
한데 자신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벼락처럼 빠르게 돌진하는 저 미지의 강자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지?
훅!
순간 연지평의 두 눈에 무서운 광채가 어렸다.
몽롱한 꿈속을 거닐다가, 느닷없이 현실 세계로 떨어진 것만 같았다. 살이 베이는 듯한 날카로운 감각도 어느새 둔해져 버렸다.
‘안 돼!’
연지평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어엉!
깔끔하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날카로운 쇠가 부러지며 매서운 공명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지평이 멍한 눈으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삼척장검(三尺長劍)의 검날이 반듯하게 반으로 잘려, 그 길이가 이 척이 조금 넘는 검이 되어 버렸다.
‘검이 잘려 나가다니.’
부서진 게 아니라 반듯하게 잘려 나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대가 예리한 일격으로 받아친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예리함도 대단했지만, 멀쩡한 장검이 반검(半劍)으로 변해 버린 것은 폭발적인 속도와 힘으로 구현한 참격(斬擊) 때문이었다.
연지평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흑룡부를 들고 사선으로 내리친 동작 그대로 멈춘 연호정이 있었다.
“굉장하구나.”
자세를 푼 연호정이 흡족한 얼굴로 웃었다.
“네 기(氣)가 무섭도록 첨예하게 날 서 있음을 느꼈다. 그간 네게서 보지 못했던 극단적인 감각 상승이었지. 혹여나 싶어 일참(一斬)의 공력을 쏟아부었거늘, 이 일격에 제대로 반응했구나.”
“……형님?”
“장하다. 진기(眞氣)를 그렇게까지 응축시킬 수 있다니, 비록 그 시간은 짧았을지언정 무척이나 혹독한 고행(苦行)이었을 것이다.”
“예?”
연지평은 형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연호정 뒤에 서 있던 강량이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정말이지 기가 차는군요. 이걸 재능의 차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집중력의 차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연호정이 강량의 말을 받았다.
“재능은 아니지. 집중이다. 다만, 너무나도 위험한 시도였어. 내가 반 시진만 늦게 찾아왔어도 지평의 생명이 위험했을 것이다.”
“그런 동생에게 그토록 무지막지한 도끼질을 퍼붓다니, 형님도 정말 독하십니다.”
“독하기는. 누구 동생인데, 그 정도 믿음은 있지.”
연호정이 웃으며 연지평의 어깨를 매만졌다.
“이놈, 아무리 그래도 앞으론 이런 위험한 수련은 하지 마라.”
“예? 위험한 수련이라니요?”
강량이 혀를 찼다.
“자기가 어떤 수련을 했는지도 모르는구나.”
연지평이 얼떨떨한 얼굴로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무슨 충격을 얼마나 받아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을 잊고 검의 흐름에 심(心), 신(身), 기(氣)를 오롯이 담아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휘둘러 댄 것이다.”
“……?!”
“다른 말로 무아지경이라고도 하지만, 네가 겪은 그 고행은 단순히 무아지경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지. 스스로 최면을 건 것인지 뭔지는 몰라도, 검과 하나가 되는 걸 넘어 너 자신을 완전히 검에 속박시켜 버린 것이야.”
“……!!”
“검아일체(劍我一體). 네가 검에 스며들었으니, 자연히 네 진기도 변화하여 너의 검법처럼 웅혼하고도 날카로워졌지. 그래서 형님의 공격에 즉각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지평이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경험을 했다고 당장 무공이 늘거나 하지는 않아. 그러나, 그 길을 한번 걸어 본 자와 걸어 보지 못한 자와의 차이는 엄청난 법이지. 필시 앞으로의 네 성장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수련은 금하는 것이 좋겠다. 짧은 시간 그 정도로 집중한 너의 노력에는 감탄을 금할 수 없지만, 몰입 역시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어야 최소한의 안전이 보장되는 법이다. 나 자신을 잊은 몰입은 큰 선물을 줄 수 있되, 그만큼의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연지평은 당황했다. 지금껏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무리(武理)였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말했다.
“일전에 말했던가? 아니라면 이 기회에 말해 주마. 내가기공을 익힌 무인이란 곧 기(氣)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을 뜻한다. 기(氣)란 곧 마음에 근본을 두니, 네 마음이 불안정하면 기도 불안정하고, 네 마음이 안정되면 기도 안정된다.”
“그, 그건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이지. 기란 의념에 따라 그 형태와 성격을 자유자재로 바꾸지만, 자칫 기를 제어하는 데에 소홀하면 훗날 제멋대로 튀는 기(氣)에 네 마음도 끌려다니게 된다.”
“……!!”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마공(魔功)이 바로 그런 류의 무공이다. 마공을 익히면 심신의 조화가 깨져 광기에 물들거나 살인을 밥 먹듯이 한다지? 근래엔 그런 불안정성을 띠는 무공이 별로 없다지만, 실제로 그런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연호정이 검지로 연지평의 가슴을 가리켰다.
“근본은 마음, 기는 네가 부리는 군마(軍馬)일 따름이다. 네가 제어할 수 없는 내공은 네 것이 아니야. 자칫 잘못하다간, 정공(正功)을 익혔음에도 진기(眞氣)의 노예가 되어 너 자신을 잃을 수 있다.”
“……!”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초기 증상이다. 제어되지 않은 기가 제멋대로 튀어 주인을 상케 하는 것. 조금 전, 너의 그 수련을 내가 막지 않았다면 주화입마로 네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동생에게 가르침을 주며, 연호정 또한 깨달았다.
자신의 무공이 왜 이전처럼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는지, 뚜렷한 목표와 노력이 수반되었음에도 어찌하여 그다음 단계로 진입하지 못했는지.
‘나 또한 입마에 들 뻔했다.’
그의 노력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흑암제로서 본인이 이룩한 경지에 집착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빤히 보이는 길이었고 이미 경험한 길이었으니, 제대로 답습하기만 하면 수년 이래 흑암의 경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자신했다.
‘틀렸다.’
그렇다. 틀렸다.
연호정은 더 이상 흑암제가 아니었다. 그는 연가의 장남이자 천하제일 후기지수 벽산호장이었으며, 무림맹 최강의 유군 부대 의정군의 대수이자 멸사군의 군장이기도 했다.
거기에, 더 이상 흑암제의 자리는 없었다.
흑암제의 경험을 활용할 순 있어도, 흑암제로서 나아갈 길은 닫혔다. 그는 새로운 길을 헤쳐 나가고 있으며, 그 길은 흑암제로 성장했던 기존의 길과 전혀 달랐다.
마음이 기를 이끈다면, 그 마음을 이끄는 것은 선명한 이성과 자기 성찰이다. 그리고 이성과 자기 성찰을 꽃피우는 것 또한 기(氣)이며, 기는 곧 마음에 근본을 둔다.
돌고 도는 깨달음. 어느새 연호정은 그 무한의 계단에서 벗어나 엇나가 버리고야 말았던 것이다.
‘더는 헤매지 않겠다.’
홍천기를 기반으로 성장했던 흑암제 시절과 달리, 지금의 그는 연가신단을 형성하여 성장하고 있다.
머리로는 그 차이를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더는, 그와 같은 못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으리라.
철컹.
흑백쌍룡부를 허리춤에 차고, 한쪽에 내려놓았던 광룡부를 든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임무를 떠나기 전, 너의 상태를 보고자 들렀다. 만일 네가 괜찮다면, 이번만큼은 너도 함께하는 게 어떨까 싶었더랬지.”
연호정은 더 이상 연지평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이 숲의 입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뿐이었다.
연호정이 물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함께하겠느냐?”
연지평의 눈이 빛났다.
푸르르르륵!
숲의 입구 저 멀리,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군마들과 그 위에 올라탄 백전노장들이 시린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곳이다.’
바로 저곳에, 저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형님이 산다. 그리고 그 세상으로 향하는 길에 강량은 선택받았다.
하면 자신은?
“가겠습니다.”
스르릉!
반검을 납검한 연지평이 비틀거리며 연호정의 뒤를 따랐다.
“더 이상 걱정만 하며 기다리진 않을 겁니다.”
선택을 받기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목숨은 네가 챙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