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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82화 (382/963)

382화. 범과 사자는 다르다 (2)

부르르르.

강량은 온몸의 피부가 떨려 오는 충격을 느꼈다.

양천에게 겁을 먹지는 않았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근래 구도자의 가까운 수행을 하며 무공과 마음 양면에서 큰 성장을 이룬 그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강인함을 얻었다.

그럼에도 떨린다.

마음은 굴복하지 않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해 버린 것이다.

‘엄청나구나.’

강량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것이 성천십삼좌, 중원 최강을 논하는 절대고수의 힘!’

스르르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공기가 칼날과도 같다.

차가운 산 공기는 어디로 갔는지, 뜨거운 열풍이 날카롭게 불어닥쳤다. 온몸의 피부가 벗겨진 것처럼 따끔거리고 관절은 삐걱거렸으며, 피가 잔뜩 몰린 근육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기파를 발산하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야. 살기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몸이 겁을 집어먹고 있어.’

강량이 왼손으로 오른쪽 팔목을 움켜잡았다.

‘빌어먹을,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괴물이었구만.’

순간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뭐? 하하! 그래, 네 말마따나 이 애비가 성천의 경지에 오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지만 량아, 알아 두어라. 세상에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괴물이 많다. 성천은 그중 정점이야. 비록 애비 역시 흑도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라 불리지만, 앞으로 십 년, 이십 년을 수련한다 한들 성천의 반열에 오를 거란 자신은 없다.’

무공 방면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던 아버지였다. 가족에겐 자상했지만, 강한 근성과 자신감으로 흑도 최고의 호한이라 불리던 분이 아버지셨다.

그런 아버지가 딱 한 번 약한 소리를 한 것이 바로 그때였다.

‘십 년, 이십 년을 수련한다 한들 성천에 이를 수 없다…….’

강량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 말에 실린 무게감을 이제야 알겠어.’

쿵!

광룡부의 거대한 도끼날이 땅에 반절이나 박혔다.

“이런 식으로 다시 뵙게 되어 여러모로 유감이오. 그간 잘 계셨소?”

넉살 좋게 묻는 연호정의 표정은 강량과 달리 몹시 담담했다.

양천은 투명한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게 아닌데도 두 눈에서 수천 자루의 비수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그야말로 인간의 눈빛이 아니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갑작스레 반가운 얼굴 봐서 할 말을 잃으셨소?”

“……그래, 반갑군.”

양천의 얼굴에도 희미한 웃음이 드리워졌다.

순간 강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위험!’

극도의 위기감에 심박수가 두 배로 치솟았다.

다행히 강량이 느낀 위기감과 달리 양천은 손을 쓰지 않았다.

“죽은 줄 알았던 옛 수하가 기별도 없이 돌아온 적이 몇 번 있었더랬지. 죽음을 뚫고 아득바득 이승으로 기어 올라온 독기 넘치는 녀석들. 그런 녀석들은 지금도 내 휘하에서 열심히 움직여 주고 있지.”

“…….”

“한데 네놈은 다시 못 써먹겠다. 차라리 평생 눈에 띄지 않는 산골에 숨어 밭이나 일구며 살지 그랬더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수하라고 불러 주는 걸 보니, 그간 쌓인 정(情)이 깊긴 깊었던 모양이외다.”

“정? 글쎄…… 그래, 생각해 보면 정이 쌓이긴 했지. 내 육십 년을 넘게 살면서 너만 한 걸물은 본 적이 없거든. 배포 좋고, 머리 잘 돌아가고, 심지어 무공도 뛰어났어. 아닌 말로, 아주 잠깐이나마 훗날 네게 묵룡부를 물려줄까 하는 생각도 했더랬다.”

양천의 제자, 부선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스승이 후배에게 이 정도의 고평가를 내린 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한데 인제 보니 참으로 쥐새끼 같은 놈이 아닌가. 하기야, 하늘은 불합리한 듯하면서도 그 속에 공평함을 담고 있다 하였지. 신이 네놈에게 능력과 강단을 내려 주었지만, 천성은 주지 않았군.”

“그렇소?”

기이한 대답이었다.

양천의 목소리가 점점 싸늘해졌다.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 천하제일 후기지수 연호정이 네 정체였더냐?”

“부끄러운 수식어는 붙이지 마시오. 나는 그저 연호정일 따름이오.”

“연호정…… 연가라…….”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궁금하지 않으냐? 강동 촌구석의 검가 하나 지우는 데 얼마나 걸릴지?”

“…….”

“누굴 보낼 것도 없지. 내가 지금 화가 많이 났거든. 기분도 풀 겸 나들이 삼아 강동에 가서 네놈 가문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도 제법 괜찮은 유희겠다 싶은데, 어찌 생각하느냐?”

“역시 사람은 잘 안 변하는 모양이오.”

“……?”

“권좌에 앉아 떵떵거리면서 살아도 결국 그릇은 그 정도라…….”

연호정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맹장(猛將)이지만 대장(大將)은 못 되는군.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모용군이 낫겠소.”

화아아아악!

양천의 몸에서 불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간적인 반응이었지만, 의외로 양천의 목소리는 더욱 담담해졌다.

“잘들 노는구나.”

“그런가.”

“모용군, 연호정. 너희 두 놈이 차례로 찾아와 흔들어 볼 만큼, 이 내가 만만한 사람으로 보였더냐?”

시간이 지날수록 살기는 짙어지되, 양천의 표정과 목소리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내가 지금 당장 네놈의 머리통을 뽑지 않고 주절거리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무림맹이 무서워서? 아니면 본부의 미래 때문에? 그도 아니면, 서 푼 값어치도 없는 알량한 의리가 남아서일까?”

“…….”

“아니지. 내가 지금 널 가만히 놔두는 건 나 자신을 위해서다. 내, 묵룡부주라는 자리에 앉은 이후 권력에 도취되었던 게 사실이야. 그로 인해 바보짓을 많이 했어.”

“…….”

“더는 그러고 싶지 않다. 그래서 참고 있는 것이야.”

주르륵.

연호정은 양천의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살가죽을 파고들었다. 무덤덤한 기색을 유지하고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의외로군.’

연호정은 은근히 놀랐다.

‘양천 당신, 발전이라는 걸 하는구만?’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 명성이 드높은 사람, 힘이 있는 사람.

권력이든 실질적인 힘이든, 한 분야에서 타인보다 우월한 자들은 하나같이 변화를 거부한다. 쉽게 말하자면 오만해지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본 양천도 그러했다. 인간적인 매력도 충분하고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나쁘지 않은 능력자지만, 권력의 단맛을 보았고 무림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즉, 누구라도 정체를 겪기 마련인 것이다. 그리고 연호정은 성천의 강자 중 그 정체를 가장 오래 겪을 사람이 양천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틀렸다.

‘모용군 때문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고맙군. 솔직히 지금으로선 당신을 상대하기가 어렵거든.”

“지금으로선?”

“왜? 그 말이 거슬리시오?”

“……역시 네놈은 재미있다. 언젠가 이 영역에 오를 거라고 자신하는 모양이지?”

“물론. 그것도 길지 않은 시간 내에.”

물끄러미 연호정을 바라보던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인들이 말하는 무극지경, 소위 성천의 경지는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영역에 거한다. 단순한 노력으로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야. 노력으로 이를 수 있었다면, 이미 개나 소나 성천의 강자라 불리고 있었을 게다.”

“알고 있소.”

“하지만.”

양천이 고개를 모로 꼬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넌, 오르지 못할 나무를 보며 시간 낭비할 놈이 아니다. 내가 본 그때의 너라면 말이야.”

“당신이 본 그때의 나와 다르지 않소. 다만 그때의 난 지금보다 더 과장된 언행을 보였을 뿐.”

“나를 속이기 위해?”

“그렇소. 당신을 속이기 위해.”

양천은 말없이 연호정을 주시했다. 연호정 역시 입을 닫고 양천의 두 눈을 직시했다.

휘이이이잉.

용암처럼 들끓었던 열풍이 사그라들고, 본래의 차디찬 산바람이 공기를 식혔다.

‘도대체…….’

부선은 흔들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그녀는 다른 사형제보다 유독 오랫동안 스승을 모셨다. 그래서 양천이라는 사람의 무공이 얼마나 무서운지, 그의 존재감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무종지벽을 삼 년 전에 돌파한 그녀조차 아직도 스승과 눈을 마주하기 어려웠다. 기세를 발하지 않아도, 그저 분노하는 것만으로도 심신에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저놈은 뭔가? 어떻게 천외천의 강자인 스승의 눈을 직시하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당당히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벽산호장…… 지난 몇 년간 믿기지 않는 과업을 완수한 희대의 천재라고 들었는데.’

부선이 침을 삼켰다.

‘들리는 명성보다 더 무서운 놈이었구나!’

그때,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모두가 당황을 금치 못했다.

“크하하하하!!”

하늘이 떠나가라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리는 사람.

놀랍게도 그자는 양천이었다. 한참 동안 연호정을 노려보던 양천이 후련한 듯 앙천광소를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조차 묘한 눈으로 양천을 볼 정도로 그의 행동은 갑작스러웠다.

이내 양천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 역시 괜찮아.”

“무엇이 말이오?”

“솔직히 말해 주지. 내, 이 자리에 나오기 전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뭐, 별 값어치가 없는 고민이었지. 대화가 끝나면 그대로 널 죽일 생각이었다.”

“그럴 것 같았소.”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양천이 자세를 바꾸었다.

서서히 상체를 뒤로 눕히고 양손으로 바위를 지탱한다. 보란 듯이 다리를 꼬고 앉은 그 자세는 참으로 방만하면서도 자유분방해 보였다.

“들어 보도록 하지. 일단은.”

“일단이라…….”

“네놈이 날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하지만 네놈의 평가 따위야 지금의 내게 무의미할 뿐이다. 또한, 이후의 일 또한 생각지 않으련다.”

“…….”

“날 만나자고 한 이유를 설명해 봐. 네놈의 그 기름진 혓바닥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하구나.”

“마음에 들면, 그냥 보내 주시겠소?”

“물론이다. 아닌 말로, 너처럼 뛰어난 놈이 제 살길도 모색하지 않고 사지에 머리를 들이밀었겠느냐?”

“날 죽이면 전쟁이 일어날 텐데?”

“스스로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군. 전쟁은 그리 쉽게 나는 게 아니야.”

“알고 있소. 그래도 전쟁은 날 거요.”

“역시나 믿는 바가 있었군. 하지만 말이야.”

양천이 스산하게 웃었다.

“전쟁이 나도 상관없다. 그러니 이곳에 온 이유를, 나를 불러낸 이유를 설명해 봐. 신중하게, 그리고 이왕이면 공손하게.”

연호정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깃들었다.

‘이것 참.’

역시나 양천은 한 조직의 수장으로서 최고라 불릴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애초에 당신에게 그런 조직 따위는 필요치 않았어. 오랜 시간 꿈꿔 온 야심이 당신의 발전을 막았지만, 역시나 당신에게 어울리는 건 흑도의 총수라는 자리 따위가 아니야.’

양천에게 묵룡부주의 자리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에게 어울리는 것은 바로 지금의 저 모습, 저 여유였다. 저 여유로운 자세야말로 양천을 투왕답게 만드는 것이다.

‘흑도 연맹의 맹주가, 다시 성천의 강자로 돌아왔구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치료를 해 주려고 말이오.”

“뭐?”

“당신 가슴팍에 찍혀 있는 사음교주의 장인(掌印), 음황신장의 중독을 벗겨 내 주려 왔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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