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화. 범과 사자는 다르다 (3)
번쩍!
양천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음황신장의 중독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그렇소.”
양천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리고 그 방법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이었느냐? 네놈의 목숨줄이?”
“여러 대응책 중 하나일 뿐이오.”
“대응책이라.”
“당신 말마따나 아무런 대비도 없이 찾아오진 않았소이다. 할 일이 많거든.”
양천이 공격적으로 물었다.
“그 할 일이라는 게 삼교 놈들을 족치는 것이냐?”
“그렇소.”
“하면, 나를 속이고 본부의 정보부장으로 침투한 것 역시 삼교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느냐?”
양천은 음황신장의 장인이 진짜 중독인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자신이 확실하게 중독되었다는 것을 최초로 알게 된 순간이란 뜻이다.
그런데도 연호정의 목표부터 묻는다. 이 중독을 해결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다.
놀라우리만치 대범한 성품. 권력의 단맛에 빠져 본래의 천품을 잊고 있던 양천이, 모용군의 일갈에 정신을 차린 후 연호정과의 대면으로 비로소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쯧.’
연호정은 양천이 부담스러워졌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손쉽게 조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가, 어느새 화포 몇 개를 겨눈 채 자신을 상대하는 듯했다.
‘참 어려운 사람이다. 내가 과거에 이런 작자를 어떻게 잡았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연호정의 미소가 짙어졌다.
“……보기 좋군.”
“뭐?”
“아니오. 그냥 혼잣말이오.”
“웃기지도 않는 소리는 그만하고, 질문에나 똑바로 대답하거라.”
연호정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소. 내 최종 목표는 삼교요.”
“역시 그랬던가?”
“양 부주께서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소. 해서 내 간단히 말하리다.”
“귀를 열고 들어 주지.”
“내가 묵룡부에 침투한 건 삼교 때문만은 아니었소. 그 당시에 양 부주가 세력을 일으키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으며, 향후 무림 정세를 위해 묵룡부의 기밀 정보와 전력 제어를…….”
연호정의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강량은 연호정의 말을 들으며 은근히 놀랐다.
‘형님은 무사나 부대의 수장으로서만이 아니라 외교 능력 역시 출중하시구나.’
그는 평소 연호정의 말투가 어떤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성격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연호정의 설명은 양천의 성격을 고려하여 간략하고 듣기 좋게 잘 포장되어 있었다.
말이란 같은 진실이라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청자의 기분을 바꿀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사람을 잘 보는 연호정에게 이러한 화술까지 갖춰졌다는 것은 외교가로서 강력한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 무림맹에서 왜 널 파견했는지, 본부에서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차는군. 결국 우리는 무림맹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었다는 건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 전에 묵룡부에서 먼저 한 대 때렸으니 비긴 걸로 생각하시오.”
“한 대 때렸다니? 무슨 말이냐?”
“장강 이남에 계약 중이던 상단 중 상당수를 무림맹 몰래 빼앗아 가지 않았소? 사음교의 도움을 받았든 뭐든 묵룡부를 세운 거야 당신 마음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돈을 갈퀴로 쓸어 갔으니 우리 쪽도 꽤 아팠소.”
“빼앗아 갔다는 말은 좀 그렇군. 상단은 상단일 뿐이다. 더 좋은 거래처가 있다면 주저 없이 상대를 바꾸는 족속들이거늘 어찌 빼앗아 갔다고 말하느냐?”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우리 쪽에서 묵룡부의 주요 사업을 몇 개 가져갔다고 생각하면, 그쪽은 안 억울할 것 같소?”
“…….”
“정당한 경쟁과 전략적 탈취는 종이 한 장 차이외다. 그리고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의도요. 그런 면에서, 당신은 본맹에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힌 셈이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셈법을 아주 묘하게 하는 그 버릇은 어디 안 가는군.”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래,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놈이 침투하여 본부를 어지럽혔던 것에 대해서는 이걸로 비긴 셈 치겠다.”
시원시원한 인정이었다.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없던 일로 생각하겠다는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대화가 아주 원활하게 돌아가는구려.”
“착각하지 마라. 그게 널 살려서 돌려보낼 이유가 되지는 않으니까.”
양천이 조소를 머금었다.
“세력 간의 다툼에서 비긴 걸로 친 것이지, 날 기만한 네놈의 죄를 사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셈은 다르게 쳐야지?”
“깐깐하시군. 그냥 인정하시오. 속은 사람이 바보라는 걸.”
“바보가 속기까지 했으니, 분풀이로 칼자루라도 쥐어야지. 아니 그러냐?”
살벌하기 그지없는 대화였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음황신장, 그거 꼭 해독해 드려야겠군.”
양천이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걸 듣기 전에 하나 묻지.”
“무엇이오?”
“이 중독에서 날 벗어나게 해 주면, 너는 내게 무엇을 바라느냐?”
“내 목숨값이라 하지 않았소?”
“진실을 말하라.”
“…….”
“너는 알고 있다. 내가 상대하기 까다로워졌을 뿐, 상황이 어찌 되든 널 죽이지는 않으리라는 걸.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날카로우셔.”
“난 장인이 중독 증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지. 한 번 의식을 잃은 연후로는 아무 피해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렇게 생각한다.”
양천이 진지하게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네가 내게 이 증상에서 벗어날 방도를 알려 주는 건, 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냐?”
손쉽게 내다보는군. 거기까지도.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듣기로, 당신이 ‘이번만큼은’ 도와주겠다고 했지 완전히 같은 편이 된다는 말은 없었소. 적어도 모용군은 그리 말했소.”
“…….”
“당신은 투왕이오. 당신 가슴팍에 그 거지 같은 흔적을 남긴 놈에게 한 방 먹여야 할 거 아니오?”
“그리고 그것이 네놈들에게 도움이 되는군.”
“동시에 당신에게도, 당신을 따르는 부하들에게도 도움이 되겠지. 어차피 놈들의 목표는 무림맹이 아니라 중원 전체니까.”
“…….”
“우리가 친구로 만났으면 좋았을 거요. 하지만 우린, 아무런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술잔을 주고받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소이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그 연배에 친구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지.”
“뭐가 되었든 말이오.”
“즉, 적의 적은 친구다?”
“그런 셈이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차갑게 웃었다.
“그것만이 아니구나.”
“…….”
“아까 네 녀석의 얘기 중 다소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었다. 너의 말, 목소리는 진실을 기반으로 하는 동시에 굉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지. 하지만 의식적이었는지, 무의식적이었는지 한 인물에 대해선 유독 말을 아꼈어.”
“…….”
“모용군.”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모용군을 제거하고 싶으냐?”
“……그렇소.”
“나라는 칼을 이용해서?”
“그건 아니오.”
“아니다? 왜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께서 항상 내게 말씀하셨소. 선은 넘지 말라고.”
“…….”
“당신을 이용하든 손을 잡든, 그것은 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한 것. 내부의 적을 처리하기 위해 흑도 세력을 끌어들일 생각은 전혀 없소이다.”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나도 몰랐소.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아버지께서 선을 넘지 말라고 하신 그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소.”
“그래서, 내게 모용군의 처리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소. 놈은 내가, 우리가 처리할 것이오.”
“그게 아니지.”
양천의 눈이 빛났다.
“모용군은 네놈이 처리한다 한들 놈의 근본을 흔들 수 있는 사람은 나이니, 적어도 나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그것이 바로 본맹의 군사께서 바라는 최선이오.”
“실질적으로 모용세가를 타격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모용군에게 우리의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 줄 필요는 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의문은 전부 풀렸다.”
깔끔한 인정이었다.
연호정이 말했다.
“하면 음황신장을…….”
“지금부터, 이 대화의 장의 주체자를 바꿔 보도록 하지.”
스륵.
양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우우웅.
차가운 산바람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무슨 의미요?”
“흑도에는.”
치이이이이익!
양천의 두 주먹에서 희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불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주먹에 진짜 불꽃은 없었다. 심지어 화기(火氣)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느껴졌다. 저 주먹에 잘못 맞으면 화상 정도가 아니라 타격 부위 자체가 소멸될 것 같은 살벌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예로부터 규칙이 있었다. 뒷골목 파락호들이 다툴 때가 아니라, 흑도에도 귀족들이 있던 시절에 만들어진 규칙이지. 그리고 스스로를 진짜 흑도의 적자라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도 그 규칙을 지키면서 산다.”
지이이잉! 지이잉!
뿜어져 올라오는 연기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광채가 번갯불처럼 튀어 올랐다.
모용군의 뇌정공에서 번쩍이는 전광과도, 연위의 절대일검에서 보이는 광채와도 달랐다. 번개처럼 보이지만 화염과 같았고, 화염과 같지만 또 칼날과 같았다.
“여러 규칙이 있지만, 네가 새겨들어야 할 것은 하나다.”
훅!
양천의 머리카락이 몽땅 하늘로 솟구쳤다.
“큭!”
부선이 신음을 흘리며 십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것은 강량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연호정만이 무저갱처럼 깊은 눈으로 양천을 바라보며, 땅에 박힌 광룡부의 창대를 거머쥘 뿐이었다.
“변절자에겐 항변의 기회를 준다. 그 항변이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사지 중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모든 원한을 마무리 짓는다.”
“…….”
“그러나 변절자가 항변을 거부하면 그 즉시 참살한다. 그것이 흑도의 규칙이다.”
“…….”
“물론 예외는 있다. 변절자에게 사정이 있고, 그 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경우에는 칼날 위에 케케묵은 강호의 도리를 담기로 한다. 그것은…….”
“삼 초.”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처형인의 삼 초를 받아 내면 그 즉시 모든 원한을 마무리 짓는다.”
양천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그런 것도 알고 있느냐?”
“그렇소.”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네 말이 옳다. 네가 나의 삼 초를 버티면 그간 우리 사이의 모든 원한을 이 자리에 부는 바람에 실어 묻겠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삼 초를 버티면 된다라…… 내가 버티지 못하고 죽으면 중독도 못 고칠 텐데?”
“상관없다.”
콰르르르릉!
양천이 선 대지가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전신 가득 검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양천, 실로 오랜만에 전력을 개방한 절대고수의 위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흑도의 수장이자 투왕이다. 원한을 해소하든지 아니면 팔다리 중 하나를 잘라 내든지, 알아서 선택해라.”
양천이 흉악한 웃음을 지었다.
“네놈이 얌전히 죽어 줄 놈은 아닐 텐데?”
“……쉽게 넘어가도 될 걸, 꼭 일을 이리 살벌하게 만드시는군.”
콰앙!
탄력적인 손놀림으로 광룡부를 들어 올린 연호정이 횡재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투왕의 삼 초, 받아 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