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범과 사자는 다르다 (5)
“……이건 또 재미있군.”
자신의 정강이를 내려다보는 양천의 눈이 묘한 빛으로 일렁였다.
“타격의 순간을 노려 폭발적인 참격으로 내공 방패를 헤집고 피육을 베었어. 우연인지, 아니면 노린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치이익!
정강이의 상처가 단숨에 아물었다.
상처라고는 해도, 말 그대로 피육만 베였을 뿐이다. 깊이로 치면 반 치도 안 되는 상처. 하지만 그 역시 자상은 자상일진대 극단적인 내공 운용으로 단숨에 상처를 치료해 버렸다.
무서운 공능이었다. 단순히 양천의 흑사자기가 대단해서라기보다는, 무극에 오른 절대자에게 이 정도 상처는 내공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치료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의 상처는 예외였지만.
“그 연배에 그만한 경지도 놀랍기 짝이 없지만, 진정 놀라운 것은 효용이도다.”
쿵!
양천이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상처를 입었던 다리였다.
“스승이 누구냐?”
쿠르르릉!
진기가 유형으로 번져 나오지 않았음에도 온몸에서 흑색 갈기처럼 보이는 암흑의 아지랑이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강동 벽산연가의 가주, 판관검의 무공이 육가의 수위를 다툰다고는 하나, 아직 그의 능력으론 너만 한 괴물을 키워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무공, 그 투쟁술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아버지에게 배웠소.”
“판관검에게? 그럴 리가 없다.”
“내 무공의 시작은 아버지였소. 내공, 검법, 권법, 보법 등 모든 무공의 기초를 그분께 배웠으니까.”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회귀한 이후, 최강의 적과 싸우면서도 미소를 짓는다. 당장 목숨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는 자, 연호정이 대단한 이유였다.
“기본이 탄탄하면 세상은 홀로 배울 수 있는 법. 비록 엄하셨지만, 내 무공의 근본은 아버지에게서 시작된 거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물론 사신무를 가르쳐 주신 스승님도 계셨다. 하지만 연가에서 태어나 아버지께 무공의 기초를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의 그가 존재할 순 없었을 것이다.
돌고 도는 이야기. 결국 지금의 내가 감사함을 느끼는 대상이 누구냐의 차이일 뿐이다.
“세상은 홀로 배우는 것이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양천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지. 죽지만 않으면 싸움은 홀로 배울 수 있지. 하지만 기술은 배워도 천품(天品)은 배우기 힘든 법.”
양천이 자세를 낮추었다.
믿을 수 없게도, 자신보다 한참 약한 젊은 후기지수를 상대로 자세를 잡은 것이다.
“내게 싸움을 건 네 오만이 어떤 결과를 낼지 궁금하구나.”
파아아악!
연호정이 양천에게 달려들었다.
빠른 속도였지만, 혈익휘천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늦되 더 신중하면서도 공격의 의지를 놓지 않는, 몹시 전투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연호정이 양천의 일 장 앞까지 도달했다.
쿵!
움직임 자체가 품으로 파고드는 형태였다. 하지만 연호정은 파고들지 않았다. 일 장 거리에서 강한 진각을 밟고는 사선으로 흑룡부를 내리치는데, 허공을 베는 도끼날에서 푸른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쩌어어엉!
도끼가 다 휘둘러지기도 전에 허공을 벤 참격이 스러졌다. 양천이 한 일이라고는 겨우 왼손을 까딱거린 것뿐이었다.
파앙!
양천이 진격했다.
연호정의 눈이 부릅떠졌다.
‘피할 수 없군.’
자신보다 훨씬 느린 속도지만 피할 수가 없다. 양천의 움직임이, 그가 발산하는 투기가 회피 방위를 원천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공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제약하는데, 그것이 숨 쉬듯 자연스레 개방되고 있다. 깨달음 자체가 몸에 녹아 있는 것이다.
‘피하지 못하면.’
연호정이 흑백쌍룡부를 교차했다.
‘막는다.’
양천이 힘차게 주먹을 뻗었다.
콰아앙!
연호정이 무서운 속도로 튕겨 나갔다.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막았지만, 고작 일권(一拳)을 막았을 뿐인데도 내상을 입은 것이다.
“흐음?”
파악!
이번에는 번개처럼 빨랐다.
조금 전의 속도는 거짓말이기라도 한 양, 폭발적인 속도로 움직여 연호정의 측후방을 점했다. 그 속도가 가히 혈익휘천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부우웅!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단순히 이동 속도만 빠른 게 아니었다. 상대가 자세를 잡아 회피, 방어하기 애매한 박자로 치고 들어가 일권을 날렸는데, 연호정이 절묘한 몸놀림으로 그 주먹을 피한 것이다.
‘어떻게 피했지?’
전력을 다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전력을 다했다면 연호정은 세 합, 아무리 길어 봤자 열 합 안에 죽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번 공격이 쉽게 받아 낼 수 있는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박자를 가지고 노는 변칙적인 싸움법은 성천의 강자라도 방심하면 당할 만큼 위협적인 싸움법이다.
한데 연호정이 그걸 피한 것이다.
파악!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몸이 반 바퀴 회전하더니, 팔꿈치가 관자놀이를 노렸다.
무섭도록 자연스러운 대응이었다. 회피와 동시에 공격을 가한다. 그 일련의 동작이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마치 미리 합을 짜 두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양천이 팔꿈치를 향해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쾅!
연호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양천의 머리를 친 팔꿈치가 뼛속까지 아려 왔다.
‘역시.’
파바바박! 터어엉!
흑백쌍룡의 난격술로 양천의 접근을 방해한 연호정이 단숨에 후방으로 물러났다.
‘서슴없이 박치기를 해 왔다. 역시 예전과 달라진 게 없군.’
명문 출신이 아니더라도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나름의 품위를 따지게 마련이다. 박치기는커녕 다리를 올리는 각법도 잘 안 쓰려 하는 고수도 많이 봤다.
하지만 양천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묵룡부의 부주 노릇을 하며 없던 체면이라도 생겼나 싶었더니, 역시나 양천은 양천이었다.
‘투왕, 싸움의 제왕이라는 명성은 안 버린 모양이로군.’
그때, 양천이 입을 열었다.
“싸우자고 했느냐?”
연호정이 주춤했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싸움이 될 것 같지 않군. 내 정강이에 상처를 입힌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지만,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해.”
“맞는 말이오. 당신이 전력을 다했다면 지금쯤 난 불귀의 객이 되었겠지.”
“잘 아는 놈이 나와 싸우자고 했느냐?”
“그렇소.”
“그렇게 죽고 싶은가.”
“죽고 싶지 않아서 싸우는 거요.”
“무슨 말장난이냐?”
번쩍!
연호정이 날린 흑룡부가 양천의 손에 잡혔다.
동시에 연호정의 각법이 양천의 하단을 노렸다. 백룡부를 들고도 각법을 시전한 것이다.
양천의 다리와 연호정의 다리가 충돌했다.
쾅!
폭음과 함께 연호정의 몸이 회전했다.
양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힘을 흘렸다?’
애초에 받아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순간의 전투 감각만큼은 감탄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부웅!
회전하던 연호정이 백룡부로 양천의 옆구리를 노렸다.
‘애송이, 이런 장난질을…….’
번쩍!
양천의 팔꿈치가 도끼를 휘두르는 연호정의 손목을 노렸다.
뭐가 되었든, 얌전히 돌려보낼 생각은 없었다. 못해도 팔 하나는 박살을 내 주리라.
그리고 그런 양천의 의도는, 놀랍게도 실패를 맞이했다.
캉! 퍼억!
양천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무기를 놔?’
그의 팔꿈치에 맞은 백룡부가 땅에 박혔다.
그럼 연호정은?
후우우웅!
순간 양천은 자신의 눈앞에서 시퍼런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질주하는 환상을 보았다.
‘장법?!’
투웅!
양천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막을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막으면 후속타가 연이어서 들어올 것이다.
물론 그 후속타도 전부 막아 낼 수 있겠지만, 몸이 먼저 반응해 버렸다. 싸움꾼의 버릇, 굳이 힘의 차이를 알려 주기 위해 막는 것보다 피해서 흘려 버리는 게 낫다는 걸 몸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연호정이 바라던 바였다.
퍼어엉!
빗나간 반룡장이 땅을 치자마자 양천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번쩍! 콰앙!
양천의 눈이 커졌다.
‘막았어?’
피한 게 아니라 막았다. 그것도 겨우 막은 게 아니라, 나름대로 여유롭게 막았다.
촤아아아악!
흑색의 수기(水氣)가 파도가 되어 양천을 덮쳤다.
현무공, 북천십이벽의 방어 이후 곧장 백호공의 호왕구벽세가 발현되었다.
콰앙!
연호정의 권풍이 양천의 좌측 안면부 한 치 옆을 통과하며 허공에 폭발을 일으켰다.
파바바박!
짧은 보행, 급작스러운 속도로 접근한 연호정이 호왕구벽세의 아홉 초식을 일수유에 쏟아부었다.
양천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써서 연호정의 권법을 막았다.
퍼버버벙! 퍼버벙!
연호정의 주먹은 실로 매서웠다.
‘주먹에 제대로 힘을 실을 줄 아는군.’
파아악!
권법으로 상대의 급소를 노리더니, 돌연 자세를 낮추어 하단을 노리는 듯하다가, 어느새 상단을 향해 각법을 시전한다.
전신 근육에서 자아내는 엄청난 탄력이 돋보였다. 양천이 오른손으로 연호정의 발을 쳐 냈다.
파앙!
손짓 한 번에 자세가 무너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주춤거리던 연호정에게 곧장 주먹을 갈기려던 양천은, 순간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흙더미에 기가 차는 걸 느꼈다.
‘흙을 뿌려?!’
자세가 무너질 걸 미리 알고 바닥을 짚어 흙더미를 뿌려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싸움법이다. 진흙탕 싸움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양천조차도, 설마하니 연호정이 이런 웃기지도 않는 짓을 저지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훅!
내공 발출로 흙더미를 모조리 날려 버린 양천.
콰앙!
그 때문에 늦춰진 주먹이 맨땅을 파고들었다. 만약 찰나의 내공 발출이 아니었다면 그의 주먹은 이미 연호정의 복부에 꽂혔을 것이다.
파아아앙!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연호정이 두 다리를 회전하며 양천의 상체를 후려쳤다.
무척이나 희귀한 투술이었다. 어떻게 보면 다소 우스꽝스러운 자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양천은 연호정의 자세나 공격을 우습다고 욕할 수가 없었다. 자세는 기묘했지만, 풍차처럼 회전하며 날아오는 각법이 자신의 옆구리와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나게 날카롭군.’
파앙!
양천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진다 싶더니, 곧바로 연호정의 전면에 나타났다.
이번만큼은 연호정도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눈빛에 당황이 묻어 나왔다.
양천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타악!
놀라운 행동이었다.
양천이 왼손으로 연호정의 멱살을 잡았다. 동시에 오른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안면에 꽂아 넣을 기세였다.
그때였다.
화르르르륵!
광룡부를 들었을 때, 도끼날을 벌겋게 만들 정도로 화력을 집중했을 때처럼.
불꽃처럼 일어난 주작기가 멱살을 잡은 양천의 손목을 휘감았다.
‘……!’
찌이이익!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천은 끝까지 연호정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다만, 한순간의 ‘흔들림’을 읽은 연호정이 옷을 찢고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이놈…….’
내공으로 의복을 경화시켜 물러나지 못하게 한 걸 꿰뚫어 보고 한발 앞서 화기를 집중, 옷을 찢고 달아나 버렸다.
양천은 저도 모르게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이놈은 한 수 앞, 아니 두 수 앞을 읽고 행동한다. 이처럼 빠른 공방에서, 심지어 상대가 투왕이라 불리는 자신인데도!
“후욱.”
이 장 밖으로 물러난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고 양천을 노려보았다.
양천은 자신을 노려보는 연호정의 눈에서 무서운 투쟁심을 읽었다.
‘투왕이라 불리는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봐? 고작 그 정도 무공을 갖고?’
순간 양천은 깨달았다.
“싸우자…… 그래, 그 싸움이 내가 생각하는 싸움이 아니라 이런 싸움이었단 말이지?”
“후욱. 후욱.”
연호정이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장 치고 들어갈 생각에 양천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양천은 일순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벌을 주려 했더니만, 나와의 싸움을 제 성장의 밑바탕으로 삼겠다, 이 말이렷다?”
콰앙!
양천이 자세를 낮추었다.
그는 전력을 다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싸움의 제왕으로서, 상대의 도전에 당당하게 응해 줄 생각이었다.
“내가 눈치가 없었군. 전사의 싸움이 아니라 투사의 싸움이라…… 좋다. 어디 이번에도 네 장단에 맞춰 줘 보마.”
양천이 손을 까딱였다.
“한 수 가르쳐 주마. 와라.”
파아악!
연호정이 맹수처럼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