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96화 (396/963)

396화. 혼전(混戰) (2)

이틀 전.

“쿨럭!”

작은 산속 동굴로 들어온 소방은 한 움큼의 피를 토해 냈다.

“이런…….”

주르륵 흘러내린 핏물은 무척이나 탁했다. 순식간에 몰리다가 공격 몇 방에 극심한 내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 도주하면서 무리한 내공 운용으로 탁기가 온몸을 채워 버렸다.

세상이 무공을 정공(正功)과 사마공(邪魔功)으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은 크게 보면 무공의 특성을 두고 가른 것뿐이다. 사마공이라 해도 온몸에 탁기(濁氣)가 치솟으면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소방은 서둘러 운공을 감행했다. 다행히 혈음사기는 무공 특성 자체가 입공(立功)과 동공(動功)을 중심으로 삼았다. 운공을 하며 주변을 경계하는 데에는 이만한 무공이 없었다.

치이이이익!

소방의 몸 곳곳에서 회색빛 연기가 치솟았다.

운공 조금 했을 뿐인데 육안으로 보일 만큼의 탁기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소방의 실력이 대단한 것도 있지만, 그만큼 온 혈도에 탁기가 쌓여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상황이 제법 심각했다.

‘빌어먹을.’

이를 악문 소방이 품에서 작은 단약을 꺼내 들었다.

‘이걸 이럴 때 써야 하나?’

비록 교주의 자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제아무리 반쪽짜리라도 신의 피를 이은 자다. 다른 교도들과는 근본적으로 대접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소방이 손에 든 단약이 그 증거였다.

‘이번에 이걸 쓰면, 내게는 한 알밖에 남지 않는데.’

음정단(淫晶丹)은 사음교에서 자랑하는 희귀한 영단 중 하나였다.

여느 영약처럼 내력 증강과 회복의 효과가 뛰어났고, 특히나 사기(邪氣)의 농도가 짙을수록 효과가 배가 되기 때문에 고위 간부들이 애용하는 영단이었다.

문제는 이 영단을 만들기 위해선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모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에서도 어지간히 큰 공(功)을 세운 게 아니고서야 지급하지 않으며, 그것도 간부급이 아닌 일반 교도들에게 절대 지급되지 않는다.

‘말이 한 알이지, 그건 내 목숨줄이다. 최종 결전에 반드시 필요해. 그렇다는 건…….’

소방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마지막.’

그녀는 망설였다.

설마하니 중원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판국에, 심지어 자신보다도 약한 놈들의 합공으로 이런 치명상을 입을 줄은 몰랐다.

순간 소방의 눈이 악독해졌다.

‘그 망할 자식.’

그녀는 연호정의 말을 떠올렸다.

‘놈의 말이 맞았군. 당황하면 생각이 많아져서 대응키가 더욱 쉬울 거라고 하더니.’

‘너는 여기서 못 벗어나.’

놈의 말이 맞았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소방은 안 그래도 몰입하기 힘들었던 전투에 완전히 집중을 잃었다.

놈이라니? 놈이 누굴까?

‘설마.’

소방이 저 멀리 동쪽을 바라보았다.

“……야율적, 네놈이?”

분노에 차서 중얼거렸지만, 이내 소방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자식이 교를 배신할 리가 없어.’

비록 사이는 안 좋았지만, 그녀는 야율적의 충심이 자신 못지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야율적을 자극하는 것도, 서로의 성격이 안 맞는 것을 떠나 놈이 배신할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짜 배신할 놈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런 식으로 자극하지 않는다. 조용히 뒤를 캐다가 단번에 목을 날려 버리지.

‘……아니야.’

소방의 눈이 깊어졌다.

‘놈은 이쪽 대륙으로 쫓겨났다. 말이 파견이지, 그만한 실력을 지닌 놈이 한낱 암살자의 제자로 들어갔어. 불만을 품지 않을 리가 없지.’

야율적은 그 충성심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한 놈이었다. 그걸 그 자신만 모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를 배신했을까? 정말로?’

순간 소방은 떠올릴 수 있었다.

무림맹의 멸사군장, 연호정이 구사하던 무시무시한 무공을.

능력 자체도 뛰어났지만, 진짜 놀라운 것은 혈음장의 투로를 완벽하게 파훼한 수법이었다.

‘어떻게 알았지? 놈은 분명 혈음장을 알고 있었어!’

소방은 혈음장에 그런 파훼법이 통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애초에 혈음장이 파훼가 되는 무공이라는 생각 자체를 전혀 안 하고 살아왔다.

한데 그처럼 조각조각 파훼를 당하다니? 직접 겪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놈은 혈음장에 완전히 정통했어. 투로의 뿌리까지 낱낱이!’

파훼법을 알고 있어도, 엇비슷한 수준이 아닌 이상 쉽게 대응할 수 없다. 한데 연호정은 그 자신보다 확연히 강한 상대의 무공을 너무나도 익숙하게 파훼해 버렸다.

세상엔 천재도 많고 괴물도 많다지만, 혈음장에 통달하지 않으면 그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령 통달한다 해도 실전에서 그만큼 밀어붙이긴 힘들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설마 혈음장이 외부로 유출되기라도 한 걸까?’

그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그냥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내부에서 혈음장과 혈음사기를 유출한 것이다.”

결론은 그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한데 누가 혈음의 무공을 유출했을까? 그리고 유출된 혈음의 무공이, 왜 무림맹의 손에 들어가 있을까?

“야율적.”

부르르르.

소방의 몸이 미친 듯이 떨려 왔다.

“네놈이 정녕?!”

주르륵.

그녀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안 그래도 내상이 심한데 흥분까지 하니 운공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소방은 서둘러 마음을 다스리고 체내의 탁기를 뽑아내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금세 흥분을 가라앉혔지만, 그녀의 머리는 쉴 새 없이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놈이 가겠다는 나를 말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야율적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하긴, 네 말도 맞다. 설령 실패한다 한들, 적의 전력을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좋다. 한 놈은 너에게 맡기겠다.’

소방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한참 신경전을 벌이던 놈이, 치솟던 분노를 잠재우곤 곧장 자신의 의견에 동의했다. 자신이 그놈을 싫어하듯 그놈 역시 자신을 싫어하는데, 너무나도 쉽게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놈이 사음교에 있었을 때도 그런 일은 없었다.

‘게다가.’

소방은 자신이 있었다. 야율적과 생사결을 벌여도 이길 자신이.

그래서 놈의 수하도 대놓고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싸움이 벌어진다 한들 능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본래라면 야율적은 자신의 손에 수하가 죽은 그 즉시 손을 써야 마땅했다. 애초에 그런 관계였고, 그놈의 성질머리도 보통이 아니었다.

한데도 놈은 자신을 그냥 보냈다. 진심으로 살기를 드러냈지만, 경고만 하는 선에서 끝낸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길 자신이 없어서? 화가 나면 물불을 안 가리는 놈일 텐데?

‘정말 너란 말이야?’

푸스스스스.

그녀의 몸 주변에 회색빛 구름이 일다가 사라졌다.

퍼석!

유독 탁기의 구름을 많이 쐰 돌벽이 속이 빈 것처럼 부서졌다. 그만큼 탁기가 독했던 것이다.

‘차도살인을 계획했단 말인가? 정말 나를 죽이려 했단 말인가? 그럴 자신이 있었던가?’

치이이이익!

그녀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전신을 누비던 탁기를 얼추 뽑아내니, 이제야 혈음사기가 제대로 운행되기 시작했다. 이젠 정말 한숨 돌려도 되는 것이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고민하던 소방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제길, 내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모양이군.”

야율적이 의심스러웠지만, 그녀는 그 의심을 접으려 애썼다.

‘그래,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지.’

야율적이라도 혈음장의 비급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아예 불가능하다고 볼 순 없지만,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하물며 야율적은 자신이 파견될 줄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혈음장의 파훼법에 능통한 연호정이 나타났고, 그놈에게 자신을 보냈다는 건 지나치게 편리한 해석이었다.

‘우연이겠지.’

혈음장이 무림맹에 넘어간 건 분명했다. 다만, 야율적을 통해서는 아닐 것이다. 일단은 그렇게 믿어야 했다.

가만히 음정단을 보던 소방은 이내 그것을 다시 품에 넣었다.

“만나서 얘기를 해 봐야겠어.”

한 시진 후.

어느 정도 무공 구현이 가능한 몸 상태가 되자 그녀는 조심스레 신법을 펼쳐 동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

하늘을 보던 소방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저건?’

십여 마리의 새가 북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한데 그 새들의 모습이 어쩐지 익숙했다.

‘야율적, 그놈이 부리는 전서응인가?’

비둘기 정도의 크기였지만, 저건 분명 매였다. 일반 전서구보다 세 배는 빠르고 어지간한 날짐승은 순식간에 도륙한다는 귀물이었다.

바로 야율적 휘하 정보 단체, 암조단에서 쓰는 전서응이었다. 저런 새가 야율적의 창가에 수도 없이 드나드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어딘가로 정보를 보내는 모양이군.’

보통 전서구를 날릴 때면 같은 내용의 문서를 여러 마리에 실어 날리는 게 보통이었다. 한두 마리만 보냈다가 목표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간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무시하고 걸어가던 소방은 문득 드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인 정도는 괜찮겠지. 혹시 모르니까.”

파아아아앙!

혼신의 힘을 다해 전서응의 뒤를 쫓던 그녀는 이각이 지났을 무렵 전서응 중 한 마리가 뒤로 쳐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짧은 거리, 정확한 순간을 포착했다. 소방이 돌멩이 하나를 낚아채곤 혈음사기를 가득 담았다.

피유우우우웅! 퍼억!

몸이 정상이 아니라지만, 이십 장 거리의 새 한 마리 맞추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머리통이 날아간 전서응이 파들거리다 땅에 떨어졌다.

전서응의 사체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온 소방이 여태 움찔거리는 발목에 묶인 연통을 끌러 펼쳤다.

잠시 후.

소방의 눈이 잔뜩 충혈되었다.

“재미있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불신과 분노, 살기가 가득 어린 그녀의 표정은 그야말로 귀신의 그것과 같았다.

“정말 재미있어, 야율적.”

연통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맹 측에 고하오. 당신들이 원하는 제일 목표를 잡는 데에 도움을 주겠소. 잠시나마 손을 잡고 공공의 적부터 처리합시다. 이쪽도 사정이 있으니 빠른 화답을 바라오.

그리고 연통 마지막에는 음신(陰神) 휘하 대제자 암조단장(暗鳥團長)이라 적혀 있었다.

암조단은 야율적이 부리는 음신 최고의 정보 단체로서, 그 단장을 그의 대제자가 맡고 있다.

야율적, 그리고 그의 대제자 사마현.

말하자면 한통속이다. 게다가 야율적은 사마현에게 섭혼술을 걸었다고 하였다. 소방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즉, 이 서신은 사마현이 보낸 것이라도 야율적의 의지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것.

“야율적.”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 와중에도 소방은 일말의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야율적을 향한 의심이 아니라, 사마현이 야율적을 배신했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역시 말이 되지 않았다.

사마현은 야율적의 섭혼술에 걸려 있다. 사음교의 섭혼술은 중원 사마외도술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서, 방법을 모르면 깨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즉, 이건 야율적의 의지라고 봐도 타당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대제자의 이름으로 보냈다는 해석은, 지금 이 순간 결코 과한 해석이 아닐 것이다.

“네가 정녕, 본교를 배신했단 말이지?!”

스르륵.

품에서 음정단을 꺼낸 그녀는 그것을 지체 없이 삼켰다.

한 시진 후.

콰르릉!

야율적의 거처 인근의 산이 무지막지한 고수들의 충돌로 신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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