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혼전(混戰) (3)
“군장님.”
“음?”
고개를 돌리니 탕마군의 이 조장 규벽이 앞에 있었다.
“전군 자리를 잡았습니다. 각자 병기 점검과 휴식에 들어갔습니다.”
“알겠다.”
“저…….”
“따로 할 말이 있나?”
규벽이 입맛을 다셨다.
“괜찮으십니까?”
다섯 조장 중 가장 뜨겁고 활발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규벽이었다. 그래서 가끔 실수도 하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출중하여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그가 오랫동안 군장의 눈치를 보다가 이제야 궁금한 걸 묻는다. 그만큼 모용우를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말인가?”
“저희도 뭐…… 처음엔 좀 화가 나기는 했습니다만.”
“그러니까 무엇이?”
“커허험! 의정군의 존재 말입니다.”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 왜? 의정군이 싫은가?”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괜스레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이 아닐까 싶었지만, 어차피 내친걸음이었다. 규벽은 자신의 성격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연 군장, 아니 대수께서 의정군의 좌장이 된 것에 불만은 없으신지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적어도 모용우 입장에선 그러했다.
하지만 조장들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조장들과 몇몇 군병들이 제각기 귀를 쫑긋 세웠다.
모용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수의 능력은 지극히 출중하다. 그런 분이 의정군을 이끈다는데 무슨 불만?”
그렇게 되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이거나 헛기침을 하곤 물러났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규벽은 그러지 않았다. 어떤 의미로는 탕마군에서 가장 솔직한 사람이 그였다.
“어찌 되었든…… 대수께서는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군장님보다도 더요.”
“나이의 많고 적음이 그 사람이 지닌 능력의 척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젊은 나이에 그만한 능력을 갖췄으니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게 정상 아닌가?”
“무, 물론 그건 그렇습니다. 대수의 재능이 천재적이라는 것도, 의정군의 수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도 잘 알지요.”
“한데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라기보다는…… 화가 나지 않으십니까?”
“화라니?”
모용우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규벽은 모용우가 자신의 말을 알아듣고도 모른 체하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보통 사람이면 자신의 이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군장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진짜 모르는 것 같았다.
규벽은 솔직하게 말했다.
“군장님께서는 대수보다 연배도, 경험도 많으십니다. 뭐, 두 분께서 호검쌍위라 불리고는 계십니다만 적어도 경륜이라는 측면에서는 군장님이 한 수 위라고 해도 될 텐데, 군장님이 아닌 현재 대수께서 의정군을 총괄하는 자리에 오른 것이 질투가 나진 않으신지 궁금해서요.”
모용우가 피식 웃었다.
“왜? 그런 일에 질투를 느껴 해야 할 일도 못 할 만큼 내가 못난 사람으로 보였는가?”
“커헉! 저, 절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하하하.”
모용우가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규벽은 물론 조장들과 군병들도 놀라서 모용우를 바라보았다.
비록 공무에 있어선 언제나 엄격하고 칼 같은 모습을 보여 왔지만, 모용우의 성품은 근본적으로 부드러움에 가까웠다. 인간적인 매력이 출중하고, 공사 구분도 분명해서 탕마군 전원은 모용우를 진심으로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모용우가 이리 웃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모용우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네. 기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자네의 물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네. 그저 내 나름의 장난을 쳐 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더 자네를 당황케 한 모양이군. 사과하네.”
“아닙니다! 사과라니요?”
규벽이 입맛을 다셨다. 괜스레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상관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 건 아닌지 이제야 후회가 되었다.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진심일세. 나는 조금의 질투도 나지 않네.”
“아, 그러십니까.”
“어쩌면 이런 나를 두고, 자네들은 속없는 놈이라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네.”
“헉!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모용우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땅도, 날씨도, 사는 사람도 다른 지역이었지만 저 하늘만큼은 광동성 역시 똑같았다. 어두운 밤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저 별들을 보고 있노라면, 복잡해진 머리와 답답한 마음도 한결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대수의 능력은 출중하네. 물론 그것은 자네들도 알겠지. 하지만 내 감히 장담컨대, 우리의 대수는 자네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일세. 자네들은 지금 대수의 능력 중 십분지 일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어.”
모용우의 입에서 흔치 않은 극찬이 나왔다.
모용우는 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만큼이나 잘못을 짚어 주는 데에도 말을 아끼지 않았다. 즉, 그는 과장되게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의정군의 대수를 이렇게까지 높게 평가한다. 조장들은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질투도 수준이 비슷해야 할 수 있는 법이지. 애초에 수준이 다른 사람에게 질투는 무슨 질투란 말인가? 오히려 쫓아가며 배운다 해도 평생이 걸릴지 모를 일일세.”
“……!”
“자네들의 마음을 아네. 내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네들의 수장인 내가 의정군의 좌장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꽤 낙심했을 걸세. 멸사군의 군병들을 보면서 괜한 패배감을 느꼈을지도 몰라.”
조장들과 군병들은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상관이 마음을 열고 말하는 자리였다. 예의랍시고 입에 발린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하면 반대로 묻고 싶네. 자네들이 보기에, 멸사군병들 중 누구 하나라도 자네들을 업신여긴 적이 있던가?”
그때, 일 조장 진패가 말했다.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눈빛 한번 바뀌지 않더군요. 오히려 대수께서 의정군의 좌장이 된 것에 본인들도 놀란 기색이었습니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바로 멸사군일세. 나 역시 멸사군병 개개인과는 친분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그들이라고 특별한 건 없다네. 출신? 물론 그들은 구파와 육가 출신으로 이뤄져 있다네. 그러나 출신이 사람의 가치를 증명할 수는 없는 법이야. 배움이 조금 다를 뿐이지.”
규벽이 말했다.
“그 배움 때문에 서열이 갈리고 신분이 갈리는 세상 아닙니까.”
그의 말에는 숨길 수 없는 부러움과, 그 부러움 이상의 한(恨)이 담겨 있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해 무시를 당했고,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방황했다.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하려 해도, 성공을 위한 최소한의 기반도 없었기에 무력했던 그였다.
그래서 출신에 집착했고, 배움에 갈증을 느꼈다. 한 지역에서 나름의 명성을 얻었음에도 세간의 평가에 신경을 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또한, 그것은 대다수의 사람이 비슷했다. 모용우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은 이유의 근본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리 구분 짓는 사람도 많지. 암묵적으로는. 하지만 진짜들은 달라. 어설프게 배운 자들은 우월감에 도취되지만, 제대로 배운 자들은 나누려 한다네.”
“……!”
조장들은 모용우의 말을 곱씹었다.
어설픈 자들은 가진 것을 특별하게 생각하나, 진짜들은 가진 것을 나누려 한다.
모용우가 우자(愚者)와 현자(賢者)를 나누는 기준이었다.
“명가(名家)의 법도라 함은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딱딱하고 부자유스럽다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망나니처럼 구는 이들, 혹은 자신이 최고인 줄 알고 떵떵거리는 이들도 많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명가 출신의 자제들은 인내와 자제를 바탕으로 올바름이 무엇인가를 고뇌하며 살지.”
모용우가 탕마군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탕마군. 그중 절반 이상이 모용우를 보고 있었다. 모용우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과, 자신들이 모르는 세계에 관한 내용이 그들을 집중케 하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하나로 묶어 완전무결(完全無缺)에 가까운 전투 부대로 만든 사람이 바로 우리의 대수일세.”
조장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명가의 법도를 떠나, 멸사군병들도 저마다 자존심이 있는 사람들일세. 그런 그들이, 비슷한 출신의 젊은 청년에게 고개를 숙이고 충성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라 생각하는가?”
“……!!”
“내가 대수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네. 그는 진짜야.”
“진짜…….”
“진짜지. 진짜 중의 진짜. 이유인즉, 그는 일신의 명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 가진바 모든 것을 불태우는 사람이기 때문이야.”
모용우가 미소를 거두었다.
“사전 예고도 없이 의정군이라는 하나의 부대로 합쳐졌으니, 자네들이라고 심사가 편할 리는 없겠지. 다만 내가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것일세.”
“…….”
“대수는 세상에 몇 없는 진짜 협객일세. 그의 명령에 죽음을 택할 이유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그때, 오 조장 계억이 말했다.
“군장님 말씀대로, 세상에 진짜는 몇 없습니다.”
“음?”
“다만, 저희가 보기에 군장님 역시 진짜입니다.”
계억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군장님께서 신뢰하는 분이니, 저희 역시 믿고 따르겠습니다.”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연호정을 따르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상관인 모용우가 그를 인정하니, 자신들 역시 대수를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모용우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장들과 군병들 모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묘한 눈으로 그들을 보던 모용우가 이내 씩 웃었다.
“지금은 그걸로도 충분하겠지. 나를 믿어 줘서 고맙네.”
이것만큼은 모용우도 생각지 못했다.
그가 연호정을 존경하는 것만큼이나, 군병들이 자신을 존경하는 이유 역시 분명하다는 것을.
모용우의 이런 모습 때문에, 군병들 역시 모용우가 연호정보다 못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한다는 것을.
모용우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제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 * *
“연 공자! 아니, 연 대수!”
“편하게 부르시오. 오랜만이오, 후개. 그나저나, 이번 정보전의 수장으로 후개가 직접 오신 거요?”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외다.”
가득상은 그간 있었던 일을 연호정에게 소상히 설명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음신의 대제자라고?”
“그렇소. 이름은 모르겠지만, 그가 이런 내용의 연통을 보냈소.”
“흐음.”
“대수가 보기엔 어떻소?”
연호정은 생각에 잠겼다.
‘당대 음신은 홍관, 즉 사음교의 간자 야율적이다. 하면 그의 대제자는……?’
연호정은 흑암제 시절 음신을 본 적이 있었다.
당시의 음신은 자신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물론 그래도 중년이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어린 나이에 꽤 놀랐었더랬다.
‘설마 그놈이, 지금 이놈은 아니겠지?’
그건 모를 일이다. 직접 만난 적이 없으니까. 설령 같은 사람이라 해도, 그때의 음신과 지금 이놈의 성격이 비슷하리란 보장도 없었다.
잠시 후, 연호정이 말했다.
“그 건은 후개께서 직접 처리해 주시오. 나는 당장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소.”
“제길, 나도 같은 마음이니까 대수한테 의견을 구한 거요.”
“그나저나, 놈의 영역에서 지진이 났다고?”
“두 초고수가 부딪쳤다는 보고요. 약간은 과장되긴 했겠지만, 보통 격전으로는…….”
“이상한데.”
“엉? 뭐가 말이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혼란 조장이 목표이긴 했지만…… 그 망할 년,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을 텐데? 설마 함정인가?”
연호정이 제아무리 똑똑해도 세상일에는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어쩔 수 없군.’
다시 한번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제자라는 놈과 자리를 주선해 주시오. 내가 직접 만나 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