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난장(亂場) (3)
“저기로군.”
모용우가 강량을 바라보았다.
“맞는가?”
“맞습니다.”
강량의 눈이 작은 봉우리 사이에 고정되었다.
“암살자들의 행동 원리는 세작과 비슷한 구석이 있습니다. 당당하게 이름을 알리지 못하고 음지(陰地)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본거지도 철저하게 숨기는 게 원칙이지요.”
“음.”
“다만, 지나치게 인적이 드문 곳은 제외해야 마땅합니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의 이치는 암살자들에게도 통하는 법이지요. 특급살수들은 장사치나 기생, 백정 등으로 위장하며 사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음신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그렇습니다. 음신은 암살자 세계의 왕입니다. 철저하게 숨어들 수밖에 없지요. 등하불명의 이치가 통용되는 위치가 아닙니다.”
“철옹성을 세울지언정 양민의 삶에 녹아들지는 않는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지진이 난 곳은 이곳에서 오십여 리 떨어진 지역이었네.”
“그곳으로 가면 몰살당할 겁니다. 함정이랍시고 파 놓은 것일 테니, 절대로 생환할 수 없는 죽음의 진을 짜 두었을 겁니다.”
“음.”
“처음부터 의아했습니다. 형님, 아니 연 대수께서 묵룡부주에게 들은 위치와 비슷하면서도 지형이 묘하게 달랐지요. 그래서 정보 고문 역시 지진이 난 곳이 음신의 총본산이라고 암중에 믿어 버린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강량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암살자의 방식인 동시에 흑도의 방식이지요. 언제나 쫓기면서 살았으니. 이중, 삼중의 함정을 설치하는 게 기본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어요.”
모용우가 강량을 바라보았다.
그는 강량의 출신을 알고 있었다. 강량은 흑도제일검문이라는 귀철검문의 후계자로, 문 내 배신자로 인해 홀로 살아남은 복수자가 되었다.
그렇다. 강량에게는 풀어야 할 원한이 있었다. 그리고 그 복수의 대상 중 하나가 바로 묵룡부주 양천이었다.
“분하지 않았는가?”
뜬금없는 순간이지만, 모용우는 묻고 싶었다.
강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말입니까?”
“대수와 함께 양천을 만나지 않았나.”
“……그랬지요.”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질문은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묻고 싶네. 투왕 양천은 자네의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일세.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사이인데, 얼굴 한 번 보고 돌아온 게 전부이지 않았나.”
자칫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었다. 모용우가 그답지 않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그만큼 강량의 마음이 단단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복수의 순서가 다릅니다.”
“순서가 다르다?”
“양천은 흑도를 정복하기 위해 귀철검문을 포함, 무수히 많은 문파를 멸문시켰습니다. 때로는 직접 나서서, 때로는 이간질과 세작을 이용해서.”
“나도 그렇게 알고 있네.”
“그는 정복 군주입니다. 정복 군주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세력이 강하고, 개인의 무력 역시 강호 정점에 달했지요.”
강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최종적으로 무너트려야 할 원수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힘이 턱없이 부족한데 어찌 양천을 공략하겠습니까? 하물며 제게는 대수님과 같은 지략도, 눈치도 없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양천은 제일(第一)의 복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제일 복수 대상은 본문을 배신한 배신자이지요.”
“그렇구먼.”
모용우가 한숨을 쉬었다.
“자네의 자제심에 경의를 표하네. 어지간한 노강호도 원수 앞에서 마음을 다스리긴 힘들어. 자네는 그 어린 나이에도 무엇이 우선인지를 알고 있군.”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겁니다. 기실, 저도 제가 어떻게 표정 관리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양천을 본 즉시 검을 뽑고 싶었으니까요.”
“…….”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짓이었습니다. 양천은 애초에 제게 시선조차 주지 않더군요.”
“그랬나.”
강량이 검병을 매만졌다.
연호정과 함께 양천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는 그였다. 그때를 생각하자 과거보다 한층 더 진중해진 지금도 울컥 분이 치밀어 올랐다.
“본문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데에는 복수의 방법 따위를 구분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장 비참하게 죽일 겁니다. 하지만 양천은 다르지요.”
“…….”
“그자는 제가 귀철검문의 후계자인지도 몰랐을 겁니다. 그저 대수님이 데리고 온 흔한 무사 정도로 여겼을 테지요.”
“……그런가.”
“제게 눈을 돌리게 할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눈이 갈 정도로 강해질 겁니다. 양천에게 복수를 천명하는 것은 바로 그땝니다.”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할 수 있을 걸세. 내 감히 장담하지.”
강량의 재능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걸 떠나, 강량에게는 무섭게 조여진 자제심이 있었다. 게다가 그의 주변에는 연씨 가문의 천재들과 뛰어난 선배 검객도 있었다.
강량은 강해질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아무도 모르는 새에 폭발적으로 성장해 천하에 그 이름을 새길 만한 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대화가 길어졌군요. 그럼 슬슬 적의 본진을 치러 가 볼까요?”
“그러세. 아! 그 전에, 자네가 정보 고문께 따로 의뢰한 것이 있다고 들었네만.”
“의뢰라고 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대수님과 함께 꾀를 낸 것 정도이니까요.”
“꾀라니?”
“정보 단체에게 의뢰할 만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바로 정보지요.”
“……?”
“가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음, 그렇다면 알겠네.”
차아앙!
모용우가 탕마대검을 뽑았다.
“전군, 진군.”
쿠르르릉.
오백의 탕마군이 산등성이를 넘었다.
그리고 백오십여 리 후방에서, 황금빛 진기를 뿜는 고수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접근했다.
* * *
쩌어어어어엉!
광룡부가 하늘을 날았다.
튕겨 나간 광룡부가 교룡쇄의 움직임에 따라 다시 호선을 그리며 대지를 향해 휘둘러졌다.
콰르릉!
바위가 부서지고 땅거죽이 뒤집혔다.
무공의 격차가 있다곤 하지만, 광룡부의 파괴력은 이미 무림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투로에 대한 대응책은 있어도 파괴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야율적이든 소방이든, 연호정보다 강하다 한들 광룡부에 공격을 허용하면 치명상을 입는 것은 마찬가지란 말이다.
터어어엉!
교룡쇄의 움직임은 놀라웠다.
팔십 근이 넘는 중병의 무게를, 그것도 원심력으로 몇 배나 늘어난 무게를 너무나도 여유롭게 버텨 내고 있었다.
이건 단순히 교룡쇄의 재질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교룡쇄를 쥐고 휘두르는 연호정의 내공 운용이 극에 이를 정도로 섬세하기 때문이었다.
촤르르르르륵!
교룡쇄가 접히며 허공에 떠오른 광룡부가 연호정의 손아귀로 돌아왔다.
야율적의 눈이 깊어졌다.
“강하군.”
연호정은 강했다.
무공의 경지를 떠나, 중병과 기병(奇兵)을 다루는 솜씨 자체가 예술이었다. 나아가 경신술의 경지 역시 극치에 달하여, 병기술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걸 넘어 어떠한 공격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손쉽게 치고 들어가 일격을 먹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느새 공격선을 피해 냈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적어도 경신술에 한해서는 나보다 못하지 않아.’
야율적은 사음교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던 고수였다.
그런 그가 전대 음신의 휘하로 들어가 중원 최강의 암살공을 대성하였다. 무인으로서의 정면 승부는 물론, 살법에 있어서도 정점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더하여 무공의 활용성에 있어서만큼은 소방보다도 한 수 위다. 적어도 야율적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놈은…….’
번쩍!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힌 야율적이 수도(手刀)로 참격을 휘둘렀다.
쩌어어어어엉!
짱짱하게 펴졌던 교룡쇄가 일순 느슨해지더니 야율적의 참격 여파를 무위로 돌려 버렸다.
‘이놈은 나보다 더하다!’
투우우웅!
뒤로 튕겨 나간 연호정의 입가에 피가 비쳤다.
대부분의 공력은 흘려 냈지만, 차마 흘리지 못한 미세한 공력이 그의 내부를 진탕시킨 것이다.
‘음화신참(陰火神斬)을 흘리고도 고작 저 정도라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후우우우우웅!
찰나지간 연호정의 몸에서 솟구친 진기는 바로 봄날을 연상케 하는 생명력 넘치는 목기(木氣)였다.
그 목기가 번갯불처럼 반짝인 이후, 흔들리던 연호정의 기도가 눈 깜짝할 새에 안정을 되찾았다.
야율적의 눈이 흔들렸다.
‘내상을 치료해? 그 찰나에?’
저게 가능한 일인가?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 한들,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른 고수와 맞붙은 상황에서 대담하게 내상을 치료할 생각을 하다니?
‘이놈.’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다.
파아아아앙!
옥청과 사마현에게 달려들려던 소방의 앞을, 어느새 연호정이 가로막았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이었다. 야율적이라는 희대의 고수와 격전을 벌이면서도, 옥청과 사마현을 보호하기 위해 그 빛살 같은 보법으로 움직여 도끼를 휘두른 것이다.
쩌어어어어엉!
소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혈음장의 투로가 한순간에 흐트러졌다. 연호정의 광룡부가 연환장으로 이어지던 혈음의 투로를 중간부터 뚝뚝 잘라먹었기 때문이다.
“이 새끼가!”
퍼어어엉!
연호정의 입에서 피가 튀었다.
혈음장의 파훼법을 똑똑히 알고 있다 한들 힘의 크기가 달랐다. 혈음장을 포기하고 극한의 내공으로 냅다 후려치니,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막기가 힘들었다.
일전, 묵비와 옥청, 여국과 진을 짰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땐 진세의 힘으로 소방을 압도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온전히 혼자서 소방의 힘을 감당해야 했다. 실전의 화신이라 불리는 연호정도 파도처럼 몰아치는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쉬이 반격을 꿈꿀 수 없었다.
그때였다.
번쩍!
한 줄기 백색의 광채가 소방의 가슴 한가운데로 쏘아졌다.
즉시 접근하여 후속타를 날리려던 소방은 대경하여 옆으로 물러났다.
콰앙!
백룡부가 소방의 옷깃을 스치고 날아가, 바위 하나를 통째로 부숴 버렸다.
소방의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후욱! 후욱!”
연호정이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해진 안색과 달리 그의 기도는 또다시 안정적으로 변했다. 양천이 준 목령단의 기운을 청룡기로 발화하여 순간순간 내상을 휘어잡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연호정의 전투 감각이 천하제일을 논할 만하다지만, 청룡기의 치유력만으로 두 사람을 상대하기란 분명 무리였다.
“그렇군.”
스르륵.
어느새 소방의 옆으로 다가온 야율적이 연호정의 후방을 보았다.
그곳에는 옥청이 있었다. 자신과 소방을 주시하면서도, 양손을 모아 태극의 진기를 모으고 있는 무당의 도사가.
“일시적으로 진법을 펼칠 수 있었던 거야. 단둘이서라도.”
후우우우웅.
무당의 도가 신공은 그 아우름의 범위가 천하 모든 정공(正功)에 닿아 있다.
연호정의 유연하고도 무너지지 않는 진기의 뒤에는 옥청이 있었다.
옥청이야말로 진법의 축이었다. 동시에 옥청은 연호정의 진기 운용을 혼원기(混元氣)라는 정점의 신공으로 받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연호정의 실전 능력, 전투 감각, 극에 이른 병장기술과 압도적인 경신술.
그것을 옥청이 받쳐 주고 있기에 한없이 밀리면서도 버티는 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소방이 전력을 다하고 있는 반면, 야율적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암살자로서, 최소 힘으로 최대 효율을 발하는 습관 때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우릴 이길 수가 없는…….’
순간 야율적의 눈이 번뜩였다.
콰아아아앙!
“컥!”
연호정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옥청이 뒤를 받쳐 주지 않았다면 삼 장은 더 물러났을 것이다.
소방이 놀란 눈으로 야율적을 보았다.
야율적이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손을 뻗고 있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이었다.
“소방! 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전력을 다해서 놈들을 죽여야 한다!”
“뭐?”
“이놈들, 우리를 상대하려는 게 아니야.”
야율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버티고 있는 거다! 뭔가 노림수가 있는 것이야!”
그때였다.
후욱!
퇴로 저편에서 묵직한 기운 다섯 개가 빠른 속도로 접근해 왔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왔군.”
멸사삼살진을 두 개나 펼칠 수 있는 인원들.
광동성 중앙에 걸쳐 길게 늘어트려 둔 군병 중 다섯이 진을 형성하며 도착한 것이다.
연호정이 교룡쇄를 휘둘렀다.
촤르르르르륵! 철컹!
교룡쇄가 야율적의 손에 잡혔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저년은 몰라도 넌 못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