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뒤흔들다 (3)
“후우우.”
가볍게 숨을 내쉬는 양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는 동작이 새삼 자연스레 느껴졌다.
‘이것이었나.’
사람이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자각하려면, 그 소중한 것을 되찾아 보면 된다고 했던가.
양천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신경 쓸 것이 많아서 조금 피곤했던 것뿐이라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본인의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했다. 다만 예전보다는 조금 더 빨리 피로해졌고, 젊었을 적보다 눈치가 느려졌다는 것만 체감했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무극의 경지에 오른 것은 물론, 그 경지에서도 끊임없이 달려 나가 천하 정점을 넘보는 절대자가 되었다.
무신(武神)의 영역에서 나이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원숙미와 지혜, 깨달음이 더해질 뿐 기량이 낮아질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이를 먹어 이 지경이 되었다고 세월 무상을 부르짖었더랬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양천은 눈을 감았다.
그의 귀로 연호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음교주는 강하오. 양 부주께서 패배할 정도로. 그만한 고수가, 위력은 강하나 소문이 나면 대응책이 들통나는 무공을 쓰고도 양 부주를 살려 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당사자는 모를 거요. 이유인즉, 이미 오염된 진기로 세상을 보니까. 차라리 누군가와 생사결을 벌였다면 모를까, 제대로 된 싸움 없이 상처만 들여다봐서는 해답이 나올 수가 없지. 극한의 힘을 쥐어짜 보지도 않았으니 말이오.’
양천이 탄식을 토했다.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았다…… 허허.”
사실 사음교주에게 당한 것도 화가 나는 일이지만, 매우 놀랐을 뿐 생각보다 그리 분하지는 않았다. 실력에서 밀린 것이니, 패배감은 들지언정 납득할 수 있었다.
양천이 진짜 분하고 부끄러웠던 것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상처만 들여다봤다는 사실, 투왕이라는 이름을 달고 사는 남자로서 정체성을 상실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힘없고 기죽어 있던 흑도 무림을 무림의 또 다른 태양으로 만들고자 했다. 개인의 욕망도 컸지만,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이 일을 추진했다.
그렇게 묵룡부를 세웠고, 저 무림맹조차 긴장하고 지켜볼 만큼의 세력을 일궈 냈다.
하지만 그는 투왕이었다. 싸움의 왕, 투쟁술로는 천하에서 최고로 손꼽힌다는 무적의 승부사가 그였다.
그런 그가, 군주(君主)가 되었다는 이유로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근본을 잊고 살았다.
그야말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수천 년 역사에 존재했던 무수히 많은 군주들과는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투왕이라는 정체성에 걸맞은 호탕한 군주가 되리라고 마음먹었다.’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한데 지금 내 모습은 어떤가? 군주로서도, 투왕으로서도 낙제점이로구나.’
화르르륵.
그의 주먹에서 검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대륙을 질타하는 사자의 기운이 거기에 있었다. 연호정과 비무를 벌였을 때보다 한층 더 어둡고, 불순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극도로 사나운 기운이었다.
이것이 바로 진짜 흑사자기(黑獅子氣)다. 마지막 한 조각을 맞추지 못해 미완으로 남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혈사자기보다 압도적인 농도와 활용성을 자랑하는 무적의 신공이었다.
“……이제부터는 다를 것이다.”
화악!
흑사자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투왕의 의지가 담겼다.
“세상이 격변을 맞이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우리만 눈치 보면서 살아갈 이유가 없지.”
양천이 창가로 눈을 돌렸다.
“사음교…… 네놈들은 선을 넘었어.”
어차피 속고 속이는 관계요, 이용하다가 효용 가치가 사라지면 입 닦고 버리는 관계다.
하지만 흑도의 군주인 자신의 진기를 오염시킨 것도 모자라 꼭두각시로 만들 생각을 한 사음교주의 행태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네놈만큼은 내 손으로 죽일 것이다.”
양천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뿜어졌다.
쿠구구궁!
내공을 발산하지도 않았는데 대전이 뒤흔들렸다.
살의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천장 돌벽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릴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무극의 경지에 진입한 절대고수의 진짜 힘이었다. 제자인 부선이 그만한 경지에 들었음에도 스승인 양천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잠시 후.
“부주님.”
“무슨 일인가.”
“보타암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순간 양천의 눈이 빛났다.
“보타암에서?”
“그렇습니다.”
“제자가 말하기를 그쪽 상황은 잘 마무리되었다고 하였는데.”
“자세한 사정은 부주님을 뵙고 말하겠다고 합니다. 다만 약간의 조사를 해 보니, 차기 검후의 위(位)를 정하는 데에 있어 도움을 받고자 온 것 같습니다.”
양천의 눈이 냉정해졌다.
차기 검후를 정하는 데에 도움을 받는다. 말하자면 외세의 힘을 빌려 권력을 휘어잡겠다는 뜻이었다.
‘저희들끼리 갈등을 일으킬 줄 알았더니만, 본부에 도움을 청하고자 왔다고?’
보타암이 내분에 휩싸이도록 제자를 보낸 건 자신이었지만, 정말이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한 번도 먹물을 묻혀 보지 않은 자들은 이래서 무섭다. 어설프고 바보 같지만, 동시에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보타암은 대대로 검후를 배출하는 검문이었다.
그 검후의 능력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해서, 강호에 잘 나서지는 않지만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천하를 뒤집어 놓을 만큼 막강한 여력을 보여 주곤 했다.
그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검후가 한 번씩 세상에 나올 때마다 천하십대고수에 또 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보타암의 분란에 본부가 끼어든다면, 우리는 보타암의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다리를 놓게 된다.’
단순히 이쪽 일에 끼어들지 못하게 막으려 했더니만,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건 기회였다. 써먹을 만한 장기 말을 하나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들이도록 하라.”
* * *
쉬이이이이익!
극도로 파괴적인 일검이 빛의 잔상을 남기며 허공을 꿰뚫었다.
푹.
오 장 밖에 떨어져 있던 바위 한가운데에 반 치 정도 되는 구멍이 뚫렸다.
활화산처럼 폭발적이던 검기(劍氣)를 생각하면, 그 검기가 쏘아진 흔적치고는 너무나도 작았다. 저만한 바위 몇 개를 가루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절대의 검이었다.
하지만 그 검을 본 당관은 결코 그 일검의 위력이 약하다고 폄하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섬뜩함을 느꼈다.
‘이 정도란 말인가.’
온몸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 거대한 힘을 이 정도로 응축시켜 뻗어 낼 수 있단 말인가?’
흔적이 작다고 무시할 게 아니라, 오히려 흔적이 작아서 더더욱 대단한 일검이었다.
연위의 절대일검은, 그 파괴력이 일호무장 번작조차 감당키 힘들어할 만큼 압도적이었다. 즉, 성천의 강자를 제외하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검력이라는 뜻이었다.
그만큼 강대한 힘을 뽑아내는 것도 어렵지만, 그 힘을 유지하고 제어하는 것은 몇 배나 더 어려운 일이었다.
연위는 화산처럼 폭발하는 힘을 모닥불처럼 작게 만들었다. 크기는 작지만, 그 열기는 응축될 대로 응축되어 호수도 증발시킬 만큼 압도적이다.
‘괴물 같은 무공이로군.’
스르륵.
연위가 납검하였다.
“부끄럽소이다.”
“뭐가 말이오?”
연위가 입맛을 다셨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절대적인 일검이 아닌 삼검(三劍)이오. 한데 그중 첫 번째인 일검조차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는구려.”
“……?!”
“본래라면 눈곱만큼의 흔적도 나지 않아야 하는데…… 저렇게 큰 구멍이 나 버렸소이다. 내가 원한 것은 침투(浸透)와 확산(擴散)이었지, 관통이 아니었는데.”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역시 무도(武道)는 고행이구려.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소.”
당관은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그게 지금 할 말이오?”
“음?”
“당금 무림에, 성천의 강자를 제외하고 저 일검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 것 같소?”
자존심 강한 당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극찬 중의 극찬이었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칭찬은 고맙소만, 나는 그저 내가 추구하는 것을 완성하고자 할 뿐이오. 대단하다고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오만, 그래도 먼 것은 먼 것이오.”
“허어.”
“나는 내 일검보다 당가주의 만천공과 화우공이 훨씬 더 대단해 보이오. 진기를 그 정도로 섬세하게 운용할 수 있는 무공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소. 아마도 기예(技藝)라는 부문에 있어서, 천하 어떤 무공도 쫓아오지 못할 것이오.”
당관이 피식 웃었다.
“위로가 안 되는군. 있는 암기, 없는 암기 다 쏟아 내는 나와는 달리 연가주는 단순한 일검으로 절대의 살(殺)을 추구하잖소. 왠지 내가 초라해지는군.”
당관답지 않은 너스레였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해도, 만천공과 화우공에 대한 당관의 자부심은 연위의 절대일검 못지않았다.
“게다가 당가주께서도 그 무공을 완성하려면 아직 멀지 않았소이까? 만천공과 화우공, 둘을 따로 떼어 놓아도 감당하기가 힘들거늘 둘을 합쳐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겠다고 하시니, 내 조악한 창의력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소이다.”
“됐소. 서로 얼굴에 금칠은 그만합시다. 영 간지러워서 안 되겠소.”
연위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당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녀석이 그 검을 가져가려 하겠소?”
“음? 그게 무슨 말씀이오?”
“가주의 큰아들 말이오.”
“호정 말씀이시오?”
“그렇소.”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호정에게 이 검을 전수할 생각이 조금도 없소만.”
“으응?!”
당관이 표정이 황당해졌다.
“그 검을 전수하지 않는다고?”
“아, 물론 큰애가 원한다면 전수해 줄 것이오. 하지만 녀석이 원하겠소? 이미 자신만의 무도(武道)를 착실히 만들어 가고 있는데.”
연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또 모르지. 녀석의 성장세로 보건대, 지금은 나의 경지조차도 초월했을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녀석이 제아무리 천재라도 그건 불가능할 거요.”
“허허.”
“그나저나, 연호정 그 녀석에게 전수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전수할 거란 말이오?”
“……내 아들이 호정 하나만은 아니외다.”
“둘째한테 전수한다고? 그 검을?”
“못할 건 또 뭐요?”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주의 아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둘째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소? 감당은커녕 그 검을 좇다가 심마(心魔)에 걸리지나 않으면 다행일 터인데.”
연위의 검은 위력적인 만큼이나 위험한 무공이었다. 어중간한 깨달음으로 접근하다간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을 만큼 그 수준이 높았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감당키 힘들다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연후에 전수해도 되겠지.”
“그건 그렇지만…….”
당관이 말을 흘렸다.
확실히 이런 부분에서 다르다고 느끼는 당관이었다. 그는 자신의 진짜 후계자가 아니면 완성된 만천과 화우를 절대 전수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무공이, 절대의 무학 하나가 곧 가주의 권위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그리 늦지 않을 것이오. 검에 대한 지평의 깨달음은 놀라울 정도외다. 검에 한해서만큼은 호정보다도 뛰어날 거요.”
“연호정 그 녀석도 그리 말하더군. 믿기진 않지만 말이오.”
“허허허.”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당관이 참으로 그다운 농담을 던졌다.
“누구에게 전수하든, 일단은 사지 멀쩡하게 돌아와야 그럴듯한 고민이라도 할 수 있겠지. 행복한 고민은 잠시 미뤄 두시오.”
독하디독한 농담이었다.
연위가 쓴웃음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싫소. 내 자식들은 그런 곳에서 죽을 만한 그릇들이 아니라고 믿기로 했소. 그래서 지금부터 고민할 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연위의 걱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져 가고 있었다.
그의 절대일검이 빠른 속도로 성장한 이유이기도 했다. 걱정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으니까.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위가 눈을 감았다.
“무사히 돌아와라, 이 사고뭉치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