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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12화 (411/963)

412화. 뒤흔들다 (6)

“당신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범오가 반장례(半掌禮)를 취했다.

“소림의 범오라 하오.”

“아.”

모용우가 포권을 취했다.

“의정군 소속 탕마군장 모용우라 하오. 소림의 천재승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소림의 천재승.

상대를 높게 평가할 의도이자 나름의 예를 취하는 호칭이었다. 실제로 범오는 소림에서도 손꼽히는 천재라 불리기도 했다.

범오가 고개를 저었다.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칭호요. 그저 범오라 불러 주시오.”

과거의 범오였다면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나아가, 모용우의 하오체에도 조금은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범오가 생각하는 소림은 무림 최고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승범천신공을 개화하여 무종지벽을 완전히 돌파한 범오는, 신기할 정도로 이전과 달라진 자신을 체감했다.

‘마라(魔羅)에 홀렸던 것인지.’

물론 그렇다고 드높은 자존심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범오는 이제야 자신의 실력에 맞는 성품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오만함에 젖은 눈으로 세상을 보던 자신이 이만큼이나마 변한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지속적인 수양은 필요하겠지만…….

“한데 예까지는 어인 일로 오셨소? 대수께 듣기로 소림의 인사께서 함께한다는 말은 없었소만.”

“금강권문의 이 문주와 함께 왔소. 본사의 방장대사께서 의정군을 도우라며 이 문주를 보냈고, 빈승은 사제를 따라서 왔소.”

“아, 그러셨소?”

범오가 품에서 패 하나를 꺼내 모용우에게 건넸다.

“본사의 무승임을 상징하는 무불종패(武佛宗牌)요.”

모용우가 미소를 지었다.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되오. 귀승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기(佛氣)만으로도 소림의 무승임을 알 수 있소.”

“고맙소.”

“정말 대단하구려. 천하의 모든 공부가 소림에서 나왔다는 말을 새삼 실감했을 정도요. 이처럼 위엄 넘치면서도 차분한 기운은 좀처럼 본 적이 없소.”

진심 어린 감탄이었다.

천하제일의 신검도 백정의 손에 들리면 고기 써는 칼밖에 되지 못하듯, 소림의 무공을 익혔다고 다 강하고 선한 것은 아니다.

모용우가 볼 때 범오는 소림의 정통 무공을 제대로 익힌 초절정고수였다. 비록 뿜어내는 기파가 다른 소림승보다 거칠고 강성(强性)을 띄기는 하지만, 그 수준만큼은 의심할 나위 없는 초고수의 그것이었다.

범오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오. 빈승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은 탕마군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던 급박한 투기(鬪氣) 때문이었소.”

“그걸 읽으셨소?”

“그렇소.”

역시 대단하다. 오백의 전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투기만으로도 불안함을 느꼈다면 기(氣)가 보통 예민한 것이 아니었다.

“대수께서 내리신 명에 따라 이동하느라 다들 마음이 급했소.”

“그런 것 같았소. 나 역시 금방 이 근처까지 따라붙었지만, 별문제가 터지진 않은 듯하여 동태를 지켜보려 했소이다.”

별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이곳 야성을 지키고 있는 백 명의 암살자가 있었고,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짧게 전투를 벌였으니까.

물론 기습을 당한 암살자들은 초전에서 밀렸지만, 탕마군 역시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야성은 철옹성이었다. 하물며 탕마군은 이곳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고, 심지어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기(神技)의 기마술로 산악전까지 벌일 수 있는 엄청난 능력자들이지만, 피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중, 경상자의 수가 무려 칠십을 헤아렸다.

“한데 문제가 생긴 것 같소.”

모용우의 눈이 빛났다.

“문제라니? 어떤 문제 말이오?”

“거의 일천을 헤아리는 암살자들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둔해 있소.”

“……!”

모용우의 얼굴이 절로 굳어졌다.

적의 본진을 장악했지만, 이 성은 미로처럼 복잡한 데다 길 자체도 워낙 좁고 어지러웠다. 성내 지리를 전부 머리에 담으려면 족히 사나흘은 걸릴 정도였다.

그래서 모용우와 조장들은 각기 흩어져 위치별로 깃발을 꽂았다. 나머지는 휴식과 경계를 취하며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한데도 모르고 있었다?

“놈들은 이곳 환경에 무척 익숙해 보이더군. 내, 여기 서서 둘러보니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더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고 있소.”

“사실이오?”

“사실이오.”

하긴, 소림승이 이런 사안을 두고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암살자들이 그렇게나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의아했소. 한데 여기 와 보니 알겠더군. 이곳에선 절대 그자들을 볼 수 없소. 지형을 이용해 교묘하게 몸을 가렸소이다.”

나아가 은신술에 능하고 기척을 죽이는 데에 특화가 되어 있으니, 천하의 모용우라도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번 보시겠소?”

“그럽시다. 그래야 할 것 같…….”

순간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아니, 나는 움직이지 않겠소.”

“……?”

범오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되겠소?”

“물론 확인은 해 봐야겠지. 하지만 내가 움직여선 안 되오.”

모용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단순한 성이 아니오. 암살자들이 거주했던 곳이라 그런지, 구조가 무척이나 복잡하고 난해하더이다. 단순히 드러난 길만 외는 데에도 꼬박 사나흘은 걸릴 정도요.”

“…….”

“발견된 비밀 통로만 벌써 세 개나 되오. 만약 저들 중 몇몇이 이곳에 침투한다면, 우리는 손 놓고 당할 수도 있소.”

“음.”

“적어도 내가 있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소. 그래서 난 움직여선 안 되오.”

모용우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좌장이 쉽게 흔들려선 안 되는 이유이자 쉽게 움직여서도 안 되는 이유를, 그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수장이라는 존재가 주는 안정성과 지휘 체계는 조직의 성격을 막론하고 중요할 수밖에 없다.

범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믿을 만한 부하를 딸려 보내 주시오.”

“다들 믿음직하오. 다만 귀승 말마따나 놈들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면, 전략 전술에 밝은 사람을 붙여 주는 것이 낫겠지.”

모용우가 고개를 돌렸다.

“진 조장!”

“예, 군장님.”

일 조장 진패가 재빨리 다가왔다.

“범오 스님과 함께 암살자들을 확인하러 다녀오게. 가서 그들이 숨어 있는 지형과 공격로를 전부 확인해야 할 것이네.”

“명을 받듭니다.”

모용우가 말을 이었다.

“…….”

범오의 눈이 빛났다.

모용우의 입은 실제로 말을 하듯 움직이고 있었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패는 모용우의 목소리를 들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전음.’

자신에게 들리지 않도록 모종의 임무를 내린 모양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떤 조직이든 외부인이 알아서는 안 될 문제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잠시 후, 모용우가 범오에게 말했다.

“하면, 잘 부탁드리겠소.”

범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갑시다.”

“범오 스님.”

“하실 말씀이라도?”

모용우가 포권을 취했다.

“감사하오.”

범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인사는 나중에 합시다. 진 조장이라고 했소? 바로 출발합시다.”

“그러시지요.”

파아아앙!

두 사람이 발 빠르게 야성을 빠져나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멀어졌을 때 진패가 물었다.

“범오 스님이라고 하셨지요?”

“그렇소만.”

“혹시 어떤 길로 오셨습니까?”

범오가 손가락으로 북동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곳에 있는 오솔길로 왔소. 좌우에 나무가 많고 곳곳에 큰 바위가 있어 몸을 숨기는 데에 적합하더이다.”

“지금 우리가 가는 방향에 암살자들이 진을 치고 있고요?”

“그렇소. 한데 그것은 어찌 물어보시오?”

진패의 눈이 빛났다.

“스님께서도 보셨듯, 단순히 방향을 달리 했다고 적의 눈에 노출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저희가 탈취한 본진에서 저들이 보이지 않았듯, 스님께서도 몸을 숨겼다고는 하나 암살자들에게 위치가 들통났을 가능성도 있다는 뜻입니다.”

범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소. 저들이 주둔한 곳을 알 수 있었던 건 나 역시 저들의 뒤를 쫓았기 때문이오. 적어도 내가 봤을 때, 암살자들 역시 저 성을 볼 수가 없었소. 시야가 제한되었단 말이오.”

“겉으로는 그렇지요.”

“무슨 말씀이오?”

“성을 조사하면서 느낀 것은, 암살자들이 상상 이상으로 조심스럽다는 사실입니다. 하물며 저희가 차지한 성은 중원 암살자들의 왕이라 불리는 자가 거주하는 곳입니다.”

“……!”

“단순히 성안만이 아니라, 성 주변까지도 온갖 통로를 만들어 두었을 겁니다. 나아가, 일류 암살자라면 자신만의 안가를 중원 각지에 만들어 놓지요. 음신이라 불리는 자라면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광동성 전체에 수백, 수천 개의 안가와 통로가 이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어.”

범오는 모르는 강호의 거친 면이었다.

최고의 무공을 익히면서 언제나 강호의 양지만을 배회했던 범오로서는 알 수 없는 지식이 진패에게 있었다. 그런 면에선 오히려 모용우보다도 아는 게 많은 그였다.

“그리고 그것은 군장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

진패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음, 사방이 막혔군요. 공기의 흐름도 정상적이고…… 이 정도 왔으면 충분합니다.”

타다닥!

진패가 걸음을 멈추었다.

범오가 다급히 말했다.

“뭐 하는 것이오? 아직 거리가 제법 남았소이다!”

“스님께서는 이만 돌아가십시오.”

“뭐, 뭐라고?”

“여기서부터는 제가 미끼가 될 것입니다. 스님은 돌아가셔서 군장님을 도와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오? 군장을 도와 달라니?”

“암사자들이 주둔한 곳으로 가는 건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놈들은 은신술의 명수요! 자칫 잘못하다가는……!”

“암살자들이 왜 대놓고 모습을 드러냈겠습니까?”

“……?!”

“적의 움직임에 반응하거나 목표물을 제거하는 등의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면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놈들은 모습을 드러냈지요.”

“그건…….”

“제거할 목표물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적의 움직임에 반응하기 위함도 아니지요. 오히려 적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대응코자 함입니다.”

“……!!”

“만약 군장님과 저의 생각이 일치한다면, 암살자들은 절대 저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 다시 돌려보내겠지요. 성내의 병력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범오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하면, 굳이 나를 왜?”

“길잡이 겸 만에 하나를 위함입니다. 적이 스님을 봤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

“경우의 수는 둘. 암살자들이 그곳에 함정을 만들어 놨거나, 성 내부로 침투하기 위해서거나. 그래서 놈들은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그건 단순한 추측 아니오?”

“예, 그렇습니다.”

진패의 눈이 스산해졌다.

“그 추측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도 목숨을 걸어야지요.”

반 시진 후.

“야주님.”

“말하라.”

“조금 전, 무림맹의 무사로 추정되는 남자가 저희의 동태를 살피고 돌아갔습니다.”

야율적의 눈이 번쩍였다.

“소림승이 이곳에 대한 정보를 흘린 것이 분명합니다.”

“놈들이 이곳으로 병력을 파견하기까지 최소 시간은 얼마나 되지?”

“본인들에게 익숙한 지형이 아니므로 최대한 은밀하게 기동시킬 것입니다. 거리를 보았을 때 빠르면 두 시진, 늦어도 세 시진 안에 기습전을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놈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내일 동이 트기 직전 성문으로 돌격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야율적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너희는 우릴 잘못 건드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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