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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14화 (413/963)

414화. 뒤흔들다 (8)

“흐음.”

서류를 내려놓은 종명이 콧잔등에 걸린 애체(靉靆)를 벗었다.

“이번 달의 어획량이 유독 줄었군.”

“그렇습니다.”

“이유는?”

부관, 상각이 고개를 숙였다.

“아직 조사 중입니다만, 아무래도 남단 쪽에 변고가 터진 듯합니다.”

“변고라니? 설마 왜국이나 서역 놈들이 어획을 방해하고 있기라도 한가?”

“그건 아닙니다만.”

“하긴, 그런 놈들이 출몰했다면 도지휘에서 먼저 군대를 보냈겠지. 하면 무슨 이유에서?”

“무림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종명의 눈이 깊어졌다.

“무림인?”

“그렇습니다. 광동 남부의 민간 안정을 담당했던 백도 정파 무문들 중 상당수가 멸문했습니다.”

“멸문이라.”

종명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표정에 큰 변화가 없다. 그러나 종명의 심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또 무림.’

그는 무림인이란 족속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림인들에게 가족이 해를 입었다거나, 그들로 인해 손해를 본 적도 없었다. 즉, 그는 무림인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종명은 무림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들은 제국법에서 상당 부분 자유로웠으며, 통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건 국가적 입장에서 봤을 때 심각한 위험 요소였다. 천만다행으로 제국과 무림 간의 불침조약이라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조약이 체결된 이후 백도 정파가 민생 안전에 크게 기여했기에 지금껏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들은 무법자들이다. 지나쳐.’

분명 백도 정파는 제국이 신경 쓰지 못한 구석을 잘 보완해 주고 있다. 나아가 정파 무문에서는 정기적으로 황궁에 인재들을 보내 군력(軍力) 보강에 힘을 써 주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없어선 안 될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어디까지나 제국 휘하의 신민인 그들이 법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고위 관리에게 특권을 줄 때도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판이다. 한데 무림인들은 그만한 공도 세우지 않았으면서, 대다수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버렸다.

‘그들이 마음먹고 궐기하면, 지금의 제국에게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다.’

물론 그럴 확률은 높지 않다. 국가와 무림 간의 전쟁이 벌어지면 제국도 큰 피해를 보겠지만, 무림은 존속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렇다곤 해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세상 어떤 집안이 집 지킬 개를 키우지, 늑대를 키우겠는가. 개는 배가 고파도 주인을 물지 않지만, 늑대는 배가 고프면 주인을 잡아먹는다.

무림인들은 그와 같다.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살벌한 무법자들.

‘한번 정리를 하긴 해야겠는데.’

종명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멋대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

승선포정사사가 한 성의 통치를 담당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군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성의 통치, 군정, 사법은 별개의 기관으로 나뉘어 있으며, 서로에게 어떠한 관여도 하지 않는다. 마치 다른 집안의 일처럼 여길 정도였다.

‘만일 내가 좌포정사가 아닌 도지휘사였다면, 오군도독부를 설득해 광동의 무림 문파를 전부 지워 버렸을 것이다.’

지운다는 것이 꼭 다 죽인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으로 쫓아내는 정도로만 해도 광동성의 제어가 한결 쉬워질 것이다.

한참 생각에 빠졌던 종명이 이내 입맛을 다셨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근래 워낙 심사가 복잡해서 그런지,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과격한 정책들이 떠오른다.

“또 저희들끼리 싸움질이라도 벌인 모양이군. 되었네. 그치들이 치고받는 게 한두 번이던가.”

“그것도 그렇지만…….”

“뭐가 되었든,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민초들에게 피해가 가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아. 이 기회에 자멸한다면 그게 더 좋은…….”

순간 종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남단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남단이라면…… 은씨세가가 있는?”

상각이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은씨세가는 멸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으음. 그건 다행이군.”

무림인의 존재를 용납하진 않지만, 그래도 은씨세가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괜찮다. 은씨세가는 무림세가지만, 본디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을 위해 몸을 불살랐던 문관(文官) 가문이었다.

모종의 사건으로 가문의 뿌리가 뽑힐 뻔한 이후 우연히 무공 서적을 입수하여 무림세가로 거듭났지만, 제국을 위한 그들의 충정은 아직도 굳건했다.

말하자면, 은씨세가가 있기에 광동 남단의 무림이 별다른 사고 없이 평화롭게 유지될 수 있었다.

종명은 훗날 은씨세가의 가주를 제국의 군정 기관에 추천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 인품과 무력이라면, 제국에서도 분명 크게 반길 것이다.

“한데, 대체 어떤 일이기에 갑작스레 여러 문파가 멸문했단 말인가? 은씨세가가 중간에서 잘 조율했을 텐데?”

“거기까지는 소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 조사 중이니, 은씨세가의 가주가 협조해 준다면 사나흘 내로 원인을 알 수 있을 겁니다.”

“음, 그래?”

그때였다.

“어, 어르신!”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종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내 업무 시간에는 방해하지 말라 하였거늘.”

“큰일 났습니다!”

종명과 상각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지간한 일로는 목소리에서 저런 급박함이 느껴지기 힘들다. 생각해 보면 지난 수년간 이곳을 지켜온 호위대장이 이리 다급하게 구는 것은 처음이었다.

“큰일이라니? 변고라도 터진 것인가?”

“지금 관도 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병 하나가 이곳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접근했던 병사 중 상당수가 다쳤습니다!”

“기병?!”

“그렇습니다! 천하에서 다시 보기 힘든 붉은 신마(神馬)를 탔는데, 거대한 도끼를 들고 이곳을 향해 돌진 중입니다!”

종명의 눈이 흔들렸다.

“기병이라니? 무림인은 아니란 말인가?”

“확실하지 않습니다만, 그 돌파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막는 족족 뚫리고 있는데, 도끼를 휘두르는 힘을 보면 도저히 인간의 그것 같지가 않습니다!”

상각이 서둘러 물었다.

“다른 걸 떠나서, 그 기병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게 확실한가?”

“대로 몇 번의 갈림길마다 이곳 관저를 향한 최단 경로로 주파하고 있습니다! 그 기병의 목적지가 이곳 관저일 확률이 구 할 이상입니다!”

“이, 이런!”

상각이 종명에게 말했다.

“어르신! 일단 몸을 피하시지요!”

종명의 눈이 깊어졌다.

“이곳이 나의 거처일세. 맡은 일을 하라고 국가에서 내려 준 집이자 업무처야. 가긴 어딜 간다고 그러시는가.”

“어르신! 만에 하나 그자의 목표가 어르신이라면……!”

“당연히 나겠지.”

“예에?!”

“호위대장이 저리 호들갑을 떠는 걸 보면 이쪽 병력으로는 막기가 힘들다는 뜻. 하물며 이곳 관저까지의 최단 경로를 알고 있을 정도라면 지금 도망쳐 봤자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세.”

종명이 눈을 감았다.

“도주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야 천 번이라도 그러겠으나, 이미 코앞까지 들이닥친 미지의 무뢰배에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군.”

“어르신!”

“그리고.”

번쩍!

다시 눈을 뜬 종명의 눈은 불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한번 보고 싶네. 그자가 왜 나를 노리는 것인지. 내 비록 성현들의 말씀대로 선하게만 살아온 인물은 아니나, 누구에게 피해를 입히며 살진 않았다고 자부하는바, 그자가 내게 어떤 원한이 있는지 궁금해.”

상각은 안절부절못했다.

“지금이라도 어서 일어나시지요! 상대는 무림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놈들은 제어가 불가능한……!”

“걱정 말게.”

종명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씁쓸함과 기대감, 피곤함이 느껴지는 복잡한 미소였다.

“정체불명의 무림인이 좌포정사를 죽인 소문이 천하에 돌게 되면, 무림을 보는 제국의 눈도 곱지만은 않을 걸세.”

“……설마, 일부러 남으시려는 겁니까?”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하다네. 그저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 이곳에 남겠다는 것은 아니야.”

“어르신! 제발 지금이라도 생각을……!”

“그자의 목표는 분명 나겠지만, 어쩐지 내 죽음을 원하는 건 아닐 듯싶군.”

“예에?!”

과다한 업무량에 피로는 만성이 되었다.

그러나 급박한 순간에도 종명은 특유의 총기를 잃지 않았다. 개인의 사상이 어떠하든, 그는 밑바닥에서부터 승선 좌포정사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만한 실력을 갖춘 자가 내 목숨을 노렸다면, 대낮에 말을 타고 돌진하진 않았겠지. 차라리 몰래 숨어들어 암살을 감행했다면 모를까.”

상각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종명의 말이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종명이 문을 향해 말했다.

“호위대장. 길을 열게. 쓸데없이 사상자를 내지 말도록.”

“며, 명을 받듭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멈춰라! 이곳은 승선 좌포정사 어르신의 관저다! 말에서 내려와 정체를 밝……!”

“비켜!”

콰아아앙!

무지막지한 폭음과 함께 대지가 뒤흔들렸다.

엄청난 충격파였다. 집무실에 앉아 있는 종명의 몸이 한 차례 떨릴 정도로.

종명의 눈이 흔들렸다.

‘굉장하군.’

이곳에서 대문까지의 거리가 얼마이던가. 한데도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폭음이 들려왔고, 여기까지 충격이 전달될 정도였다.

대체 얼마나 힘이 강하면 이럴 수 있을까? 어떤 무공을 익혀야 이토록 압도적인 돌파력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잠시 후.

파아아아악! 콰앙!

종명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저 멀리 한쪽 벽이 무너지더니, 이내 한 명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상반신에 흑회색 철쇄를 휘감고, 전신에는 경장 갑주를 걸쳤다. 한 손에는 사람 몸뚱이만 한 양날 도끼를 들고 있는데, 그 흉흉함이 말도 못 할 정도였다.

종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년, 연호정이 종명을 향해 물었다.

“좌포정사 종명, 맞소?”

“맞네. 그러는 자네는 누구이기에 이런 무례를 범하시는가?”

“내 정체는 추후에 밝히도록 하겠소. 지금 당장 나와 움직입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포정사사의 관저에 난입한 것도 모자라 국가의 정병을 상처 입히고 관리인 나를……!”

그때였다.

입을 열어 종명의 말을 끊으려던 연호정은 순간 창밖 저 멀리서부터 솟구치는 붉은 연기를 보았다.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였다. 바람이 부는데도 하늘을 향해 올곧게 올라가고 있는데, 여기서 이리 뚜렷하게 보일 정도라면 산 하나에서 통째로 연기가 뿜어지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그 방향은 묵비와 사마현이 향한 남부였다.

‘……?!’

연호정이 기감을 증폭시켰다. 연가신단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이곳 일대를 더듬었다.

‘없다.’

없다.

수상한 인물이 한 명도 없었다. 야율적이 작정하고 은신술을 펼치는 게 아닌 이상 천하 어떤 암살자도 연호정의 감각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그때, 연호정이 상각의 눈빛을 포착했다.

분노와 당혹감으로 가득했던 표정이 일순 냉정해졌고, 두 눈은 은은한 살의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상각의 위치는 종명의 좌측 전방이었다.

“…….”

찰나지간 기이한 침묵이 일었다.

차아아아앙!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은 상각이 엄청난 속도로 손을 휘둘렀다.

목표 지점은, 바로 종명의 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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