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화. 평화와 분란 사이 (1)
반나절 전.
“결국, 보내오지 않는군.”
야성을 보는 야율적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기본적으로 무림인들은 암살자를 하찮게 보는 면이 있다. 그러면서도 암살자의 존재를 두려워했다. 자다가 언제 목이 베일지 모르니까.
‘신중한 자로군.’
숨어서 기습을 가하는 것도 아니요, 대놓고 주둔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는데도 병력을 보내오지 않았다.
이것은 소심한 게 아니라 신중한 것이다. 적의 본진을 휘어잡았다면 방심할 만도 할 텐데, 전혀 그런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하긴.’
만약 정말로 병력을 보냈다면, 병력을 맞이하기 전에 수도 없이 의심했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연호정 그놈 휘하에서 움직이는 놈이다. 그놈의 안목이라면 오만한 놈을 휘하에 두진 않았겠지.’
오히려 병력을 보내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굳이 머리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니까.
야율적이 암살자들을 둘러보았다.
천 명의 암제단(暗帝團)은 야율적이 고르고 고른 정예들을 십 년 동안 훈련해 키워 낸 극한의 암살자들이었다.
그중 본진에 남겨 둔 백 명을 제외한 구백 명의 부하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총공격을 할 것이다.”
암살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살수 특유의 짐승 같은 눈알을 번뜩일 뿐.
야율적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지옥 같은 훈련을 견뎌 주어 고맙게 생각한다. 너희는 나를 음신으로서 따랐지만, 지금은 내 개인의 정병이 되어 날 위해 힘써 주고 있지.”
“…….”
“나는 더 이상 음신으로 살지 않겠다. 그리고 너희 역시 더 이상 음신 휘하 최강의 정예가 아니다.”
야율적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이 트기 직전의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달과 별이 이리 빛나는데도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야율적이 외쳤다.
“너희는 사음의 신을 위해 목숨조차 불태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전사들이다! 이 시간 이후, 너희의 목숨은 사음신께서 맡으실 것이다! 설령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너희의 혼은 신의 품에서 영원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놀랍게도, 사음을 입에 담은 야율적 앞에서도 암살자들은 의문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결전의 때가 왔음을 알고 안광을 불태울 뿐이었다. 이미 그들에게 야율적은, 그가 어떤 존재일지라도 따라야 하는 절대 군주였던 것이다.
야율적이 몸을 돌렸다.
“성을 뒤흔들어라. 나와 일 조장은 이십이 번, 이십오 번 통로로 침투하여 화산대연(火山大煙)을 피울 것이다!”
파아아아악!
야율적의 질주를 시작으로 구백 명의 암살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섬뜩한 광경이었다.
물경 일천에 육박하는 대인원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이동한다. 그 목적을 떠나 장관이어야 함이 분명한데, 기묘하게도 섬뜩함이 느껴진다.
그것은 정적 때문이었다.
구백 명이,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일시에 움직이는데도 바람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발소리도 나지 않았다. 의복이 뒤흔들리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무런 기척을 내지 않고도 이런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이는 천하에 암살자밖에 없을 것이다.
소리 없이 다가와 삶을 죽음으로 바꿔 놓고 사라지는 존재들.
그래서 사람들은 암살자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천시했고, 혐오하면서도 공부하려 들었다.
번쩍!
어둠을 뚫고 나아간 야율적의 눈빛이 야성에 닿았다.
‘경계 중인가.’
제아무리 야율적이라도 이렇게까지 멀리 떨어진 야성의 첨탑을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야성은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 설계자이자 기관진식의 대가들이 뭉쳐 만든 무서운 요새였다. 저 요새를 제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스무 배가 넘는 병력이 공성전을 펼쳐도 여유롭게 막을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이지.’
야성은 겉으로는 공략하기 다소 어려운 성 정도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에 정통한 자가 있다면 절대의 요새로 변한다.
천만다행으로 야성을 점거한 무림맹의 유군 부대는 야성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야성의 비밀 통로와 특성을 잘 아는 이쪽이, 두 배가 안 되는 병력으로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물론 야율적은 정면으로 뚫고 들어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혼란을 유도하면 그만이다.’
암제단 전원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나 조장 둘 중 하나가 침투하여 화산대연을 피우고 사음교에 현 사태를 보고하면 충분하다.
어차피 사음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질 수 있는 전사로 키운 놈들이다. 그 죽음의 때가 생각보다 빨리 왔을 뿐, 언제 불살라 버려도 상관없을 목숨들이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파아아아악!
빠르게 거리를 좁힌 야율적과 암제단.
야성까지의 거리가 칠 리(七里) 정도 남았을 때, 야율적이 손을 들었다.
훅!
야율적과 일 조장이 선두에서 좌측으로 이탈했다.
파라라라라라락!
그때부터 암제단은 대놓고 기척을 드러냈다.
우르릉! 우르릉!
은신술조차 풀고 가볍게 내달리니, 발에도 무게감이 실리고 전신에도 힘이 넘친다. 쓸모없이 기를 소모하지 않기에 살의만이 가득했던 암제단원들의 눈에 강인한 생기가 감돌았다.
암살자로서가 아니라 공성을 위해 내달리는 군병이 되어 돌진한다. 산이 뒤흔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
바위와 바위 사이의 좁은 틈, 이십이 번 통로로 들어가려던 야율적은 순간 흠칫했다.
화르르르르르륵!
야성의 성벽 위에서 엄청난 화염이 치솟았다.
놀랍게도 그건 정면만이 아니었다. 야성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성벽 위에서 거대한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이다.
야율적의 눈이 흔들렸다.
‘뭐지?’
갑자기 불을 지르다니?
물론 불을 지르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다. 야성 안에는 수백 개의 기름통이 구비되어 있었고, 잘 말린 나무들도 한가득 쌓여 있었으니까.
다만, 굳이 왜 불을 피웠느냐가 문제였다. 이쪽에서 기척을 드러냄과 동시에 불길이 치솟는 걸 보니 호시탐탐 경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뭐 하러 불을 피운 것일까?
‘차라리 불화살을 쐈다면 모를까, 제 놈들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불을 냈다? 대체 왜?’
가만히 성벽을 보던 야율적은 이내 생각을 접었다.
‘뭐가 되었든 전투는 벌어진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돼.’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콰아앙!
비밀 통로의 삼분지 일 지점을 돌파했을 때, 지상에서 심상치 않은 굉음과 울림이 일었다.
그 굉음과 충격이 어찌나 무시무시한지, 지진이 나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 확신했던 통로 천장에서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질 정도였다.
“뭐, 뭐야?”
야율적은 고수였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지하 통로에서, 지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간파할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암제단이 야성의 성벽을 깨부수고 있는 걸까?
그럴 리는 없었다. 암제단은 야성의 성벽은 물론 성문이 얼마나 단단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깨부수자면 부수지 못할 것도 없지만, 합리적인 작전이 아니다. 암제단 모두가 갈퀴손 등을 이용하여 성벽을 타오르려 하지, 깨부숴 돌진할 생각은 못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쿠구구구구궁!
이번 충격은 훨씬 더 강했다.
순간적으로 야율적은 공포를 느꼈다. 통로가 몽땅 무너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지하의 지반이 무너지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뭔가 심상치가 않아.’
야율적은 불길함을 느꼈다.
이 충격파의 근원이 성벽 쪽이었다면 차라리 덜 불안했을 것이다. 어차피 암제단원 대부분의 죽음을 가정하고 움직이는 것이니, 무슨 일이 터져도 놀랄 일은 없다.
하지만 이 충격파의 근원이 성 안쪽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미세하지만…… 공기의 흐름과 거리로 봤을 때, 성벽이 아니라 성안에서 발생한 충격파가 분명하다.’
순간 야율적의 눈이 번뜩였다.
‘이놈들 설마!!’
파아아아악!
엄청난 속도로 통로를 가로지른 야율적이 일순 문 하나를 열고 위로 올라갔다. 통로 중간에 설치된, 성 바깥쪽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문이었다.
덜컹!
문을 열고 지상으로 나온 야율적은 순간 얼굴 전체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화르르르르륵!
성이 통째로 불타고 있었다.
저 미친놈들은 성벽 위만이 아니라 성벽 겉면에도 기름을 마구 쏟아붓고 있었다. 성 자체를 불의 성으로 만들 작정인 것, 애초에 암제단이 성을 타오르지도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하지만 야율적은 그것이 놈들의 진짜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의 외벽에까지 불을 붙이는 건 일견 살벌해 보이는 병법이지만, 기름통이 무한정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성벽의 너비를 생각하면 한나절은커녕 반나절도 채 버티기 힘들다.
그렇다면 대체 왜?!
콰아아앙! 콰아아앙! 콰르르르르릉!
그 순간 야성 안에서 엄청난 충격이 일었다.
화탄이 폭발한 게 아니었다. 엄청난 내공력으로 무언가를 부수고 있는 것이었다.
콰콰콰쾅! 콰르릉! 쿠르르르릉!
작정이라도 한 듯 야성 전체가 뒤흔들렸다.
“이놈들…… 이 미친놈들이 설마!!”
야성이 부서지고 있다.
외부가 아닌 내부의 공격으로 인해.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그렇다.
야성을 점거한 무림맹의 유군 부대가 성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러면 상황이 달라진다. 야율적은 야성 내부에서 화산대연을 터트리고, 사음교 본진으로 직통하는 영물 전서응을 보낼 작정이었다.
한데 놈들이 야성 내부를 죄다 부숴 버리면?
화산대연의 격발추는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부서지지 않는다. 그러나 저곳에는 초절정고수가 있다. 멸사군장 연호정과 함께 천하제일 후기지수로 손꼽히는 모용우는 물론 소림승도 존재한다.
저들이 자칫 화산대연의 격발추를 부숴 버린다면? 저들이 자칫 그 영물을 해치기라도 하면?
“안 돼!”
파아아아악!
혼란을 유도하여 몰래 침투, 목적을 달성하고 그대로 빠져나가려 했던 야율적은 자신의 작전을 완전히 수정해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작전을 성공시켜야 했다.
타다다다닥!
재빨리 통로로 다시 들어가 달린 야율적이 비로소 야성 내부, 병기 창고 쪽으로 이어진 문에 닿았다.
덜컹!
문을 열자 훅! 하고 밀려드는 충격파에 순간적으로 감각이 어지러워졌다.
이내 야율적의 눈이 빛났다.
그의 눈에 힘을 한껏 끌어 올려 건물을 부수고 있는 버러지들이 보였다.
훅!
무서운 속도로 돌진한 야율적의 수도(手刀)가 탕마군병 십여 명의 목을 단숨에 날려 버렸다.
푸화아아악!
핏물이 터지며 건물의 붕괴가 늦춰졌다.
그때였다.
콰앙!
본능적으로 피하지 않았다면 팔 하나가 그대로 날아갔을 것이다.
실로 엄청난 위력의 장법이었다. 깨달음의 수준을 떠나, 무학의 위력 자체가 지고하였다.
야율적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황금빛 항마진기를 불꽃처럼 뿜어내는 장년의 승려가 금강부동의 신법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바로 범오였다.
“아미타불!”
우우우우우우우웅!
‘이익!’
야율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호와 함께 머릿속을 뒤흔드는 음성, 불문의 사자후(獅子吼)였다. 모든 삿된 것을 제거한다는 불문 최고의 음공이 야율적의 반응을 한 박자 늦춰 버렸다.
콰앙!
그리고 그곳에, 탕마대검을 든 모용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잘 왔다, 사음교의 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