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17화 (416/963)

417화. 평화와 분란 사이 (3)

불문의 사자후는 모든 사마(邪魔)를 제압한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얘기였다. 실제로 불문의 사자후 신공(神功)이 절륜한 위력을 자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에게나 그 위력이 전달되는 건 아니었다.

불문과 도문의 신공은 사마외도(邪魔外道)의 무공과 상극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무공을 연성한 자들보다 더 쉽고 확실하게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지, 경지의 차이를 완벽히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반대로 사공과 마공을 연성한 자의 경지가 압도적으로 높으면, 오히려 불문의 내공을 연성한 자를 누구보다도 쉽게 짓눌러 버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상성(相性)이란 것이다.

퍼어어엉!

모용우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기습과 사전 작전을 통해 야율적의 배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래도 야율적은 그들보다 고수였다. 순간적으로 복부를 조이고 일장(一掌)으로 모용우를 튕겨 내는데, 그 힘과 초식의 흐름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유려했다.

“이, 이것들이!”

야율적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때였다.

‘뭐야?’

튕겨 나가는 모용우의 눈에서 차가운 광기를 읽은 그였다.

당황해야 마땅할 순간에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오히려 득의양양해 보이기까지 했다.

왜지?

커허어어어엉!

순간 등 뒤에서 울려 퍼지는 무지막지한 사자후에 야율적의 목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쿨럭!”

코와 입에서 피를 토해 낸 야율적의 얼굴이 극도로 창백해졌다. 음신지기를 끌어 올리지 않았는데도 시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이런!’

이것이 바로 소림의 사자후였다.

범오의 경지는 야율적보다 낮다. 고로 사자후의 진짜 위력이 제대로 먹혀들진 않는다.

하지만 야율적은 내외상을 치료하지 못했고, 나아가 소림은 다른 불문의 무공을 압도하는 정파 무림의 태양이었다.

그 모든 요소 하나하나가 야율적에게 치명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조금 전, 모용우의 기파에 음신지기가 아닌 수왕지기가 반응한 것도 범오의 사자후가 그의 본성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크아아아아!”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괴성을 지른 야율적이 팔을 과격하게 휘둘렀다.

콰르르릉!

휘어지듯 곡선을 그리며 쏘아진 장력이 땅에 거대한 고랑을 만들어 냈다.

범오의 눈이 흔들렸다.

‘강하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무공 자체의 위력은 처음 자신이 구사한 소림의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보다 낮을지언정 내력 자체가 강성하여 그 이상의 결과를 낸다.

고수의 손에서 펼쳐지면 삼재검법(三才劍法)도 절정의 검법이 되는 법. 하물며 초절정의 영역에서도 극치에 달한 야율적의 무공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이놈!’

범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일권을 날릴 생각이었다.

그때, 모용우의 전음이 들렸다.

[작전대로 하시오!]

움찔!

범오가 재빨리 주먹을 풀고 좌측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콰앙! 콰앙!

땅거죽이 터져 나가고, 건물 하나가 서서히 기울어졌다.

범오의 눈이 깊어졌다.

‘저만한 내외상을 입고 내친 일격도 대단했지만, 연달아 쳐 낸 지금의 권풍도 엄청나구나.’

일격, 일격이 자신이 마음먹고 구사하는 필살기급의 권력(拳力)이다. 말하자면 현재의 야율적은 범오가 힘을 잔뜩 끌어 올려야만 낼 수 있는 위력의 무공을 연달아서 구사 가능하단 뜻이었다.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으로 대응했다면 반드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범오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용 군장의 말이 옳다. 이 대 일의 승부로 몰고 가면 이쪽의 피해가 막심해!’

썩어도 준치라 하였다. 상처 입은 호랑이도 범은 범이다.

범오가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대승범천신공의 항마진기가 무섭게 모여들었다.

커허허어어어엉!

“커헉!!”

재차 장을 날리려던 야율적이 신음을 토하며 비틀거렸다.

후속타를 날리기 위해 진기를 끌어 올리던 와중이라 피해가 더 컸다. 범오의 시기적절한 사자후가 진기 운행을 뚝뚝 끊어 버린 것이다.

파아아앙!

튕겨 나간 모용우가 무서운 속도로 다시 접근해 왔다.

심화된 내상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야율적의 감각은 죽지 않았다. 이성이 아닌 본능, 야수처럼 웅크려진 야율적의 손이 돌진하는 모용우를 향해 휘둘러졌다.

콰득! 퍼억!

모용우의 좌측 견갑이 통째로 날아갔다.

모용우답지 않은 과감한 돌진이었다. 그대로 어깨가 날아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의 주먹이 야율적의 가슴을 후려쳤다.

쾅!

야율적이 재차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이 정도로는 절대 죽지 않는다. 모용우는 일권을 내치기도 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파라라락!

전력을 담은 일권에 체중을 싣고, 타격이 성공한 순간 몸을 휘돌려 잔여 힘을 털어 버리곤 땅에 떨어진 대검을 줍는다.

그 일련의 과정이 마치 하나의 초식을 펼치는 것처럼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연호정의 파격적인 움직임과는 달리, 모용우의 움직임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절도가 있었다.

양손으로 대검을 쥔 모용우가 힘차게 대검을 올려 쳤다.

촤아아아악!

모용우의 눈이 깊어졌다.

‘모자랐다.’

야율적의 얼굴에 사선으로 검상이 생겼다.

와중에도 고개를 사선으로 틀어 코와 눈이 날아가는 건 피했다. 기가 막힌 감각이었다. 한 마리 짐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콰앙!

모용우가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순간 야율적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진각에서 결심의 일격을 느낀 것이다.

찰나의 순간, 야율적은 치열하게 고민했다.

‘도주해야 한다.’

설마하니 이 둘이서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모용우와 소림승이 함께 공격을 감행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반격이 가능했겠지만, 소림승이 시기적절하게 사자후를 터트릴 때마다 무공 구현에 심각한 이상이 초래되고 있었다.

이 조합을 생각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모용우의 말마따나 독한 내외상은 물론 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치고 들어온 것이 문제였다.

‘도주해야 해. 이놈들은 끝까지 이 전법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다.’

생사결에서 자존심 따위는 사치다. 이놈들은 그걸 알고 있었다.

‘빠져나갈 수 없어. 더는 안 돼. 도주해야 한다!’

도주, 그리고 도주.

‘도주를……!’

야율적의 눈이 흔들렸다.

찰나지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불타오르는 눈으로 자신을 굽어보는 한 괴물의 얼굴이었다.

차갑고도 뜨거운, 뜨겁고도 무심한, 무심하고도 살기가 넘치는 괴물의 오연함.

바로 연호정이었다.

콰아아아앙!

야율적의 진각이 성을 뒤흔들었다.

건곤백팔검해, 최강의 일격을 뽑아내려던 모용우는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을 느꼈다. 범오가 야율적의 진기 흐름을 끊어 버린 것처럼, 야율적 역시 한발 앞서 모용우의 공격을 차단해 버린 것이다.

“이 개새끼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서 광기 어린 분노가 묻어 나왔다.

“감히 너희 따위의 애송이들이 나를……!!”

콰앙!

야율적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피를 토해 냈다.

이번에는 사자후가 아니라 아라한신권이다. 오 장 거리 밖에서 발출한 쾌속한 권풍이 야율적의 등판에 작렬한 것이다.

시기적절한 일격이었다. 사자후만으로 대응하려 했다면 모용우가 위험했을 터, 범오의 실전 감각 역시 대단했다.

후우우우웅!

탕마대검에 하늘색 진기가 모여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천(晴天)의 색깔이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맑아서 오히려 어둡게 느껴지는,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드는 극상승의 검기(劍氣)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순간 야율적의 얼굴에 공포가 일었다.

이건 위험하다.

이번 일격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내외상을 입은 몸으로는 방어는커녕 회피마저 막막할 것이다. 본능이 그리 속삭이고 있었다.

‘안 돼.’

범오의 권풍으로 난잡하던 정신이 다시 맑아진 기분이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모용우와 범오의 합공으로, 야율적은 실로 오랜만에 공포를 느꼈다. 연호정과의 싸움에서도 느끼지 못한 죽음의 공포였다.

하지만 지금에야 그는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죽는다 한들 임무는 달성해야만 한다!’

왜 야성으로 돌아오려 했는가. 왜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으로 침투하려 했는가. 왜 애써 키운 암제단을 정면으로 돌격시켰는가.

쿠르르릉!

한순간 어두워진 야율적의 안광이 이내 짙은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모용우의 눈이 푸른 하늘빛 섬광을 내뿜었다.

“참(斬)!!”

번쩍!

한 줄기 휘황찬란한 검격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콰르르르릉!

무지막지한 검기의 폭풍이 일대를 휩쓸었다.

단순한 일검이지만, 그 일검에 실린 내력과 뿜어져 나온 발경의 구결은 천하일절이다.

검력이 뿜어져 나온 성 중앙에 무려 칠 장에 달하는 거대한 검흔이 생겨나며 대지와 성벽을 갈라 버렸다. 참격과 동시에 터져 나온 후폭풍의 검경이 파괴된 건물의 잔해들을 사방으로 날려 버렸다.

괴력의 일검. 현재 모용우가 구사할 수 있는 건곤백팔검해 최강의 검초인 건혼청천검(乾魂晴天劍)이었다.

쿠르르릉!

땅이 무너지며 거대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이런!”

숨을 헐떡이던 모용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범오 스님! 놈이 빠져나갔소!”

“빌어먹을! 나도 알고 있소!”

범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용우를 향해 돌진할 것처럼 보이던 야율적이 급작스레 방향을 전환해 자신을 공격하고 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야율적의 공격이 생각보다 막을 만했다는 것 정도.

‘제기랄! 이런 얕은수에 당하다니!’

범오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어깨에서부터 잘려 나간 팔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야율적의 팔이었다.

모용우가 외쳤다.

“핏자국을 따라가시오! 멀리는 못 갔을 것이오!”

“알겠소!”

파아악!

범오가 핏자국을 따라 몸을 날렸다.

그 특유의 흉흉한 기파를 찾으려 했지만,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로 진기를 조율해 사음교도가 아닌 음신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번쩍!

다행히도 야율적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상황이었다. 은밀하기 짝이 없던 기도가 한 번씩 거칠게 일렁이는 순간이 있었는데, 야율적 역시 급한 마음에 내상 관리를 못 해 진기가 튀는 것이었다.

그렇게 범오를 먼저 보낸 모용우가 한 움큼 피를 토했다.

“쿨럭!”

쏟아 낸 핏물 색이 검붉었다. 체내의 탁기를 한데 모아 모조리 뽑아낸 것이다.

창백했던 모용우의 얼굴에 다시금 혈색이 돌았다.

“진 조장! 적의 수괴가 들어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모든 전력을 중앙으로 밀집시켜!”

멀리서 진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을 받듭니다!”

파아앙!

모용우가 범오의 뒤를 따라 야율적을 쫓았다.

놀랍게도 야율적은 무려 두 시진이 넘도록 성 이곳저곳으로 도주했다. 그만한 내상에 팔까지 잘렸으면서도 용케 쉬지도 않고 도주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더 이상 정면 돌격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암살자들만이 들을 수 있는 무음청파(無音聽波)의 기술을 발휘하여, 구백 명의 암살자들을 모조리 비밀 통로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야성은 한바탕 아수라장이 되었다. 범오와 모용우가 야율적의 뒤를 쫓고, 암제단이 비밀 통로를 통해 성안으로 들어왔으며, 중앙에 집결한 탕마군병들은 통로에서 빠져나온 암살자들과 격전을 벌였다.

그렇게, 어느새 해가 중천으로 향했을 무렵.

피유우우우웅! 콰아앙!

용아포 일격으로 성벽을 뚫어 버린 묵비와 사마현이 야성으로 진입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