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35화 (434/963)

435화. 정세를 바꾸는 우연 (3)

“부주님.”

“음.”

양천이 잔을 비웠다.

“텁텁하군.”

“송구하옵니다.”

“애초에 양조장에서 별로인 술을 가져온 건데 자네가 송구할 게 뭐가 있나.”

“…….”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는 백서를 보며,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이보게, 백서.”

“예, 부주님.”

“별로인가?”

“……예?”

“기분이 별로냐고 물었네.”

백서는 실로 오랜만에 당황했다. 예전에도 그렇고, 부주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잘 다스리던 부동심이 크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물론 양천 최고의 심복 중 하나답게 그는 표정 관리에도 능했다.

백서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에도 말했지? 내 앞에서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네.”

“…….”

“허허, 자네가 오랫동안 나를 보필했듯 나 역시 자네를 오랫동안 보았어. 심복의 기분 하나 모를까.”

백서는 순간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이 묵룡부에 다시 들른 후, 부주님께서는 예전보다 훨씬 더 여유로워지신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점점 날카로워지던 성격이 예전처럼 넉넉하고 여유롭게 변한 것이었다. 본래부터 양천은 야심가답지 않게 제 사람에겐 엄하면서도 사석에선 부드러웠다.

이미 알고 있었던바, 다만 백서가 울컥한 것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들어 본 심복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최근에 참 별일이 다 있었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에게 속아 넘어간 것도 모자라, 정치라고는 참새 눈물만큼도 모르는 계집이 고개 빳빳이 들고 버릇없는 요구나 해 댔다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면전에서 말이야.”

애송이는 연호정이었고, 계집은 보타암에서 온 지파의 수장을 뜻함이었다.

백서가 고개를 조금 더 숙였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라고 하기에는 그자의 재능과 능력이 너무나도 뛰어났습니다.”

버릇없는 계집을 얌전히 보내 준 것은 수장의 아량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애송이에게 속아 넘어간 것은 능력의 문제였다.

그래서 백서는 연호정을 치켜세웠다. 자신이 모시는 수장은 한낱 애송이 따위에게 속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양천은 그런 백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웃었다.

“허허허, 자네도 나이를 먹긴 먹었나 보이. 안 하던 아부도 다 하네그려.”

“…….”

“하긴, 자네 말이 맞네. 연호정 그 녀석, 애송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뛰어나지. 녀석에게 한 번 속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다시 손에 넣고 싶을 정도로.”

“부주님.”

“아네. 설마하니 내가 그놈을 다시 묵룡부로 들이겠는가?”

“…….”

“나 역시 자존심이 있는 사람일세. 설령 들인다 한들 들어올 놈도 아니고. 언젠가 제대로 갚아 줄 생각은 있지만, 진짜로 놈을 본부로 영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네.”

“송구하옵니다.”

양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뭐가 되었든, 근래 이런저런 사건을 겪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네.”

“…….”

“인내심이란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구나.”

백서의 눈이 흔들렸다.

다시 잔을 채우며, 양천이 말을 이었다.

“연호정 그놈한테 당한 거야 내 능력이 부족해서지. 사람 보는 안목도 부족했고.”

“그렇지 않습니다, 부주님.”

“내가 그것을 인정하네.”

“…….”

백서 역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양천의 몸이 왜 그 지경이 되었었는지, 그간 양천의 혜안이 무뎌졌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은 바로 사음교주 때문이었다. 사음교주의 무공에 당해 정상이 아닌 몸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천은 사음교주를 탓하지 않았다. 그 또한 자신의 능력이요, 안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큰 사람이다. 백서는 양천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모시는 수장이 비로소 ‘완성’되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보타암의 계집은 달라. 보타암을 뒤흔든 것은 내 명을 받고 파견된 제자의 짓이라네. 말하자면, 현재 보타암의 어지러운 상황은 내가 의도한 것이란 말이지.”

“…….”

“그간 무수히 많은 일에 손을 댔지만, 정작 내 의도대로 일이 돌아간 경우는 많지 않았다네. 그중 하나가 보타암이야. 그렇다면 손뼉을 쳐도 모자랄 일이거늘, 그쪽 계집이 와서 그따위 요구하는 걸 듣고 있자니 창자가 다 뒤집히는 기분이더군.”

“그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문제라?”

“그렇습니다.”

“어째서?”

“보타암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트린 것은 부주님의 놀라운 계책에서 기인한 결과였습니다만, 그쪽에서 건방을 떤 것은 상대를 볼 줄 모르는 오만한 자의 자만이지요.”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생각하시는가?”

“그렇습니다. 하물며 그자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수련마저 등한시한 몰락한 검사입니다.”

파견 나온 보타암의 고수는 지닌바 무공이 굉장했다.

전설의 보타암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님을 증명하듯, 그 무위는 백서를 한참이나 상회하고 있었다. 평생을 검도(劍道)에 매진한 검객의 예기 역시 대단했다.

그러나 백서는 알 수 있었다. 그 늙은 여우가 지난 이삼 년간 수련을 게을리했음을.

검도를 좇다가 진흙탕 정쟁에 발을 들인 자다. 높은 데서 빛나던 태양이 떨어질 때는 달빛보다 차가워지는 법, 그 여우가 그러했다.

백서는 자신했다. 그간 자신이 숨겨 둔 온갖 비술까지 꺼내 든다면, 자신보다 우위의 경지에 있는 그 여우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고작 이삼 년에 불과했지만, 그 이삼 년의 태만이 평생 갈아 놓은 검날을 몽둥이처럼 무디게 만들었다.

결국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현재 보타암 사태에 양천이 개입해 있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언제든 무너질 사람이었다.

“무인에게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는 능력은 필수입니다. 덤비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덤볐다간 목숨이 위험해지니까요. 마찬가지로, 정치가 역시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본인은 물론 본인이 속한 조직까지 패가망신하게 될 테니까요.”

“즉 그 계집은 무인으로서도, 정치가로서도 실격이다?”

“무인일 수는 있어도 감히 정치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스스로 눈치가 뛰어나고 머리가 좋다고 착각하는 바보일 뿐입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그 역시 백서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그 여우의 눈빛에 욕망이라는 광기가 도사리고 있지 않았다면, 그 역시 참지 않았을 것이다.

욕망에 이성을 잃은 자는 작은 손짓 하나에도 천하를 불태우려 든다.

양천이 이번에 그자에게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나저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보타암은 총 세 개의 지파로 나뉘어 있어. 그중 하나의 지파가 내게 왔으니, 다른 두 지파 중 하나는 무림맹으로 향할 걸세.”

“어쩌면, 둘 모두일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다만, 아무리 욕망에 눈이 멀었어도 최소한의 그림은 그릴 줄 알더군. 서로를 잘 감시하기도 할 테고. 누구 하나가 무림맹으로 갔다고 하면, 다른 누군가는 또 다른 뒷배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될 거야.”

백서의 눈이 빛났다.

“제삼의 집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네.”

“당대 무림에서 저희나 무림맹에 비견될 만한 조직은…….”

“있지. 중원에는 없지만.”

“……!”

백서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하니, 그들이 거기까지 손을 뻗겠습니까? 심지어 그들은 삼교의 존재를 모를 확률이 높습니다만?”

“그렇겠지. 정보력이 달리는 집단이니, 삼교를 알지는 못할 게야.”

양천이 빙긋 웃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들에게 삼교의 존재를 알려 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그렇다면, 보타암이라는 여우 소굴에서 두 마리의 호랑이와 머리 셋 달린 늑대가 힘 싸움을 벌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부주님.”

백서는 조심스럽게, 정말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쪽에서 정보를 흘리는 것은 지나친…….”

“처음에는 말일세.”

양천은 백서의 말을 칼같이 끊었다.

“처음 보타암을 망가트리려 했을 때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었네. 자네도 알지?”

“……예에.”

“보타암은 대대로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검객을 배출했어. 단 한 세대도 빼놓지 않고. 다만 세상이 그것을 몰랐을 뿐이야.”

양천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감이 담겼다.

“그 존재가 바로 검후(劍后)지. 그리고 검후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상에 나가 자신의 능력과 협의를 증명해야 해.”

“그렇습니다.”

“그리고 대대로 검후들은 우리 흑도를 건드렸다.”

강함의 증명, 협의의 증명.

검후는 단순히 보타암의 무(武)를 상징하는 존재가 아니다. 보타암의 무력은 물론, 그들의 정신과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상징적 존재인 것이다.

그러한 존재는 가르침만 잘 받는다고 탄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나가 어떠한 선(善)을 쌓는지, 어떻게 악(惡)을 처단하는지도 중요했다.

그래서 최종 관문을 뚫은 단 하나의 후보는 일정 기간 중원에 나와 무명(無名)으로 활동한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을 처단하며, 아무도 모르게 선을 쌓는다.

흑도 입장에서는 이가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이, 대대로 검후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애초에 민초들의 심신을 피폐하게 하는 것은 흑도 무리였고, 그중 뿌리가 되는 조직들은 세대당 한 번씩 검후에게 당해 와해되었다.

무력으로 짓눌러 버리고 싶어도 짓눌리지 않는 존재.

세상이 모르는 절대무공의 천하인. 그래서 흑도에게 있어 검후라는 존재는 막을 수 없는 재해와도 같았다.

“아마도 이번 세대의 검후는 나를 찾아왔을 것이야. 보타암이 그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말이지.”

양천이 눈을 감았다.

“악을 처단하기 위함이든 무인으로서의 도전이든,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네. 쳐들어오면 박살을 내 놓으면 그뿐. 그러나…….”

“…….”

“나는 묵룡부라는 흑도 연맹의 수장일세. 무인으로서의 호승심 이전에, 투왕이라는 별호가 주는 자신감 이전에, 많은 사람을 거느린 수장으로서 싸우지 않고도 이길 방법을 찾아내야 했지.”

“명민하신 판단이라 감히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네.”

훅!

양천의 몸에서 묵직한 기도가 퍼져 나갔다.

“나는 사음교주에게 당한 것도 모르고 수년이라는 시간을 바보처럼 보낸 멍청이라네. 내가 정체하고 있는 사이, 무수히 많은 신진과 이름조차 들어 보지 못한 괴집단이 치고 올라왔어.”

“…….”

“더는 흑도 연맹의 주인으로만 남진 않을 것이네.”

화아아아악.

양천의 두 눈에서 끔찍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를 이렇게 만든 놈에게 경고장 하나 정도는 보내 줘도 괜찮지 않겠나? 내 주먹에 박힐 놈의 가슴을 활짝 열어 놓도록, 필요하다면 어떤 악독한 수라도 서슴없이 써야 하지 않겠느냔 말일세.”

“……부주님.”

“백서.”

“예, 부주님.”

“가져야겠네, 검후라는 존재를.”

“……!”

“목적 없이 싸늘하게 빛나는 천하의 신검(神劍)을 내 손에 쥐어야겠네. 그 검으로 사음의 두 글자 중 하나 정도는 절단을 내 버려야겠어. 내 말, 이해하겠는가?”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그저 명을 받들 뿐입니다.”

“연호정 그놈, 광동에 있다고?”

“그렇습니다.”

“무림맹은 아직 맹주를 뽑지 않았지.”

“그렇습니다.”

양천이 눈을 감았다.

“연호정 그놈에게 서신을 보내게. 놈은 무림맹 정치의 핵이야. 적어도 아직까지는.”

“…….”

“놈을 움직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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