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검(劍)에 실린 미래 (3)
훅!
내지르는 주먹이 내뿜는 압력에, 공기가 한순간 압축되었다가 팍 하고 터져 나갔다.
부선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안 되는 건가.’
그녀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벌써 몇 시진째 주먹질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혈사자기를 기반으로 한 권법이 아닌, 오직 정권 지르기만 반복했다.
그녀 정도의 경지, 그녀 정도로 단련된 몸이라면 몇 시진 동안 정권을 질렀다고 이렇게까지 땀으로 범벅이 되긴 힘들었다.
즉, 그만큼 심력 소모가 크다는 뜻이었다.
‘그때 사부님께서 보여 주신 그 일권(一拳)을 흉내조차 낼 수 없어.’
깨달음이란 어디서든 얻을 수 있다. 잠을 자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있다가도, 하다못해 볼일을 보다가도 얻을 수 있는 게 깨달음이다.
달리 말하면, 확실하게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라 단언할 만한 게 없다. 그저 꾸준한 노력과 궁구가 언젠가 깨달음을 불러올 수 있는 자양분이 될 뿐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때 사부님께서 펼치신 일권에서 자신이 한층 더 강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따라 한다고 따라 할 수 있는 한 수는 아니었지만, 그 주먹을 끊임없이 추구하다 보면 반드시 얻는 게 있을 것이다. 부선은 그리 확신했다.
문제는 그 깨달음이 대체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지만.
“잡념이 많구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부선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스승이 계셨다.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보는 미소 띤 얼굴에, 지난날에는 보지 못했던 인자함이 어려 있었다.
“사부님.”
부선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확실히 못난 모습이기는 하지. 수련을 함에 있어 집중과 몰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지금의 넌 잡념이 너무나 많다.”
“송구하옵니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 네가 왜 그리 고민하는지를 모르지 않는다. 필시 그때의 일권, 그 주먹 때문이겠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스승의 눈은 피할 수 없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때의 주먹, 그때의 무리(武理)를 끊임없이 보여 주는 게 네 성장을 앞당길 수 있다면, 내 수도 없이 보여 주었을 것이다. 하나 그것은 자칫 너만의 무도(武道)에 내 무리를 끼워 맞추는 일이 될 수 있어. 그래서 그간 보여 주지 않았다.”
“…….”
“달리 할 말이 없도다. 그저 해 줄 수 있는 말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하라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그 주먹에 너무 미련을 두진 말아라. 때로는 사자신권(獅子神拳)을 펼쳐 보기도 하고, 또 때로는 병장기술을 연마해 보기도 하라. 네 마음이 당시의 주먹을 좇고 있다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음이야.”
양천은 부선의 재능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녀의 재능보다도 노력을 더 크게 인정했다.
제자는 크게 될 것이다. 더 밀리는 재능으로도 이미 첫째와 셋째에 비견되는,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다다른 녀석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부선은 인정받아 마땅했다.
그랬기에 양천은 부선에게 세심하게 알려 주지 않았다.
때로는 세심한 가르침이 제자를 망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만약 자신의 가르침이 제자 자신의 무도(武道)를 이루는 데에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았다면 벌써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다만, 네 마음에 드리워진 답답함을 지워 내는 것만큼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네?”
“누구냐? 너를 그리 번민에 휩싸이게 한 사람이.”
“……!!”
“누구냐? 너를 그리 초조하게 만든 사람이.”
“…….”
“연호정이냐?”
부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그녀는 초조했다. 초조함을 무공 성장의 원동력으로 바꿀 수 있던 지난날의 자신과는 달리, 지금은 초조함에 사로잡혀 제대로 수련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양천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연호정.
부선은 과거 자신의 스승과 무시무시한 싸움을 벌였던 연호정을 잊을 수 없었다.
‘대단했어. 정말이지 그런 고수는…….’
처음이었다.
연배? 자신보다 어린 듯했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자신보다 어리든 많든, 차세대 무림에서 부딪칠 만한 자인지 아닌지가 더 중요한 법이었다.
그렇게 봤을 때, 부선은 연호정을 넘어설 자신이 없었다.
단순히 연호정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연호정에게는 무공 외에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쩌면 영원토록 가질 수 없는 어떠한 격(格)이 있었다.
사람으로서의 품격? 아니다. 언뜻 보아도 연호정에게선 고귀함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명문가인 벽산연가의 대공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칠었다.
연호정의 격은 강자로서의 격이다.
경지에 도달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격. 그것은 무공이 될 수도, 글이 될 수도, 음악이 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은 격이, 아직 서른 살도 먹지 않은 젊은이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자, 이미 궁극의 영역을 열어 본 자다!’
놀랍게도 부선은 연호정의 현재 경지가 아니라 그가 과거에 이룩했던 극강의 영역을 미약하게나마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부선에게 특출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언제나 밑에서 위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경쟁자를 분석하고 또 분석하며, 잘 시간도 쪼개 가며 그들을 제쳤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이라는 게 있었다.
그 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평생 연호정을 넘을 수 없다는 걸.
자신이 성천급의 강자가 된다 한들, 그 누구보다도 강해진다 한들 연호정만큼은 자신보다도 한 발 앞서 있을 것 같은 불길한 확신.
그것이 바로 부선이 초조함에 휘둘리는 이유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좌절감이 그녀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충격적이었겠지.”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째와 셋째의 무서운 재능 앞에서도 꺾이지 않던 너의 열망이, 그 녀석 앞에서 꺾였구나. 그래, 이해는 한다.”
“……송구하옵니다.”
“녀석은 달라. 이 나의 눈으로 봐도 그러하다. 세상에 천재가 많다지만, 연호정 같은 놈은 달리 없을 것이다. 하물며 놈에게는 무공 이상의 두뇌와 눈치도 있다. 세상에 어찌 그런 놈이 있을 수 있는지, 가끔은 나조차도 혀를 내두르게 돼.”
“…….”
“너는 그 녀석을 넘어서고 싶은 것이냐?”
부선이 고개를 들었다.
스승을 보는 그녀의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넘고 싶습니다.”
그 짧은 한마디에, 단순히 무공으로 앞서겠다는 뜻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양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연무실을 나선 두 사람 사이엔 침묵만이 가득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이곳에 묵룡부를 세운 것은, 단순히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가고자 함이 아니다.”
“네?”
“제아무리 대단하고 비밀스러운 공간이라 해 봤자 땅굴은 땅굴이다. 묵룡부는 흑도 연맹이야. 어쩌면 사상 최초일 수도 있는 단체지. 그러한 단체가, 언제까지 이런 땅굴 속에 머물러야 한단 말이냐?”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묵룡부를 이런 곳에서 끝내지는 않을 것이다. 당당히 양지 위에 거성(巨城)을 세워, 천하제일의 세력으로 만들 것이야. 그것이 나의 여러 목표 중 하나이니라.”
부선은 내심 감격했다.
스승의 성격상, 이런 말은 대사형이나 셋째에게도 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해 줬다 한들, 스승께서 가슴 깊숙이 묻어 두고 있던 진심을 보여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크게 감격했다.
“하지만 이곳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지. 이곳은 어떠한 폭약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깊고 견고하며 거대하다. 이런 비밀스러운 곳을 그냥 두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겠느냐?”
“네.”
“하여, 이곳을 뇌옥과 취조실로 만들 계획을 짰다. 지금 진행 중인 공사는 이곳을 묵룡의 비성(秘城)으로 만들고자 함이 아니야. 뇌옥이자 취조실로 만들기 위해 여태 공사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지.”
“그렇군요.”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독특한 공간도 여럿 존재한다.”
수많은 동혈을 지난 양천이 멈춘 곳은 다른 곳에 비해 다소 붉은색이 맴도는 어느 석벽 앞이었다.
양천이 석벽 위에 손을 올려두며 말했다.
“석벽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돌과 재질이 흡사한 철문이다. 게다가 이 철에는 유상귀철(柔像鬼鐵)이라는 귀물(貴物)이 섞여 있다. 내공의 주입 정도에 따라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천하의 귀물이지.”
“네에?!”
“나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세상에는 참으로 신비로운 물건들이 많아.”
양천이 내공을 끌어 올렸다.
우우우우웅. 쿠궁.
붉은 석벽이 미세하게 줄어들었다.
“물론 귀물이라 그 양이 극히 적다. 하지만 조금 섞어서 쓰는 것만으로도 미약하게나마 크기를 조절할 수 있지.”
부선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입만 뻐끔거렸다.
내력을 주입한다고 크기가 달라지는 철이라니? 그런 귀물이 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다.
양천이 손에 힘을 주었다.
쿠구궁.
줄어든 석벽을 힘으로 미니,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밀려 나갔다.
이 석벽의 비밀을 안다고 해도, 이처럼 두껍고 큰 철문을 밀기 위해선 절정고수 이상의 내력이 필요할 것이다. 여러모로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 티가 났다.
“들어오너라.”
“네, 네!”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춘 부선이 양천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안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묵룡부의 여느 곳처럼 이곳 역시 천장에 야명주가 박혀 있었지만, 수도 적고 밝기도 수준 이하였다.
부선의 눈이 커졌다.
“이곳은 취조실과 이어진 감시방이다.”
양천이 투명한 초자(硝子, 유리)로 만들어진 한쪽 벽을 가리켰다.
그 초자벽 너머에는 두 명의 여인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곳 감시방에서는 취조실을 볼 수 있지. 그러나 취조실에서는 이쪽을 볼 수 없다. 당연히 말소리도 들리지 않아.”
“시, 신기하네요.”
“세상은 넓다. 무림을 사는 우리에게 무공의 성장이란 평생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숙제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리면 상상도 못 할 귀물과 전설 같은 일들이 판을 치고 있지.”
양천이 쾌활하게 웃었다.
음황신장을 해독한 이후, 그는 보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여유로워졌다.
“언젠가는 이쪽에서만 저쪽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개조해 볼 생각이다. 아주 선명하게. 물론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대단하세요.”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양천이 턱으로 젊은 여인을 가리켰다.
“어때 보이느냐?”
부선이 날카로운 눈으로 여인을 보았다.
목소리는 물론 상대의 기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자세와 눈빛뿐이었다.
잠시 후.
“……엄청나군요.”
부선의 얼굴이 또 한 번 충격으로 물들었다.
“저 여자, 엄청나게 강해요. 나이도 저와 별로 차이가 안 나는 것 같은데…….”
“아직 무극에는 이르지 못했지. 하지만 저 연배에 저만한 무공이라면, 십 년 뒤에는 능히 성천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
“바로 저 녀석이 차기 검후의 위(位)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녀석이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사람 좋은 눈빛은 사라지고, 천하를 제패하고자 하는 야심가의 안광이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저것들을, 검후의 힘을 손에 넣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무공이 강하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
양천이 부선을 보며 말했다.
“이 사부는 넘볼 수 없는 강자라 느꼈던 무수히 많은 실력자를 제거하고 또 제거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그 수십 년의 세월 간, 한 번도 좌절해 본 적이 없을 것 같으냐?”
“……!!”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연호정이나 저 녀석처럼. 하나, 무림은 강자가 이기는 세상이 아니다. 이기는 자가 강자로 평가받는 세상이지.”
피폐해졌던 부선의 눈에 조금씩 활력이 들어찼다.
양천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넘어서려 하지 마라. 중요한 건 이기는 것이다. 나보다 강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약점을 공략해라.”
“…….”
“네가 원하는 것이 대가(大家)가 아닌 지배자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