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44화 (443/963)

444화. 검(劍)에 실린 미래 (6)

화운은 경악했다.

“소, 소림?!”

소림사.

강호 무림 내 소림의 위치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工夫出少林). 천하의 모든 공부가 소림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세인들이 보는 소림에 대한 인상은 그 일곱 글자로 증명된다.

하지만 영역을 달리하면, 그때는 또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백도, 흑도를 가리지 않고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소림사.

그러나 중원의 불문에서 소림이 차지하는 위상은, 무림에서의 위상을 아득하게 초월한다.

저 멀리 천축국(天竺國)에서 불법을 가져와 중원에 전파했다던 달마(達磨)는, 현재 소림이 똬리를 틀고 있는 숭산 소실봉에서 구 년 면벽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선종(禪宗)을 창시했다고 한다.

불교에도 여러 지파가 있지만, 달마를 존경치 아니하는 지파는 단 한 군데도 없다. 당연히 그 달마가 수련한 곳에 세워진 소림사는 중원 불문의 성지(聖地)와도 같았다.

보타암의 검학이 제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소림에 비할 것인가.

보타암의 명성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소림에 비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소림이라는 이름이 주는 힘이다. 설령 소림보다 뛰어난 무학을 구비한 불문이 있다 한들, 언감생심 소림을 건드릴 수는 없다.

당연히 화운은, 느닷없이 등장한 소림 승려 앞에서 돌처럼 얼어붙었다.

우우우우웅.

가슴 앞에 반장(半掌)을 올려 예를 취하는 범오.

반장례는 소림 특유의 예법이었다. 달마의 제자 혜가(慧可)가 한쪽 팔을 잘라 깨달음을 얻어 외팔이가 되었으니, 소림의 반장례는 곧 혜가의 정신을 잇는 인사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방금 범오라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소승의 법명이 범오입니다.”

범오.

세상 물정은 몰라도 불문에 도는 소식만큼은 정통할 수밖에 없었다.

화운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차기 나한당주께서……?”

범오가 고개를 저었다.

“아미타불. 부족하기가 한량이 없어 아직 불법의 끄트머리도 잡지 못하고 있는 땡중입니다. 본사의 나한당주직을 맡기에는 부족함이 과하지요.”

무섭다.

정안은 범오의 평온한 어조에서 무서움을 느꼈다.

‘……이런 사람이 있다니?’

그것은 그녀가 처음 느꼈던, 범오의 말과 감정이 정확하게 일치한 데에서 느낀 비인간적 깨달음에 기인했다.

범오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한 마디, 아니 한 글자를 뱉어도 거기에 의미가 담겨 있지만, 그 의미 외에 다른 감정과 뜻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겉으로 보이는 눈빛과 목소리, 뜻하는 말 모두가 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피 묻은 칼을 들고 설치는 살인마의 흉성(凶性)보다도 훨씬 강하게 상대를 압박할 수 있는 힘이었다.

강압적이지 않게, 아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연호정이 물었다.

“스님께서 보시기에 이 두 사람은 어떻소?”

범오가 정안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화운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정안을 보던 범오가 미소를 지었다. 자애로운 미소였다.

“재주와 순후함이 남다르니, 어디를 가도 비범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구도(求道)를 실현할 지혜 또한 엿보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다만, 그 순후함이 반드시 불법에 갇혀 있으리란 법은 없지요.”

“네?”

“불법은 배운다고 터득하고, 배우지 않았다고 닿지 못하는 영역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혜검지후(慧劍之后)의 후보 되는 분의 눈은 그 순후함과는 별개로 진정 세상에 닿아 있음이니, 불법이 아닌 속세와 드잡이질을 벌인다 한들 부처의 도에서 멀어지진 않을 겝니다.”

“아…….”

“뜻이 향하는 곳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앞에 지난한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다 한들,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거친 세상이라고 어찌 각자께 불온한 모습만 보여 주겠습니까?”

“…….”

“부디 선정한 마음을 계속 가꾸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천금을 얻고 천하제일의 명성을 손에 쥔다 한들, 그 맑은 마음을 잃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범오가 고개를 숙였다.

“깨달으신 분의 앞날에 석가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가벼이 받을 만한 인사와 덕담이 아니었다. 정안은 합장하며 허리를 숙였다.

‘어렵구나.’

범오의 얘기는 여러 경전을 읽고 해석해 본 정안조차도 알쏭달쏭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듣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혼란으로 가득했던 머릿속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정안은 범오의 얘기를 곱씹었다. 한 글자도 잊지 않기 위해서, 앞으로 어려운 일을 마주하게 되면 범오의 말을 떠올리며 답을 구하기 위해서 머리에 단단히 새겨 넣었다.

그러한 모습조차도 범오가 보기에는 순했던 모양이었다. 범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글자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의지와 마음을 어찌 전부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염화시중(拈華示衆)이라 하였습니다. 그저 저의 뜻과 진심이 전해졌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아, 네!”

“그리고…….”

범오의 눈이 정안에게서 화운에게로 향했다.

움찔!

화운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은 범오가 그녀보다 강해서가 아니었다.

‘소림이 왜 여기에!?’

당황했다. 불문 최고의 성지에서 배우고 자란 승려가 이곳에 있었기에.

그리고 또 당황했다. 자신이 왜 당황하는지 몰랐기에.

‘왜? 내가 굳이 이럴 필요가…….’

그때, 범오의 목소리가 화운의 귀로 스며들었다.

“부처께서 말씀하신 윤회는 우주의 원리로, 이는 곧 생명의 순환이자 세계의 규칙과도 같습니다. 불법을 잘 모르는 분들께서는 아마 그 정도까지만 알고 계실 겝니다.”

“…….”

“하나, 이 부족한 땡중이 보기에 귀승께서 윤회를 염두에 두고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하신 건 아닌 듯합니다만.”

순간 화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렇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왜 이리 당황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잘못한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잘못을, 다른 누구도 아닌 선종의 조종이라는 소림의 승려가 보는 앞에서 저질렀기 때문이다.

남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보타의 이름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불문의 승려가 보는 앞에서 최악의 모습을 드러내 버렸다. 화운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범오가 말을 이었다.

따스함과 안락함으로 가득했던 그의 목소리가 어느새 초자처럼 투명해졌다.

“빈승은 무림의 일에 밝지 못합니다. 평생을 주먹만 휘둘러 왔을 뿐이지요. 그러나 이것 하나는 압니다. 불법에 귀의한 승(僧)의 입에서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다는 것을요.”

“버, 범오 스님. 그건 오해입니다.”

범오의 눈이 깊어졌다.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예?”

“잘못을 인정하고 바꾸어 나가는 것이 모든 용서의 지름길이요, 멀어졌던 깨달음을 당겨 오는 최고의 기회라는 걸 잊으신 겝니까?”

“……!!”

“스스로의 잘못을 명확히 인지하고 계신 듯한데, 어찌 인정치 아니하고 두려움에 떨고 계십니까?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그렇게나 어려우십니까?”

“저는……!”

“평생의 수양이 한 번의 잘못으로 무너질 수 있는 법. 또한, 무너진 수양을 한 번의 깨달음으로 되찾을 수도 있는 법.”

범오가 고개를 저었다.

“보타가 무림에 나서는 것에, 그리고 지파끼리의 갈등이 생긴 것에 빈승이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닙니다. 빈승은 지금 무너져 버린 한 사람을 보고 있으며, 그저 그 사람이 잘못을 인정하고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되찾길 바랄 뿐입니다.”

“…….”

“이만 스스로를 돌아보시지요.”

화운이 이를 악물었다.

범오의 목소리에 기이한 힘이 담겨 있음을 그녀 역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다. 범오는 깨달은 자다.

그 깨달음이 얼마나 지고한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신의 눈으로 범오라는 승려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아니, 가늠하기 힘든 수준조차도 아득히 넘어섰다.

화운은 순간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싶었다.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자신의 잘못을 빌고 싶었다. 범오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빌고 싶었다.

하지만.

‘……?!’

순간 화운의 눈에 정안이 보였다.

안타까움이 깃든 눈이, 그럼에도 너무나도 맑고 깊은 후계자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혼란으로 가득했던 화운의 눈에 다시 욕망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자신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세상을 모르는 놈들의 오만 앞에 화를 낸 것은 수양이 얕은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수양을 더 쌓으면 될 문제지, 고개를 조아려야 할 문제는 아니야!’

나아가, 수많은 악인이 약자를 죽여 놓고도 배부르게 잘만 살고 있다.

그들에 비하면 자신은 양반이다. 오히려 그런 악인들을 처단하기 위해 세상에 나오겠다고 결단을 내렸거늘, 이 문제가 이렇게나 실랑이를 겪을 일이던가?

화운의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잘못이라니요! 스님도 보셨다시피, 오만하고 무식한 자는 바로 저자입니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팔짱을 낀 연호정이 있었다.

자신을 가리키는 화운을 보고도 연호정의 얼굴은 지극히 담담했다. 마음의 동요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반면 화운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은, 마치 욕망을 형상화한 마라(魔羅)의 흉악한 그림과 닮아 있었다.

“불법을 배우지도 아니한 자가 불법을 논하며 빈승을 농락하였습니다! 알량한 명성과 직위를 가졌다고 빈승을 겁박하였습니다!”

“화 각자.”

“고작 한 지역을 다스리는 가문의 대공자 따위가, 세상의 법(法)을 구원하려는 보타의 장로인 나를……!!”

순간 범오의 안광에서 무시무시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갈(喝)!!”

쩌어어어어어어어어엉!

범오의 무지막지한 일갈은 마치 범종이 깨지는 소리와도 같았다.

순간 화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강렬한 사자후에 깃든 세존(世尊)의 기(氣)가 혼란과 악의 장막으로 뒤덮인 그녀의 눈을 뒤흔들어 버린 것이다.

“언제부터 책임이 권력과 같은 말이 되었습니까! 언제부터 직위가 권위와 같은 말이 되었습니까! 당신이 진정 수십 년간 불법을 배운 수행자란 말이오!?”

“그,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세요! 나는……!”

“마음을 바르게 보라!!”

쩌어어어어엉!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파종 소리.

화르르르르르륵!

범오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밝았지만, 동시에 보는 이의 눈에 한 점의 부담도 주지 않는 빛이었다.

깨달음의 빛, 지혜의 빛.

보타의 검후가 상징하는 혜검(慧劍), 그 자체의 광채가 범오를 후광처럼 감싸고 있었다.

화운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그녀는 범오의 몸에서 뿜어지는 저 광채를, 과거에 한 번 접해 본 적이 있었다.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

소림 무도(武道)의 각자(覺者)들만이 연성할 수 있다는 이대능력.

그중 지혜와 법안(法眼)을 상징하는 진실의 신공이 화운의 눈을 강타했다.

“아악!”

화운은 눈을 감싸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쓰러진 그녀의 두 눈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몹시 신기한 경험이었다. 혼이 달아날 듯 고통스러운데도 몹시 시원했고, 줄줄 흐르는 핏물이 눈을 가렸는데도 앞이 보이고 있었다.

사아아아아악!

화운은 자신의 몸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연성한 자도 볼 수 없는, 오직 법을 깨달은 자만이 볼 수 있는 형태 없는 무언가.

그것은 욕망이요, 혼란이었다.

엄한 눈으로 화운을 내려다보던 범오가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뜨시오. 그리고 그 뜬 눈으로 자신을 보시오.”

“…….”

“그때, 비로소 세상이 보일 것이오. 보타암은 그렇게 세상을 보며 살아오지 않았소이까.”

주르르륵.

화운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피눈물이지만, 죄를 씻어 내는 눈물처럼 보였다.

범오가 나직이 한숨을 쉬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연호정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엄지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범오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반야의 능력으로도 저 남자의 성격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