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53화 (452/963)

453화. 진실을 찾는 여정 (3)

“음?”

양천의 눈이 빛났다.

“녀석이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흐음.”

백서의 보고에 양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수행이 벌써 끝났단 말인가?”

백서가 조심스레 말했다.

“삼공자의 재능은 대공자에 필적하거나 그 이상이니, 예상보다 이르게 끝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럴 수 있지.”

양천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그럴 수는 있는데…….”

백서의 보고는 다름 아닌 양천의 셋째 제자, 전홍(全鴻)이 호남에 진입했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어릴 적부터 호승심이 강했지. 자신의 재능도 잘 알고 있었어. 하여, 첫째와 둘째를 짓누르기 위해 꽤 유치한 짓도 벌이곤 했었더랬지.”

전홍에 관한 양천의 평가는 단순하고도 확고했다.

여우인 줄 아는 곰.

그렇다고 양천 역시 셋째를 멋대로 키우지는 않았다. 그는 적어도 제자들을 키움에 있어, 언제나 나름의 공평함을 내세웠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는 건 훗날에 알았다. 제자들 역시 사람이라 성품과 재능이 천차만별이니, 각기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걸 한참 나중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물론 그걸 안 뒤에도 양천은 후회하지 않았다. 지금 키우라고 해도 똑같이 키웠을 것이다.

똑같은 태도, 똑같은 배움에도 엇나가고 망가지면 어쩔 수 없다. 어느 정도 인정받을 만한 무인이 되면, 그때 제대로 애정을 주겠다.

그것이 양천의 교육관이었다. 아득바득 기어올라 스스로 독해지고 깨우쳐야 하는 것.

흑도란 그런 세계다.

“하면, 주군께서 생각하시는 삼공자의 이른 복귀 이유는…….”

“둘째 때문이겠지.”

근래 들어 부선의 성장은 눈이 부셨다. 아직 혼란을 이겨 내진 못했지만, 그만큼의 심마(心魔)에 빠졌다는 것 자체가 둘째의 근성이 엄청나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양천은 부선을 아꼈다. 적어도 그의 기준에서 봤을 때, 이제 부선은 자신의 공부를 이을 만한 녀석이었다.

‘질투인가.’

전홍은 자신에게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스승이라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천하를 논할 만큼의 강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강자가 자신 외에 다른 사형제를 인정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질투와 분노로 눈이 뒤집혔을 만도 했다.

양천이 혀를 찼다.

‘그런 이유가 아니길 바라지만, 정녕 그 때문이라면 너 역시 크게 되긴 틀린 놈이다.’

출발점이 앞서 있다고 목표 지점도 먼저 통과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지금의 셋째가 그걸 깨달았길 바랄 뿐이었다.

“돌아오면 곧장 내게 오라고 하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음?”

백서가 조심스레 말했다.

“보타에서 온 빈객이 주군을 뵙고 싶다 합니다.”

양천이 차갑게 웃었다.

“애가 닳기는 한 모양이군.”

“다소 과격한 언행을 반복하는지라 한 차례 주의를 줄까 싶었습니다만.”

흑도는 말로 주의를 주지 않는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그들에게 말하게. 사흘 뒤에 보자고.”

“알겠습니다.”

“더 보고할 것은?”

“없습니다.”

“알았네. 이만 가 보시게. 아!”

“하문하실 것이 있으신지요?”

양천이 능글맞은 얼굴로 물었다.

“쥐에서 바위가 된 기분이 어떤가?”

뜻 모를 질문이었다. 하지만 백서는 양천의 말을 즉각 알아들었다.

백서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주군의 하해와 같은 영광 덕에 하루하루가 남다릅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성격 딱딱하기로는 누구 못지않다는 백서의 목소리에서 격동이 느껴지고 있었다.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간 나를 위해 묵묵히 달려와 준 사람에게 주는 선물치고는 지나치게 약소한 감이 있어 부끄러울 따름일세.”

“그 어인 황송한 말씀입니까. 주군이 전수해 주신 신공(神功)은 능히 천하를 엿볼 만한 절기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강철의 성벽이 되어 주군의 철옹성으로서 활약하겠나이다.”

“허허허, 사람 참.”

백서의 무공은 오랜 시간 정체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양천은 자신의 절기 중 하나를 전수한 것이다.

백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무공을 흡수하여 일신우일신하고 있었다. 양천이 보기에도 백서의 성장은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연배를 생각하면, 가히 폭발적인 성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서 무공을 연성하게. 결코 쉬운 무공이 아니니, 평생을 연마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게야.”

“감사합니다.”

넙죽 절을 올린 백서가 총총걸음으로 대전을 나섰다.

백서가 나가고 혼자가 된 양천은 태사의에 등을 묻었다.

천장을 보는 그의 눈이 한순간 싸늘해졌다.

“나 역시, 한 단계 위로 올라설 때가 되었지.”

* * *

주루 안은 몹시 왁자지껄했다.

이곳은 인화루(燐火樓)라는 독특한 이름의 주루였다. 밤만 되면 형형색색의 등을 켜 두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십여 년 전 문을 연 이래로 줄곧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물론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십 년 가까이 성행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곳 주루의 음식 맛은 호남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빼어나기로 유명했다.

“호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고기에 잡내가 하나도 없군. 딱히 향신료를 많이 쓴 것도 아닌데.”

“그렇지요?”

강량이 연호정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근방에서 요리를 가장 잘하기로 이름난 곳입니다. 저도 여기저기 다녀 봤지만, 호남에서는 인화루만 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자신 있게 추천하더니, 과연 그럴 만해.”

“입에 맞다니 다행이군요.”

강량이 정안을 힐끔 보았다.

정안은 젓가락을 든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요리 중 고기가 안 들어간 요리를 찾기 힘들었다.

“그쪽은 음식이 마음에 안 드신 모양이오?”

“네? 아, 그게 아니라…….”

연호정이 손을 흔들었다.

“불문의 사람이잖냐. 고기를 멀리하겠지.”

“그런 거요? 근데 사람이 고기를 안 먹고 어떻게 힘을 쓰오?”

정안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방년(芳年)에 이르기 전까지는 보타에서도 육식을 허용해요. 하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래도 제한하는 편이죠.”

“금하는 게 아니라 제한하는 정도면 그냥 맛나게 드시오. 사는 사람 성의도 있는데.”

“아, 네.”

성의 운운하니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안은 고기를 한 점 집어서 입에 넣었다.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정안의 동공이 무자비하게 흔들리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맛이 아주 좋지 않소?”

“엄청 맛있어요.”

목소리가 떨린다.

수행 중에 고기를 먹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유혹에 질 것 같았기 때문이리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너무 괴롭히지 마라. 사람은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른 법이야.”

“이게 뭐가 괴롭히는 겁니까? 좋은 게 있으면 권하는 게 당연하죠. 그리고 말했듯이, 이건 성의 문제입니다.”

“성의로 포장된 강요는 아니고?”

“강요라고 하기에는 정안 소저의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요?”

정안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하하하 웃고 말았다.

그렇게 일행은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광동에서 워낙 갑작스레 출발하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시간을 단축하고자 노숙에 육포나 뜯었던 며칠이었다.

그래서일까? 연호정을 제외하면 말수가 그다지 없는 일행이었지만, 분위기가 몹시 편안하고 들떠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연호정은 강량을 보고 있었다.

재미를 붙인 건지, 강량은 한창 정안을 놀리고 있었다. 그 장난이 선을 넘지 않았기에 정안 역시 부끄러워하면서도 작게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이 녀석도 이런 때가 있었지.’

강량.

흑제성 시절 오대무장 중 하나로, 철혈의 검왕(劍王)이라 불리던 최강의 검법가였다.

일각에서는 패왕(霸王)의 기질이 있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강량의 무공과 결단력은 매서웠다. 성주였던 연호정이 흑암제로서 인간 본연의 공포심을 자극하며 위엄을 뽐냈다면, 강량은 끝이 보이지 않는 강인한 인상으로 흑백 양도 모두에게 매섭다는 평가를 받았더랬다.

하지만 강량도 사람이었다. 흑제성 시절에도 사석에서는 농담도 잘하고 대화를 좋아하는, 제법 사회성이 좋은 성격이었다.

물론 삼교와의 전쟁으로 무수히 많은 수하를 잃어 가며 점차 어두워졌지만.

가만히 강량을 보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물었다.

“어떠냐?”

“예?”

“어떠냐고.”

“형님의 단점 중 하나가 뭔 줄 아십니까? 질문이 상당히 뜬금없고 난해하다는 겁니다.”

“꽤 오랜만에 돌아온 호남이다. 기분이 나쁘진 않더냐?”

부드럽던 분위기를 단박에 무너트릴 수 있는 질문이었다. 강량의 과거지사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연호정에게 눈치를 줬을 것이다.

그런 걸 떠나서, 강량 개인에게도 편안한 분위기에 건넬 질문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량의 표정은 굳어지지도, 찌푸려지지도 않았다.

“향수라는 게 이런 건가 싶습니다. 좋은데요?”

“그러냐?”

“물론입니다. 고향이잖습니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강량의 마음은 발전한 무공 이상으로 성장했다. 그걸 알았기에 그 또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강해졌구나.”

“강해지지 않으면 살기 퍽퍽한 세상 아닙니까.”

“강해져도 살기는 퍽퍽하지.”

연호정이 강량의 잔에 술을 따라 주며 말했다.

“너도 금방이야. 금방 벽을 뚫을 수 있을 거다.”

강량이 피식 웃었다.

“갑자기 덕담입니까?”

“사실을 기반으로 한 덕담이지.”

“정말 그렇게 보이십니까?”

“칭찬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는 걸 아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다. 네가 걷는 길은 틀리지 않았어. 조만간 부서진 벽 너머의 태양이 너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해 줄 거다.”

“가끔 느끼는 건데, 형님의 표현은 참 시적이에요.”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말이야.”

연호정이 정안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나?”

정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월지벽(超越之壁)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면, 정말 맞는 표현이에요.”

보타에서는 무종지벽을 초월지벽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부르든, 강량의 검학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저 더 많은 것을 챙겨 가느냐, 한 방에 벽을 뚫고 가느냐의 차이일 뿐, 강량 역시 몰라보게 성장한 것이다.

강량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진지해졌다.

“정말 그렇게 느끼십니까?”

“기실, 한계를 벗어날 준비는 진즉에 되었어.”

“그렇습니까?”

“벽을 부수는 것은 결국 너 자신이다. 한계에 도달했음에도 그 벽이 부서지지 않은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 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뭘 그리 망설이는지 모르겠다만, 뒤돌아보지 말고 거침없이 나아가라. 한계를 깨는 순간에는 협의지심도, 정의감도 잡념에 불과할 뿐이다.”

강량은 새삼 연호정의 눈빛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자신의 망설임을 한눈에 알아본다. 정말이지 이 사람 앞에서는 뭘 숨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망설임이 어떤 종류의 망설임인지는 연호정도 모를 것이다.

“조언 감사합니다. 꼭 이런 즐거운 식사 시간에 하셔야 할 말씀이었나, 싶긴 하지만요.”

“배가 불렀구먼, 이놈.”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웃으며 의자에 등을 묻던 연호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묵룡부가 나름대로 주변을 잘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현재 호남은 흑도 무림의 힘이 강성해 있었다.

한데도 주루에 건들거리는 무리가 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그 흔한 파락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강량이 고개를 저었다.

“어중간하지 않은 놈들 아닙니까? 묵룡부도, 묵룡부주도.”

정안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지.”

“됐고, 술이나 한잔하십시다. 오랜만에 마시니까 좋네요.”

“비었다. 따라 봐라.”

“예이.”

그렇게 일행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즐겁게 술을 마셨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쿵.

일 층 문이 거칠게 열리며, 순간적으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연호정과 정안, 강량의 눈이 동시에 빛을 발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