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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59화 (458/963)

459화. 진실을 찾는 여정 (9)

“네?”

부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셋째가…….”

“그래.”

양천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철저하게 당했더군. 죽지 않은 게 다행이지.”

“……!”

“단련을 게을리하진 않았더구나. 근육의 강도나 탄성, 유연함은 능히 일류라 할 만하다. 선천적으로 축기에도 재능이 있어서, 따로 영약을 취한 흔적이 없는데도 그 경지에 어울리지 않게 방대한 내공을 보유했더구나.”

“…….”

“나는 셋째에게 괴암무를 전수했다. 일류의 신체, 일류의 내공, 일류의 무공을 연성한 셋째는 훌륭한 전투원이라 할 수 있지.”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그럼에도 셋째는 당했다. 들어 보니 한순간에 승부가 갈렸다더구나. 엇비슷한 경지라 하였는데, 상대에게 유효타 하나 넣지 못하고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어. 이것이 무슨 뜻인 줄 아느냐?”

“방심을 한 것이로군요.”

“방심 이전에 정신력이 썩어 빠진 것이다. 자신보다 몇 수나 낮은 상대에게도 목이 달아날 수 있는 게 강호다. 한데도 셋째는 제 놈과 별 차이도 없는 상대의 실력을 낮추어 보았어.”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만약 전홍이 양천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이해관계에 얽힐 일도 없으니 그냥 죽었을 것이다.

즉, 전홍은 실력이 아닌 배경으로 목숨을 부지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치욕이구나.’

부선은 전홍이 깨어났을 때, 그가 얼마나 비참해할지 예상할 수 있었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네게 셋째 욕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

“전에 너도 보았을 것이다. 내가 연호정, 그놈과 비무를 벌였을 때 말이다.”

“아, 네.”

“그때, 나는 녀석의 전투 능력과 무서운 안목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실제로, 처음 몇 합에 상처까지 입었지.”

부선 역시 그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기 힘든 광경이었다.

천하의 투왕이, 자신의 스승이 한참이나 약한 상대의 공격에 상처를 입었다. 정상이 아닌 상태였다고는 해도, 무공의 격차를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알겠느냐? 나는 연호정 그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 그놈은 당시의 내 심리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리 과감하게, 또한 변칙적인 술수를 이용해서 잠시나마 날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이지.”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알겠느냐? 승부란 본인의 정신력도 중요하지만, 상대의 기분과 상황도 중요한 법이다. 만약 연호정 그놈이, 내가 진심으로 살기를 품었음을 알았다면 언감생심 붙어 보자고 배짱을 부릴 수 있었을까?”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 절대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놈이 대단한 것이다. 놈은 주먹을 들 때와 도끼를 들 때, 나아가 고개를 조아릴 때를 너무나도 잘 구분할 줄 안다.”

양천이 부선의 어깨를 토닥였다.

“제자 중, 네게 가장 먼저 흑사자기를 전해 준 것은 내가 널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흑사자기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안목과 감각이다.”

“…….”

“이것을 알려 주기 위해 들렀다. 무림인에게 무공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그 무공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

부선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감사는 무슨. 네가 겪고 있는 심마(心魔)가, 돌아보면 별것 아니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렇다.

중원 최강을 논하는 성천의 강자도 자신보다 한참 약하고 어린 사람의 장점을 보고 배우려 한다.

양천의 위상을 생각하면, 그것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한데도 그는 지난날의 자신을 반성했으며, 상대의 대단함을 인정했고, 나아가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메우려 하였다.

‘대단하시다.’

흑도 역사상 최초의 연맹을 만들어서가 아니다.

양천은 한 세력의 수장이기 전에, 천하제일을 논하는 무인이기 전에, 사람으로서 배울 것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부선이 눈을 감았다.

‘사부님조차도 배우려 하는 사람이다. 내가 뭐라고 그 사람 때문에 심마를 겪지? 애초에 나는 자격지심에 몸부림칠 이유가 없었어.’

스르르.

은연중 부선의 몸에서 발산되던 희미한 내공 진동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양천의 미소가 짙어졌다.

부선은 참으로 괜찮은 제자였다. 부족한 재능으로 이만한 경지에 오른 것도 대단했지만, 충분히 오만해질 만한데도 배움에 인색하지 않았다.

‘잘했다.’

몇 마디 가르침으로 금세 심마에서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다만, 오늘의 이 말이 제자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양천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나저나, 오늘이 보타의 망할 것들과 만나는 날이로군.”

“아, 네.”

“안타깝군. 오늘은 정말 만나 주고 싶었는데.”

고개를 젓던 양천은 문득 부선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여아 말이다. 보타 연화문의 검후 후보.”

“네.”

“생각해 보니, 네가 보타에 분란의 씨앗을 심는 동안 만나 본 적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습니다. 비단 그녀만이 아니라 후보 셋 중 누구도 본 적이 없습니다. 각 지파에서 철저하게 숨기고 교육 중이었으니까요.”

애초에 부선은 보타암의 중진으로 침투하여 내부를 교란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양천에게 보여 주는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공작에 일가견이 있었다. 자연스레 보타에 식품을 조달하는 인부 중 하나로 위장하여 내부를 뒤흔들었는데, 그 과정에서 보타의 고수들과 친분을 쌓았으나 후계자들을 본 적은 없었다.

물론 그녀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작전을 주도한 걸 보면 확실히 무공 외의 능력도 특출난 면이 있었다.

“이곳에 온 연화문의 주인과는 만나 보았느냐?”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양천이 몸을 돌렸다.

“잠시 다녀올 동안 네가 그들을 잘 달래 보거라. 내일 정오쯤 돌아올 것이다.”

부선이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 * *

밤이 깊었다.

휘영청 떠오른 달은 오늘따라 유독 밝았다. 주변 별빛마저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는데, 마치 푸르스름한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그 달빛이 비추는 후원.

웃통을 벗은 강량이 느릿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뚝. 뚝.

강량의 몸에서 떨어진 땀이 땅을 적셨다.

느리게 움직이는 검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만검(慢劍) 수련이 경지에 오른 듯, 공기의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검에선 일말의 살기도, 예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검도 느렸고, 보법 역시 느렸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서는 귀왕진기가 바쁘게 움직이며 전신의 신경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오감이 예민해지니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더 힘들어진다. 사소한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극단적인 환경에서도 강량의 검과 보법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검과 몸이 하나가 된 듯, 강량의 손에서 검을 오가는 귀왕진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완벽한 신검합일(身劍合一)이었다. 강량이 거니는 그 경지, 그 위치에서 얻어 낼 수 있는 모든 깨달음이 극치에 달해 있었다.

그럼에도 강량은 자만하지 않았다.

자신의 성취에 만족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신세계를 거니는 고수들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이었다.

무도(武道)에는 끝이 없는 법. 성천십삼좌들도 본인들의 한계에 직면했을 것이고, 그 한계를 깨부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이제 걸음마 수준에 불과하다.

기어 다니던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한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면 언제 뜀박질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

검은 느렸지만, 검 끝을 보는 강량의 눈은 환희와 떨림으로 가득했다.

‘더 위로, 더 빠르게.’

우우우웅. 우우우웅.

검명(劍鳴)이 울려 퍼졌다.

과다한 진기 운용으로 검이 떨리는 게 아니었다.

영혼의 울림. 검에 온전히 나 자신을 스며들게 한 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천재의 영역.

저 야율적조차 순수한 검명을 얻은 자는 사음교에도 많지 않다고 말했던, 바로 그와 같은 경지에 강량은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검에 모든 것을……!’

그때였다.

찌이이잉!

한껏 예민해진 신경이, 평소라면 절대 잡아내지 못했을 하나의 희미한 인기척을 잡아냈다.

훅!

강량의 몸에서 흐르던 땀이 일시에 증발해 버렸다.

스륵.

자세를 바로 한 강량은 눈을 감았다.

짙게 배어 나오는 아쉬움. 너무나도 쉽게 무종지벽을 넘을 수 있었는데, 그 깨달음의 길이 다시 깜깜해져 버렸다.

아쉬움은 집착이 되고, 집착은 번뇌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오염시킨다.

강량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다.’

서서히 목을 죄어 오던 번뇌의 불꽃이 심호흡 한 번에 사그라들었다.

‘한 번 도달했던 영역이다. 다시 도달하지 못할 리가 없어.’

강량이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오히려 수련 전보다 훨씬 더 맑고 깊어져 있었다.

스르릉.

납검한 강량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나오시지요.”

잠시 후, 하나의 그림자가 강량의 뒤에서 나타났다.

“……놀랍군.”

“…….”

“연호정이라면 모를까, 자네가 내 기척을 느낄 줄은 몰랐네. 아니, 연호정도 방금까지는 몰랐을 게야.”

강량이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양천이 있었다.

후우웅.

미지근한 여름의 바람이 두 사람의 눈을 훔치고 달아났다.

강량이 담담하게 물었다.

“수하들을 대동하고 정문으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만.”

양천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그는 한눈에 강량이 누구인지 꿰뚫어 보았다. 강량은, 과거엔 왜 눈이 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놀라운 존재감을 풍기고 있었다.

“호남 땅 전체가 나의 영역일세. 길 가다 아무나 붙잡아도 내 수하지.”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실제로 인화루 주변 곳곳에는 무수히 많은 고수가 진을 치고 있을 것이다.

강량이 피식 웃었다.

“묵룡부의 주인다우십니다.”

가만히 강량을 보던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응이 몹시 신선하군.”

“그렇습니까.”

“귀검의 후예, 맞겠지?”

“그렇습니다.”

“자네에게 있어 나는 불구대천의 원수일 터. 하물며 조금 전에는, 의도한 바는 아니었네만 무종지벽을 돌파할 뻔한 순간을 방해하기까지 했네. 무인이라면, 사람이라면 눈이 뒤집혀도 모자랄 상황 아니던가?”

강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분노와 한은 잘 쌓아 두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은 그것을 풀어 낼 때가 아님을 알고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풀어 낼 때가 아니다?”

“저를 만나러 오신 게 아니잖습니까? 형님은 최상층에 있습니다. 거기로 가시면 됩니다.”

강량의 눈빛을 살펴보던 양천이 탄식을 토해 냈다.

“타고난 천재는 제 길을 개척하는 재인(才人)을 넘볼 수 없다고들 하지. 자네, 그 연배에 어울리지 않는 공부를 쌓았구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묻고 싶네. 자네의 그 분노와 한을 풀어 낼 때는 언제인가?”

강량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부주보다 강해졌을 때. 혹은 부주가 극단적으로 약해지는 순간.”

“…….”

“저의 복수는 그때 시작입니다. 그러니 애먼 놈의 칼에 당하지 마십시오.”

한동안 말이 없던 양천이 툭 던지듯 말했다.

“자네는 위험한 사람이군.”

“그 또한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이네. 칭찬이지만, 자네에게는 사형 선고가 될 수도 있는 말이기도 하네.”

양천의 눈이 차가워졌다.

“잠깐의 대화로도 알겠네. 자네는 위험해. 언제고 내 목에 칼을 꽂을 만한 자야. 그냥 돌아서기에는, 자네의 그 칼끝이 자꾸만 아른거릴 것 같군.”

“과찬이십니다.”

“거기까지 도달하느라 고생하셨네. 잘 가시게.”

파아아앙!

양천의 주먹이 강량의 가슴을 후려쳤다.

푸화아악!

피를 토한 강량이 삼 장이나 날아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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