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진실을 찾는 여정 (10)
양천의 주먹이 허공을 갈라 다가오는 순간.
그 찰나의 순간을, 강량의 눈은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빠르다. 그리고 강해.’
공기의 벽을 뚫고 송곳처럼 쏘아지는 주먹에는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힘이 집결해 있었다.
지금의 강량으로선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경지였다. 힘의 밀도, 흐름, 공기의 기하학적 파장을 만드는 투로까지, 뭐 하나 감탄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런 주먹이 있구나.’
평범해 보이는 주먹 속에, 저처럼 복잡한 진기 운용과 힘의 흐름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강량의 눈이 깊어졌다.
놀라움은 찰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렇게 죽는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그간 익혀 온 어떤 공부로도 대응할 수 없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쌓아 왔던 노력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는 것.
‘덧없군.’
느려졌던 시간이, 다시 무서운 속도로 빨라졌다.
파아아앙!
주먹의 속도를 생각하면 공기가 폭발하는 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쿨럭!”
삼 장 밖으로 날아간 강량이 한 사발의 피를 쏟아 냈다.
‘……?!’
놀랍게도 강량은 죽지 않았다.
‘비리다?’
밤이라서 그런지, 쏟아 낸 피의 색깔이 유독 어두워 보였다.
그 피에서 올라오는 냄새 또한 몹시 비리고 독했다. 마치 중독당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강량이 양천을 올려다보았다.
양천은 뒷짐을 진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뭡니까?”
“뭐가 말인가?”
강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에 이는 둔중한 통증은 며칠 동안 지속될 것 같았다. 그렇게나 아픈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부는 이전보다 훨씬 더 깨끗해져 있었다. 강량이 토해 낸 피에, 그 자신이 인지하지 못했던 극소량의 탁기가 집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끄러미 양천을 보던 강량이 재차 물었다.
“왜 이런 호의를?”
그렇다. 이것은 호의였다.
하물며 그는 양천을 죽이겠다고 당당하게 공언한 사람이었다. 양천은 그런 사람의 몸에서 오히려 탁기를 뽑아내 준 것이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오해하지 말게. 난 날 죽이겠다는 남자를 도와줄 정도로 미치지 않았네.”
“하지만…….”
“다만, 투왕의 자존심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지.”
양천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웃는 것 같기도 했고, 찌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참으로 묘한 표정이었다.
“자네가 위험하기로서니, 어디 연호정만 하겠는가? 하물며 그 연호정조차도 성천의 강자에 비할 순 없다네. 적어도 아직은 말이지.”
“…….”
“천하에 날 죽이겠다고 날뛰는 사람의 수는 일일이 세기도 어려워. 거기에 재능 넘치는 젊은이 하나 끼어든다고 달라질 인생이 아니야.”
양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밝은 달빛은 그에게도 묘한 감흥을 주는 모양이었다. 강철처럼 단단하던 그의 눈빛이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묵룡부주로서, 자네는 반드시 죽여야 할 존재라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이 제자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 줄 인재의 성장을 막아 버린 셈이 되리란 걸 아는 투왕 양천은 아쉬워하겠지.”
양천이 다시 강량을 바라보았다.
강량의 눈은 이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원래대로 돌려놨다고 생각하게.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자네는 무종의 벽을 넘어서 신세계로 진입했을 게야. 내 비록 자네가 즉시 벽을 넘도록 해 줄 순 없지만, 발판 몇 개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다네.”
가만히 강량을 보던 양천이 주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인상적인 검무(劍舞)였네. 아직 한참 멀었지만, 적어도 엇나가진 않았더군.”
할 말 다 했다는 듯 담담하게 걸어가는 양천.
그의 뒷모습을 보며, 강량은 순간적으로 원수에게 품기 어려운 감정을 느꼈다.
‘……종사(宗師)라는 것인가.’
강량이 물었다.
“이런 말, 수도 없이 들어 봤겠지만 말입니다.”
“음?”
“후회하실 겁니다.”
양천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보란 듯이 손을 흔들었다.
“적어도 자네가 나보다 강해진다면, 그런 상대에게 패사한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걸세.”
“그렇다면 부주가 약해지는 순간을 노려야겠군요.”
“안타깝게도 내가 약해지는 순간은 오지 않을 걸세. 자네가 강해지는 게 더 빠를 게야.”
그렇게 양천은 주루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강량은 양천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강해지는 게 더 빠르다…….’
정말이지 대단한 자신감이다. 그 말은 양천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약해지지 않을 거란 뜻이니까.
하지만 그 말을 달리 해석해 보면?
‘당신은 약해지지 않겠지만, 그런 당신보다도 강해질 수 있을 거란 뜻이다.’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중요한 것은, 불구대천지수이자 강호 정점을 논하는 절대고수가 자신을 무인으로서 인정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강량에게 그리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흑도 무림인 대다수에게 있어 당신은 존경받아 마땅할 거인일 겁니다.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한 하늘을 이고 살아갈 수 없는 원수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지요.”
강량은 가슴을 매만졌다.
그는 양천의 도움을 도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맥락으로, 자신이 양천 때문에 무종지벽을 돌파하는 데에 실패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정말로 집중했다면 양천이 오든 말든, 어떻게든 무종지벽을 돌파해 냈을 것이다.
물론, 그리되었으면 양천의 반응도 달라졌겠지만.
“흐아아암!”
강량이 기지개를 켰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기분은 상쾌했다. 동시에 몹시 피곤했다.
“푹 자 둬야겠군. 젠장, 엄청 아프네. 그 양반 그거, 일부러 통증을 남겨 둔 거 아닌가 모르겠군.”
* * *
밝은 등 두 개와 초 하나를 켜 놓은 연호정은 홀로 독작하고 있었다.
끼익. 끼익.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연호정은 엎어 놓은 잔을 똑바로 세웠다.
잠시 후, 양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군.”
“그간 잘 지내셨소?”
“그럴듯한 그림이구먼. 달 밝은 밤에 홀로 독작이라…… 제법 운치를 아는가 보이.”
“좋은 술을 준비했소. 앉으시오.”
“좋지.”
휘적거리며 걸어간 양천이 연호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치 절친한 친구를 만나러 온 것처럼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표정만이 아니라 걸음걸이도, 분위기도 그러했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한숨인가?”
“그새 깨달음이라도 얻으셨소? 어째 상대하기 더 까다로워진 것 같소.”
가감 없이 솔직한 발언이었다.
양천은 그런 연호정의 눈치와 반응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제자에게 했던 말처럼, 이 녀석은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네 덕분이지. 그 망할 독을 해독한 이후로 마음에 여유가 생겼거든.”
“괜한 짓을 했소이다.”
“그 괜한 짓을 안 했다면 자네 삶이 꽤 퍽퍽해졌겠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군.”
“신소리 그만하고 잔이나 채워 보게.”
“그럽시다.”
잠시 후, 잔을 부딪친 두 사람이 깔끔하게 술을 비웠다.
“크으, 좋은 술이라고 하지 않았나?”
“마음에 안 드시오?”
“소박함이 도가 지나친 거 아닌가? 싸구려 백주가 어찌 좋은 술인가?”
“내 입맛에는 이만한 게 없던데.”
“이따위 거 자꾸 마시다 보면 속 버릴 걸세.”
“그런 걸로 버려질 속이라면 진즉 병 걸려 죽었소. 그나저나…….”
연호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째 부주답지 않은 짓을 하셨소?”
양천이 시치미를 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강량 말이오.”
양천은 괜스레 머쓱해지는 것을 느꼈다. 보타를 두고 하는 말인 줄 알았더니.
“아직 부주의 눈에 차는 녀석이 아닐 텐데.”
“내 눈에 차는 무력이었으면 이미 목이 달아났을 것일세.”
“안 되겠군. 나도 수련 시간을 늘려야겠소.”
“허허허.”
연호정이 다소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이 미래를 어찌 알 수 있겠느냐마는, 훗날 우리 사이가 절단 나는 상황이 왔을 때, 적어도 양 부주의 목은 내가 아니라 녀석의 손에 떨어질 거란 생각이 드오.”
“반대로.”
양천이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며 말했다.
“자네들 모두가 내 손에 죽을 수도 있지. 그리고 그럴 확률이 더 높다고 보네만.”
“맞는 말이오.”
“인생이 계획대로 된다면 얼마나 쉽고 편하겠는가. 하긴, 쉽고 편한 인생은 재미가 없지.”
“그 역시 맞는 말이오.”
두 사람이 다시 잔을 비웠다.
백주의 독한 맛에 인상을 한껏 찌푸리던 양천이 한숨 쉬듯 말했다.
“보내 준 선물은 잘 받았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난 포장만 했소.”
“아네. 자네 손에 걸렸으면 뼈마디가 다 작살나서 왔겠지.”
“차라리 그게 나았을 수도 있소. 무인에게 팔 하나가 잘린 건 치명적이오.”
“팔 하나를 버리고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오히려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다리 한 짝이라면 몰라도 말이야.”
진심이군.
연호정은 깨달았다. 지금 양천의 말은 진심이라고.
“애지중지할 재목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소만.”
“나는 제자들을 대함에 있어 몹시 평등하다네. 평등한 교육, 평등한 대우를 중시하지. 다만, 거기서 제대로 기어 올라온 녀석들에게는 아낌없이 준다네.”
“둘째 제자처럼 말이오?”
“그렇지.”
일순 양천의 눈이 서늘해졌다.
“다만, 멍청하고 버릇이 없더라도 내 제자일세. 전홍이라는 이름 앞에 ‘투왕의 제자’라는 호칭은 사라지지 않았어.”
“다행이구려. 덕분에 죽지 않았으니.”
“멸문한 귀검의 후예가 묵룡부의 삼공자를 압도하고 개망신을 줬네. 이게 얼마나 골치 아픈 문제인지 자네도 모르지 않을 거라 보네.”
“그래서 다행이라 하지 않소.”
“차라리 죽였다면 관대하게 용서하는 그림이라도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진심이오?”
서늘한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던 양천이, 이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 정도 협박으로는 꿈쩍도 안 하는군.”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면 강량이 살아남지 못했겠지.”
“새삼 또 감탄하게 되는군. 자네는 정말이지 통찰력이 좋아.”
가만히 웃던 연호정이 다시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어찌 되었든 부주 제자 쪽에서 먼저 시비를 걸었으니, 이 일은 없는 셈으로 칩시다.”
“그러지.”
두 사람이 또다시 잔을 비웠다.
그렇게 세 번의 잔이 비워지자, 얘기가 본론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왜 부주를 초대했는지, 그 이유는 아시리라 믿소.”
“장난으로 떠보는 시간은 지났나?”
“지났소.”
“그렇다면 인정하지. 맞네, 자네가 날 왜 이 자리에 초대했는지 잘 알고 있어.”
연호정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그 순간 양천은 느꼈다. 광동의 일을 마무리 짓고 온 지금의 연호정은, 과거에 봤을 때보다 또 한 단계 성장했다는 것을.
깨달음이나 내공 이전에, 무언가가 바뀌었음을 직감했다.
“보타암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 부주 맞소?”
양천은 쾌활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인정했다.
“그보다 더 확실한 사실은 없지.”
“묵룡부주로서, 보타암의 검후가 눈엣가시라는 건 잘 알고 있소.”
“……알고 있었군.”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
“미안하지만 그 전에 하나 묻도록 하지.”
“말씀하시오.”
양천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사음교를 박살 내기 위해, 자네는 무엇까지 할 수 있나?”
“……?!”
“자네의 모든 것을 내던질 준비가 되었나?”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