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어둠을 얻다 (1)
참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질문이었다.
사음교를 박살 내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느냐?
‘물론이지.’
과거의 연호정이었다면 뜸 들일 것도 없이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 사음교는, 다른 의미로 불구대천의 원수다.
지금은 다르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화를 내지 마라?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미 사음교를 위시한 삼교가 중원을 넘보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위험에 빠진 사람 중에는 가족도 있었다.
기실, 연호정뿐만 아니라 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참전한 모두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들을 날려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물며 과거의 회한과 분노를 가득 안고 있는 연호정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사음교를 멸망시키기 위해, 삼교를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 그 각오와 목적의식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주가 하는 질문의 영역이 너무나도 넓어서, 쉽게 대답을 드리지 못하겠소.”
양천의 눈이 빛났다.
“의외로군. 자네는, 어쩌면 나 이상으로 그들을 증오하는 줄 알았는데.”
“분명한 사실이지. 굳이 부주만이 아니오. 중원의 어떤 사람도 그들을 향한 증오와 혐오가 나보다 깊지 않을 것이오.”
“그처럼 증오하고 혐오하는 대상의 힘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하군.”
“맞는 말이오.”
“그렇다면 응당 모든 것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텐데, 어째 자네의 미적지근한 대답을 듣자 하니 그건 아닌 모양이군?”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 한 몸 불사를 각오야 되어 있소만, 굳이 선을 넘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선을 넘고 싶지 않다…….”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도 그랬지. 선을 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정작 자네 자신도 그 선이라는 개념이 모호하다고 했지.”
“지금도 마찬가지오. 아직 나는 그 선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했소. 하지만 대충 느낌은 알겠더군.”
“느낌이라…….”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내 부친께서는, 못난 아들내미가 괴물을 잡다가 비슷한 괴물이 되지 않기를 바라시오.”
양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자네는 이미 일가를 이루었어. 무공이든 정신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칭찬 고맙소.”
“부모와 스승의 가르침은 자식의 상태를 가리지 않지. 하나, 자네가 부친의 가르침에 그리도 신경을 쓰는지는 몰랐네.”
“생각의 차이라면 참고만 할 뿐, 굳이 나의 주관을 바꾸진 않을 거요.”
“한데?”
“……아마 나 스스로 찝찝했던 모양이오. 점점 놈들과 똑같아지는 내 모습이.”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연호정의 극단적인 증오는, 그들을 물리치면 물리칠수록 그를 삼교 이상의 괴물이 되게 했지, 그들과 똑같이 만들진 않았다.
그래서 문제였다. 차라리 똑같아지는 정도라면, 스스로를 망치다 종국에는 파멸하게 되는 정도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연호정은 확신했다. 자신이 그 추상적이고 모호하기 그지없는 ‘선’이라는 개념을 버리게 되면, 훗날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의 재앙이 될 것임을.
그것은 그의 능력 문제가 아니었다.
당대 무림에서 연호정이라는 인물이 자아내는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그의 말 한마디가 얼마만큼의 파급력을 갖는지, 그가 작정하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가 문제였다.
연호정의 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아닌 말로, 그가 지금까지 쌓아 온 신뢰를 기반으로 황궁을 공격하자고 하면, 그리고 그 밑 준비를 철저하게 할 수 있다면, 적어도 무림맹은 황궁과 일전을 벌일 수도 있다.
지나친 해석이다? 그렇지 않다.
부선은 고작 삼 년 만에 보타암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 부선보다 모든 부문에서 역량이 뛰어난 연호정이라면, 천하를 뒤흔드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힘, 현재 자신의 위상과 영향력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 그였기에.
그래서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선택이 낳은 결과가 어떤 후폭풍을 일으킬지를 알기에, 나 하나가 망가지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 미래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에.
착잡해진 연호정의 얼굴을 보며, 양천이 물었다.
“한마디 해도 되겠는가?”
“그러시오.”
“자네는 자존감이 지나치다 못해 오만해지기까지 했구먼.”
“…….”
“자네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지 않네. 놈들을 향한 자네의 감정이 마모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네가 너무 오만해진 것 같다는 것일세.”
“그리 보이시오?”
“자네가 대단한 인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야. 그러나, 자네 하나가 괴물이 된다고 해서 휘둘릴 만큼 중원 무림이 만만해 보였던가?”
“……!”
이런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양천이 다소 불쾌해진 얼굴로 말했다.
“내, 그간 자네를 죽일 기회가 많았음에도 자네를 살려 둔 것은 여러 가지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하며, 자네라는 사람 자체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하네. 하지만 분명한 건, 내가 자네를 죽이겠다 마음먹으면 자네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어.”
“…….”
“어디 나뿐인가? 다른 성천의 강자들도 그러할 것이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무수히 많은 은거기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힘이 있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연배, 그 위상을 생각하면 그 정도 오만을 떠는 거야 흠도 아니지. 하지만 자네는 자네 외의 사람들을 지나치게 불신하는 거 아닌가?”
“불신이 아니오.”
“불신이 아니면 더더욱 오만한 것이로군.”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충격적인 자아 성찰을, 이렇게 부드럽게 당하기도 쉽지 않겠소이다.”
“인정하는가?”
“아직 모르겠소. 다만, 부주의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소. 하긴, 오만하지 않으면 이따위 생각도 들지 않았겠지.”
양천의 눈빛이 묘해졌다.
‘역시 이놈은…….’
충분히 높게 올라왔음에도, 분명한 아군이 아닌 대상의 꾸짖음에도 그 말을 듣고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안다.
‘이것 참.’
처음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오만함이 느껴지는 말을 하는 걸 보고는 이놈도 슬슬 퇴색되는가 싶었다.
한데 또 이런 모습을 보니, 오히려 연호정의 다른 일면이 보이는 듯했다.
‘그래, 이놈도 날 때부터 그런 놈은 아니었던 것이지.’
신기(神技)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안목, 연배에 도통 어울리지 않는 초고수의 무공, 거기에 살벌하기 그지없는 육감까지.
말 그대로, 날 때부터 그런 능력을 갖추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분명 연호정 이놈도 지금의 이 모습이 되기까지 뼈를 깎는 노력과 고통을 견뎌 냈을 것이다.
‘그래도 폄하하기 어렵지, 저런 열린 모습은.’
사소한 문제 하나로 자존심이 상해 칼부림이 나는 세상이다. 적어도 그런 면에 있어서, 연호정은 충분히 괜찮은 성품을 갖고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뭐가 되었든, 내 싸움의 종착역은 분명하오. 다만 그 싸움을 위해서 가족을 팔거나 최소한의 도덕을 무시하는 일은 최대한 배제할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한데 그 질문은 왜 한 거요?”
“그냥 듣고 싶었네. 이제 자네가 질문하게.”
가만히 양천의 신색을 살피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부주께서 원하는 것이 설마, 보타를 대리전쟁으로 한 삼파전이오?”
양천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자네, 거기까지 꿰뚫었나?”
“하나는 묵룡, 하나는 무림맹. 그렇다면 하나가 남는데, 설마하니 그 하나가…….”
“사음.”
“…….”
“자네의 통찰력은, 이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날 놀라게 만드는군.”
양천이 깍지를 꼈다.
본격적인 얘기를 시작해 보자는 뜻이었다.
“그렇다네. 나는 보타의 전쟁에 사음을 끌어들이고 싶네.”
연호정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 일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가를 떠나, 썩 바람직하지 않은 짓이라는 건 부주께서도 알고 계실 거요.”
“왜? 자네가 말한 선을 넘은 계책 같은가?”
“…….”
“미안하네만 난 그리 생각하지 않네. 설령 선을 넘었다 해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 어차피 보타암은 본부와 양립하기 어려운 사이야. 선공을 가해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나아가 보타를 대리전으로 사음에 한 방 먹여 준다.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네.”
“당신 말이 맞소.”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그 계획이, 당신에게 잘못된 것은 아닐 거요. 문제는…….”
“문제는?”
“부주께서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는 것이오.”
양천이 눈을 빛냈다.
“삼가 세이경청 하겠네.”
“보타암은 불문이오. 그리고 중원 불문은, 계파가 달라도 대부분 하나로 이어져 있소. 당장 보타와 소림만 해도 그 관계가 나쁘지 않은 편이오.”
“흐음.”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불문은 그 즉시 일어나 묵룡부를 물어뜯기 시작할 거요. 소림 역시 동참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소.”
“그렇겠지.”
“그리되면, 부주의 돌발 행동으로 삼교를 몰아낼 전력이 일시지간 줄어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소이다.”
연호정의 눈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
“아시겠소? 부주가 사음교를 얼마나 증오하는지는 알고 있소만, 그 증오심과 복수심 때문에 삼교 전체를 상대해야 할 무림의 전력이 떨어졌다는 것이오.”
“…….”
“끝장을 내고 싶었다면 전쟁이 끝난 뒤에 내지 그러셨소?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패퇴했다? 그럼 결국 아무 의미가 없는 다툼 아니오? 한데 어찌 섣불리 보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소?”
대국적으로 봤을 때, 양천의 행동은 분명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양천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보타를 공격한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간질을 했고, 결국 그 이간질에 휘둘릴 만큼 보타승들의 수행이 부족했다고 말할 셈이라면 집어치우시오. 본말전도요.”
“…….”
“부주는, 보타를 건드리면 안 되었소.”
양천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이 지경이 되어 버렸거늘.”
“수습을 해야겠지. 하지만 묵룡부 측에서 보타를 무너트리는 데에 힘을 썼다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을 것이오.”
“그건 좀 섭섭하군.”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숨길 수 없는 사안이오. 숨겨서는 안 되기도 하고.”
“걱정하지 말게. 일을 치를 때부터 그 책임을 지는 것 정도는 감수하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오.”
“문제는, 내가 보타를 수습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
“…….”
자신을 빤히 노려보는 연호정을 보면서도 양천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내 손을 떠났다네.”
“……?!”
“…….”
“설마?”
“자네 생각이 맞네.”
양천의 얼굴에 음험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타의 지파 중 마지막 하나, 천이문(天耳門) 측에서 사음교 쪽으로 사람을 보냈네. 천안문 쪽이 자네에게 갔듯, 연화문 쪽이 우리에게 왔듯 말이야.”
“이런 빌어먹을…….”
“어쩌겠나? 이미 일은 벌어졌고 수습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본래대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양천이 잔을 들며 심술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네도 궁금하지 않나? 사음교에서 어찌 나올지 말이야. 잘만 하면, 사음교의 전력과 내부 상황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