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밑 준비 (5)
촤르르르륵!
허공을 가르는 교룡쇄의 움직임은 몹시 부드럽고도 장엄했다.
연결된 쇠사슬끼리 부딪치는 소리마저도 청아하기 그지없었다. 달리 들으면 마치 단단한 용의 비늘이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끝에 달린 백룡부는 용의 이빨처럼 번뜩이며 공기를 물어뜯고 있었다.
연호정이 손목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촤르륵! 촤르르르륵!
백룡부와 연결된 교룡쇄, 백룡쇄(白龍鎖)가 주인의 뜻에 따라 꿈틀거리며 연신 좌우로 움직였다.
마치 생명이라도 깃든 듯했다. 살아 움직이는 용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포효를 토하는 백룡쇄의 모습은 웅장하기까지 했다.
한참이나 백룡쇄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스르륵.
가볍게 팔을 끌어당기자 교룡쇄의 길이가 줄어들며 그의 손에 백룡부가 잡혔다.
연호정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랜만이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하는 연호정의 얼굴엔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것저것 일 처리 좀 하느라 바빠서 말이야. 안 그래도 오늘 찾아가…….”
퍽!
“컥!”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연호정이 외마디 신음을 토해 냈다.
“안 그래도?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 망할 놈이.”
연호정이 뒤통수를 문지르며 황당하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제갈아연이 있었다.
“미쳤어? 지금 내 뒤통수 쳤냐?”
“그러면 안 돼?”
“이것 봐라?”
“이것? 공손한 말투는 시장에다 팔아 드셨어? 어디 누님한테 확 죽을라고.”
어째 안 본 사이에 말투가 꽤 험해진 것 같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도 내가 네 상관인데.”
“어쩌라고? 상관 대우 해 줘?”
“해 줘.”
“좋지요. 그렇게 처해 드릴게요, 대수님.”
“…….”
“뭐가 불만이시길래 그렇게 눈깔을 빤히 뜨고 쳐다보십니까?”
연호정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혹시 내가 뭐 잘못했나?”
“아, 모르십니까? 근데 제가 그걸 설명해 드릴 이유가 있습니까?”
“…….”
“왜요.”
“살이 좀 빠졌는데?”
“이 새끼가.”
제갈아연이 연호정의 머리를 마구 내리쳤다.
그냥 맞아 주고 싶진 않고, 피하면 진짜 삐질 것 같아서 연호정은 팔을 구부려 머리를 막았다.
둔탁한 소리가 연무장에 퍼졌다.
우우웅! 퍽! 퍽!
연호정의 눈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휘두르는 손에 묵직한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내공을 운용하는 것이다.
“야! 그만해! 적당히 하라고!”
“적당히 하는 중이다, 이 새끼야!”
“아, 빌어먹을! 뭐가 문젠데!”
“설명해 줄 이유 없다고 방금 말했다!”
“아오, 진짜!”
파앙!
연호정이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제갈아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쭈? 이제는 연약한 군사 앞에서 무공도 쓰네?”
“연약은 개뿔.”
제갈아연은 장법에 능했다. 그냥 참고 맞아 주기에는 너무 아팠다.
게다가 주변에 워낙 천재들이 넘쳐서 그렇지, 그녀의 무공 역시 젊은 층에서는 최고급 수준이다. 방금도 내공을 조금만 더 실었으면 뇌진탕까지 걸릴 뻔했다.
연호정이 얼굴을 굳혔다.
“상관 폭행은 중죄다.”
“오호라? 이젠 형법으로 조져 보시겠다? 똑똑하다 이거야?”
“야, 인마. 그게 아니라…….”
“중죄라…… 중죄 좋지. 이왕 뇌옥에 갇힐 거 폭행 말고 살인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진정해. 진정하고, 말로 풀자. 대체 뭐가 문제냐?”
순간 제갈아연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저것보다 열 배는 더 독한 살기가 난무하는 현장에서 날뛰던 그였지만, 친분 있는 사람이 보내는 살기는 농도에 상관없이 살벌했다.
괜히 눈치가 보인 연호정은 무릎을 조금만 유연히 해 보기로 했다.
“야야, 진짜 모른다니까.”
“알아, 모르는 거. 그러니까 좀 더 맞아야지?”
“그건 사양이다. 그나저나 무공이 많이 늘었는데? 바쁜 와중에도 수련을 열심히 한 모양이야.”
“혓바닥에 기름칠을 잔뜩 했네? 응? 너답지 않게 말이야.”
“솔직한 평가야.”
“지금 내 무공 평가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게 문제겠지?”
“아니, 대체…….”
“바쁜 와중에도 수련을 열심히 한 모양이라고? 내가 바빴다는 걸 알고는 있었나 봐?”
대체 왜 자꾸 이러는 거지?
연호정은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가 아는 제갈아연은 조금 짓궂긴 해도 이 정도로 무례한 장난을 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제갈아연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거 뭐 고민까지 해? 그 동글동글한 머리통 딱 대. 맞다 보면 생각나지 않겠어?”
“그건 사양이라니까. 애초에 네가 그렇게 화날 일이…….”
순간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화날 일이…….”
잠깐, 생각해 보니까.
“……음, 있는 것 같군.”
이죽거림 가득했던 제갈아연의 얼굴이 한순간 무표정해졌다.
그야말로 살벌한 얼굴이다. 차라리 쌍심지를 켜고 욕이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지금 이 얼굴은 숫제 귀신의 그것이다.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혹시 아직까지 진법을……?”
“죽어!”
파아아아앙!
그녀의 손에서 제갈세가의 비기, 대천성장법(大天星掌法)이 폭발했다.
연호정은 어마뜨거라 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장법을 피했다.
“야! 일단 진정해!”
“진정? 진정을 하게 생겼어, 지금!”
퍼엉! 퍼어어엉!
허공에서 연신 북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소리는 북이 펑펑 터지는 듯했지만, 위력은 아름드리나무도 쓰러질 정도였다.
제아무리 연호정이라도 맨몸으로 맞았다간 성치 못할 위력이었다. 그렇다고 신단을 개방하며 사신기를 꺼내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제갈아연의 눈이 진짜로 돌아갈 테니까.
“잠깐!”
파아악!
연호정이 제갈아연의 양 팔목을 잡았다.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연호정은 순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코앞에 보이는 제갈아연의 눈이 광기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두 눈에 핏발이 잔뜩 섰다. 화가 나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매일 잠도 못 자고 진법 연구에 힘쓴 탓에 눈에 무리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런 미친!’
제갈아연의 팔목을 붙잡은 연호정의 손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괴력이다.
제갈아연의 무공으로는 상상도 못 할 힘을 내고 있었다. 살기든 증오든 분노든, 인간의 정신력이 극한까지 발휘되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낼 수 있는지를 제갈아연이 증명하고 있었다.
결국 연호정은 판단을 내렸다.
‘비, 빌어먹을.’
연호정이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날 용서해라!”
“용서는 뭔……!”
퍽!
제갈아연의 눈이 휙 돌아갔다. 힘을 잃은 그녀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연호정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재빨리 혼혈만 짚으려고 했는데, 손을 떼는 순간 허공을 친 제갈아연의 손에서 발경이 터질 기미까지 보였다.
결국 저도 모르게 목뒤를 쳐 기절시키고야 말았다. 일종의 본능이었다.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채 쓰러진 제갈아연의 얼굴은 어지간한 귀신도 놀라 자빠질 정도로 살벌해 보였다.
“……머리가 좀 식을까?”
아니면 날 원수라고 생각할까.
* * *
“후우, 이제 좀 열이 식는 것 같네.”
반 시진쯤 평상에 쓰러져 있다가 눈을 뜬 제갈아연은 기지개까지 쭉쭉 켜며 몸을 일으켰다.
한쪽 벽에 팔짱을 끼고 선 연호정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갈아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한숨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이전과 같은 광기는 없었다.
“…….”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제갈아연이었다.
“사과 안 하냐?”
“미안하다.”
연호정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서신을 보냈어야 했는데, 현장 일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바람에 시간을 따로 내지 못했다. 물론 네가 주는 서신도 받았지. 바로 답장을 보냈어야 했는데, 하필 또 그럴 때마다 별의별 망할 놈들이 사고란 사고는 다 쳐 대는 통에 도무지…….”
제갈아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끼고 있던 팔짱도 풀고 주저리주저리 변명하는 모습을 보니, 치솟던 화가 축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됐어. 그만해.”
“……하여간 만호 이놈 자식이 좀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줬…… 응?”
“그만하라고. 그리고 만호는 왜 운운해? 잘못도 없는 애를.”
연호정이 멋쩍게 웃었다.
“그냥 만만한 사람이 딱 걔가 떠올라서…….”
“대수 실격이네. 어디 자기 책임을 부하한테 돌려?”
“그 정도는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시끄럽고, 따라와.”
“어디 가게?”
“…….”
“아, 물론 그래야지. 가야지. 봐야지.”
연호정은 그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며 제갈아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제갈아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치워. 무거워.”
연호정이 입맛을 다시며 손을 내렸다. 진정된 줄 알았는데, 아직 상당히 날카롭다.
제갈아연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하여튼 말이야. 사람한테 일을 시켰으면 어느 정도 진행이 됐는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알려 줘야 할 거 아냐. 아무리 바빴다지만 정말…….”
그녀가 연신 투덜거렸다.
그리고 연호정은 그녀의 투덜거림을 묵묵히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출맹 전, 연호정이 제갈아연에게 주문한 것은 몇 개의 진법을 할 수 있는 대로 개량해 달라는 것이었다.
작게는 멸사군과 탕마군의 진법부터, 크게는 무림맹 전 지역에 둘러칠 수 있는 기관진식까지.
한 사람에게 한 부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막막한 주문이었다. 하지만 제갈아연은 그것들을 지금까지 파헤치며 만들고 있었다.
문제는 의사소통의 단절에 있었다.
연호정은 의정군이 출정할 때 제갈아연에게 얼굴 한번 비추지 않고 떠났다. 사적인 친분 외에, 상관으로서 명확한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떠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였다. 특히 제갈아연의 성격상 한번 맡은 일을 중간에서 그만두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든 끝을 보려는 그녀의 성격에 단절된 의사소통이 더해지면서, 제갈아연의 분노가 하늘까지 치솟은 것이다.
끝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모르는 달리기를 지금까지 해 왔던 것. 어지간한 사람은 중간에 포기했거나, 정신이 피폐해져서 눈이 돌아갔을 것이다.
제갈아연의 정신력이 돋보이는 대목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건 아니지만.
“다음부터는 말 좀 해.”
“그래.”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무림맹 총군사의 딸이기 전에 멸사군의 군사야. 나 역시 나름대로 멸사군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연호정은 정말이지 면목이 없었다.
“미안하다.”
제갈아연이 이렇게 화가 난 것은 단순히 힘들어서만은 아니었다.
소외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호정은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지. 이건 약속이다.”
바빴다는 핑계는 핑계일 수가 없다.
바쁠수록, 정신이 없을수록 챙겨야 할 건 확실히 챙겨야 하는 법이다. 무수히 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그러한 실책으로 인해 파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연호정은, 이번 잘못으로 인해 크게 깨달았다.
‘난 이미 그 정도 위치에 올라선 거다.’
양천은 그를 두고, 당대 무림맹 정치의 핵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것은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연호정 스스로는 부정하지만, 실제로 그의 말 한마디와 의지만으로도 무림맹이 요동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럴 때일수록, 제 사람을 더더욱 잘 챙겨야만 했다.
다소 엄숙해진 연호정의 얼굴을 보며, 제갈아연의 표정이 풀어졌다.
“좋아. 그간의 울분은 이만 풀도록 할게.”
그래도 시원시원한 성격의 그녀다. 제갈아연은 광기에 이르도록 치솟던 분노를 말끔하게 정리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보여 줄 건 뭐지? 멸사군 진법의 개량인가? 아니면 탕마군? 그도 아니면 무림맹 전역에 설치할 기관진식인가?”
“아니, 그런 것들은 나중에 봐도 되고.”
제갈아연이 얼굴을 굳혔다.
“신화교 무장들과 싸웠던 때, 기억나?”
“기억나지.”
“그곳에 진법을 두르려 했었잖아, 지형도 볼 겸.”
“그랬지.”
“그 일대를 조사하면서 알아낸 거야. 말하자면, 신화교가 가진 진법의 기본 축이라고나 할까.”
연호정의 안광이 번뜩였다.
“제일 먼저 봐야 할 것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