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81화 (480/963)

481화. 밑 준비 (6)

“자, 이 부분을 봐.”

집중해야 할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연호정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종횡의 길이가 일 장에 달하는 거대한 세부 지도였다. 그 지도엔 그가 십이무장과 싸웠던 지역, 그리고 당관이 오호무장과 싸웠던 지역이 모두 들어가 있었다.

감탄스러운 것은 칼 같은 거리감과 세밀함이었다. 지도 전문가가 만들었다 해도 믿을 만큼 대단히 정밀한 지도였다.

“네가 그린 거냐?”

“그럼 이 미친 짓을 누가 도와주겠어?”

“굉장하군.”

“됐고, 일단 봐 봐.”

제갈아연이 진지한 얼굴로 지도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신화교는 대범하게도 무림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보 거점을 세웠어. 지형이 지형인지라 알아채기도 쉽지 않고, 마을과 얼마 떨어지지 않아서 주변 정보를 얻기에도 용이한 곳이었지.”

“그랬지.”

“하지만 놈들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 이곳을 택한 게 아니었어.”

제갈아연이 투명한 기름지 하나를 가져왔다.

그곳에는 복잡한 도형이 세필(洗筆)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건 본가에서 자주 쓰는 진법축 중 하나인 팔진무량도(八陣無量圖)야. 팔괘(八卦)를 틀로, 그 안에 사상(四象)의 축을, 사상 안에는 음양(陰陽)의 생사로(生死路)를 구축한 기본진이지.”

말이 기본진이지, 진법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 없는 연호정의 눈에는 너무나도 복잡해 보이는 도형이었다.

“이 기름지에 팔진무량도를 그린 건, 지도에 대 보기 위해서야.”

제갈아연이 팔진무량도의 도형을 지도 위에 가져다 댔다.

중심은 신화교가 정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자, 이렇게 보니 어때?”

“생사로가……?”

“역시 감이 좋구나, 너? 맞아. 팔방을 팔괘로 잡았을 때, 네가 십이무장과 격전을 벌이던 곳은 손방(巽方) 쪽이지. 뒤틀린 사상으로 소양(少陽)이 자리를 잡았고, 그곳은 곧 음양으로 봤을 때 음(陰)인 사로(死路)에 속하지.”

“말 그대로 너 죽고 나 죽자는 곳에서 싸웠군.”

“맞아. 그리고 연가주님과 후개는 생로에서 사로로 들어온 셈이지.”

“한데…….”

“이상하지? 지도상으로도 그렇고, 네 기억상으로도 네가 싸웠던 지역은 사로(死路)라고 보기 어려울 거야.”

연호정도 동감했다.

십이무장 규적과 생사대전을 벌였던 곳은 주변 환경을 봤을 때 결코 사로가 될 수 없다. 그저 날이 건조하고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열양공(熱陽功)을 익힌 규적에게 유리했을 뿐, 제아무리 진법도를 짜 맞춘다 한들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사지라고 보기 힘들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법축의 차이인가? 그러니까 내 말은, 너희 가문의 팔진무량도를 댔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절대 그렇지 않아. 팔진무량도를 어떤 식으로 개조해도 그 지역은 생로가 될 수 없어.”

“하지만 그곳은 사로가 아니었잖아?”

“그래서 문제인 거야.”

제갈아연의 눈이 깊어졌다.

“팔진무량도만이 아니야. 본가의 어떤 진법축을 가져다 대도 저곳은 생로가 되기 힘들어.”

“제갈가의 진법이라서 그런 건 아닌가? 너희와 다른 눈으로 수식을 푸는 진법가라면…….”

“감히 자신하는데, 본가의 진법 수식이 천하제일이라 단언할 순 없어도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수식을 포용하고 있는 건 분명해. 아닌 말로, 사파나 마도 진법가들의 진식 원리까지 풀 수 있는 곳은 본가 외엔 전무할 거야.”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이상하긴 이상하다.

골똘히 고민하는 연호정을 보며, 제갈아연이 다른 기름지를 가져왔다.

“자, 이제 이것을 대 볼까?”

“그건 뭐지?”

“무극(無極)부터 구궁(九宮)까지, 모든 방위를 아우르는 십전도(十全圖)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일단 봐.”

십전도가 그려진 기름지가 지도 위에 올라왔다.

연호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때?”

“그래도 사로인데?”

“그렇지?”

“신기한걸? 사로는 사로인데, 그것만 빠져나가면 생로가 돼.”

“……?!”

“삼재, 사상, 오행, 육합의 수순으로 정확하게 이어져 있잖아?”

“오호?”

“아니야? 음양의 음로라서 사로이긴 한데, 그 뒤로는 삼재의 인로, 사상의 태양로, 오행의 목로, 육합의 동로인데? 이건 생로 아닌가?”

제갈아연이 입맛을 다셨다.

“나중에 시간 날 때 나한테 진법 좀 배워 볼래? 너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시간이 난다면 말이지.”

“네 말이 맞아. 결과적으로 그곳은 생로야. 문제는, 전투 양상을 들어 봤을 때 그 십이무장이라는 자가 저곳을 주요 전투지로 잡았던 게 이상하다는 거지.”

“날이 건조했고, 주변에 나무가 많으니까. 비단 그곳만이 아니야. 정보 거점 자체가 그랬어.”

“그래도 그곳이 사로인 건 변함이 없어. 이유는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강가.”

“역시 똑똑하군.”

신화교의 교인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열양공을 익혔다.

열양공의 중심은 불, 화(火)이고, 화는 물, 수(水)에 약하다. 수극화(水克火), 물은 불을 이기기 마련이다.

물론 신화교의 무장급 고수라면 어지간한 수력(水力)도 화력으로 날려 버릴 수 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저 지역을 싸움터로 정한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규적은 전장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충분했고, 굳이 그곳이 아니더라도 날이 건조하여 열양공을 익힌 그에게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당가주님과 오호무장이 싸웠던 곳도 생로로 탈출하여 사로로 돌아가는 소음(少陰)의 길목이지.”

잠시 침음한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전부 우연일 가능성도 있어. 수식을 푸는 사람의 눈으로는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싸움이란 것은 본디…….”

“알아, 나도. 문제는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다는 거야.”

제갈아연이 또 다른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건 일호무장 번작이 있던 곳, 그러니까 무림맹 고수들과 신화교의 무장들이 생사결을 벌였던 장소야. 이건 그리 상세하지 않으니까 감안하고.”

지도를 보고, 또 팔진무량도와 십전도를 겹친 것까지 본 연호정의 얼굴은 굳을 대로 굳어져 있었다.

“이거, 진짜 이상하군.”

“그렇지?”

“혹시 이 건물, 설계도 같은 게 있나?”

“없어. 있을 리가 없잖아.”

연호정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싸움, 그때 무장들의 움직임을 복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연호정이 두뇌가 뛰어나더라도 몇 달 전에 있었던 싸움이었고, 심지어 그 뒤로도 온갖 일이 터지는 통에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만, 몇 가지는 기억했다.

목숨을 걸고 한 싸움, 회귀한 이후 손에 꼽힐 만큼 위험했던 전투라 순간순간의 기억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어때? 기억이 나?”

“안 나. 하지만…….”

다시 눈을 뜬 연호정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가득했다.

“무장 개인의 움직임, 그리고 전체적인 전략도 자체가 하나의 틀로 이뤄졌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데?”

“확실해?”

“확실한 건 아니야. 그냥 느낌이야.”

“느낌이지만, 위화감이 들 정도는 된다는 것이로군.”

제갈아연이 지도를 전부 치워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더라고. 정보 거점을 무림맹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세워? 대담하지.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지만, 그걸 실제로 써먹는 걸 보면 신화교 놈들의 대담성은 찬사를 받아 마땅해.”

“그렇지.”

“문제는, 놈들에게도 모사(謀士)가 있다면 절대 이곳에 거점을 세우지 않았을 거란 점이야. 차라리 맹에 침투시켰으면 시켰지, 언제 어떻게 걸릴 줄 알고 이런 애매한 곳에 거점을 세워?”

연호정 역시 항상 의아하게 생각하던 바였다. 다만 삼교의 인상이 워낙 광신도에 가까웠던 탓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지나친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놈들은 신기할 정도로 딱딱 들어맞게 움직이고 있어. 도대체 어떤 진법인지 짐작하기도 힘든 조잡한 도형의 움직임을 따르고 있단 말이야.”

제갈아연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익힌 무공에도 이 기괴한 도형의 움직임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겠지.”

“…….”

“정말 놀랍지 않아? 마치 꼭대기에서 떨어진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괴뢰들 같아. 곤충들도 이렇게는 안 할 텐데.”

연호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는 다시 한번 신화교의 무장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움직임, 그들의 발경법, 그들이 어느 부분에서 감정이 격해지는지까지.

‘생각해 보면…….’

연호정은 자신의 무공을, 자신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해 보았다.

‘그때의 난, 제아무리 전생(前生)의 깨달음을 가져왔다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적을 몰아칠 수 있을 만한 실력이었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싸움이란 건 단순히 경지라는 척도만으론 판단할 수 없다. 그날의 심신 상태, 환경, 변수 등 온갖 요소들이 개입된다.

달리 말하면, 어떤 종류의 싸움이든 누가 이기고 질지를 장담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당시의 번작은 연호정과 연위가 힘을 합쳐 상대해도 잡기 어려운 고수였음이 확실하다.

물론 전황이 불리했고, 원하는 것을 얻었기에 더 무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연호정과 연위의 합격술 역시 기대 이상의 위력을 낳았다. 기세나 정신력은 싸움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의 요소다.

‘하지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목숨을 건 일전이었어. 번작은 분명 나와 아버지의 합공에 힘겨워했다.’

확신할 수 있는 요소까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 하나는 있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놈들의 핵심적인 약점을 쥘 수 있는 셈이지.”

“그래, 확실하다면 말이야.”

연호정이 제갈아연에게 물었다.

“그때 무장들과 생사전을 벌였던 건물의 설계도를 얻으려면 얼마나 걸리지?”

“모르지. 우리 선에서 해결될 일이 아니기도 해. 맹의 정보단이나 개방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그럼 해야지.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

“설득은?”

“내가 할게. 그건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연호정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긴,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었다.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입이 다시 열리기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너 혹시, 봉공회의실에 들어가 본 적 있냐?”

제갈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인가 있긴 하지? 예전에 같이 들어갔었잖아? 멸사군 귀환 때 상부에 보고하려고.”

“아, 그랬었지.”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한 번 더 들어가 줘야겠다.”

“어? 나 혼자?”

“혼자든 책임자와 함께든. 물론 군사님께는 말씀을 드려야 할 거야.”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고 있어. 군사님께 출입 허가서를 받아 올 테니까.”

“너도 같이 들어가?”

“아니, 나는 같이 안 갈 거야. 네가 해야 할 일은 군사님께 따로 말씀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럼 넌?”

“신화교 놈들이, 정말 네가 알아낸 것처럼 본능적으로 일정한 틀에 맞춰 움직이는지를 알아보러 갈 거다.”

제갈아연은 당황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아니, 누구한테 알아봐?”

“당사자.”

“뭐?”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당시에 사로잡았던 무장 하나가 무림맹 뇌옥에서 썩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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