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482화 (481/963)

482화. 밑 준비 (7)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검을 뽑은 채 눈을 감고 있던 모용군의 몸에서는 위협적인 전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시퍼런 뇌기가 몸 여기저기에서 꿈틀거린다. 육안으로 그 뇌기가 확인될 정도이니, 그 힘이 얼마나 막강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뇌기 특유의 위협적인 기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검기로 물체를 베도, 베인 물체가 쪼개지지 않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뇌정공(雷霆功)이 대성을 코앞에 두고 있군.’

기(氣)의 밀도 조절이 궁극에 이르렀다. 이는 모용군이 연성한 상고의 절학, 뇌정공의 성취가 대성 직전에 이르렀음을 뜻했다.

뇌정공은 불세출의 절학이다.

뇌정의 끝을 본 인간은 능히 무신(武神)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으며, 가히 뇌신(雷神)과도 같은 힘을 발산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뇌정공의 궁극은 곧 무의 경지로 보았을 때 산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아닌 하늘에 오르는 것.’

모용군이 눈을 떴다.

시퍼런 번갯불로 가득한 동공은 깨달음 깊은 고승의 그것처럼 깊기만 했다.

‘무극(無極)이로군.’

성천의 강자들이 진입한 경지를 두고, 세인들은 무극지경이라 한다.

무극이란 곧 우주 만물의 근원인 태극(太極)의 시초(始初)를 뜻한다.

태초의 우주, 혼돈의 극치, 진리와 허상이 다툼과 화해를 반복하는 모순 그 자체의 영역.

모용군은 이제, 상상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그러한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군.’

무극으로 향하는 길은 보인다. 하지만 그 길이 너무 많이 보여서 문제였다.

나무의 잔가지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무극의 길.

그 길 중 하나만 잘못 밟아도 실패한다. 단순 실패라면 또 모를까, 자칫 지금 지니고 있는 힘까지 소실될 수 있을 만큼 위험천만한 길인지라 선뜻 한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후우.”

담담한 심호흡으로 뇌기를 잠재운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보기에도 그러한가?”

모용군이 고개를 돌려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연호정이 팔짱을 낀 채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이오?”

“자네 역시 무극의 경지를 코앞에 두고 있는 수행자일 터, 자네 눈에도 그 길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 보이냔 말일세.”

연호정은 모용군의 말을 대번에 이해했다.

그래서 조금 의외였다. 모용군이 무공 관련으로 자신에게 질문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내 눈에는 다르게 보이오.”

“어떻게 보이던가?”

“단 하나의 길이 보이지. 다만 그 길이 얼마나 구불거리는지, 길목 사이사이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는 도통 예측이 되지 않소이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사람마다 보는 광경이 다른 모양이군.”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두가 다르겠지. 당신이 지금의 경지를 구축하면서 걸어온 길과, 내가 지금 이 경지에 오른 과정이 다르듯 말이오.”

“내 위기보다는 남의 위기가 헤쳐 나가기 훨씬 수월해 보이기 마련이지. 자네 말을 들으니, 어째 자네가 나보다 무극에 먼저 닿을 듯하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것 같소.”

“빈말로도 아니라고는 안 하는군.”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몰라 한 발 떼지도 못하는 양반보다는, 지금껏 쌓아 왔던 것을 통째로 잃는 한이 있더라도 도전해 보는 사람이 더 빠르지 않겠소? 아무래도?”

“……!”

모용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네는 이미 출발했나?”

“뭐가 문제라고 발을 떼지 않았겠소.”

“자네가 말했듯, 자칫 잘못하다간 자네가 쌓아 온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알고 있소.”

“무섭지 않은가?”

“무섭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겠소? 다만, 그래도 가야 할 길이라 생각하니 가는 거요.”

“…….”

“당신에게는 아니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모용군이 탄식을 토했다.

“자네가 그 나이에 어찌 그런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는지 새삼 알겠구먼.”

지금 연호정의 말만 듣고도 알겠다. 녀석은 단 한 번도 도전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게 별거라도 되냐고?

그렇다. 별거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쌓아 올린 무(武)가 통째로 증발해 버릴 수도 있다. 무림인에게 그것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도 훨씬 더 끔찍한 일일 것이다.

거기서 끝나면 차라리 다행이다.

모용군은 막강한 권력을 쥔 위정자였다. 무림이란 세계에서, 무공의 상실은 곧 권력의 상실로 이어진다.

그래서 무림에서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지고 있어도 기반이 없으면 권력자가 될 수 없고, 권력을 갖고 있어도 자신의 무(武)가 누구 못지않음을 끊임없이 증명해야만 한다.

즉, 모용군이 무림맹주가 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더 강한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하제일.

모용군이 원하는 것은 천하제일의 권력과 천하제일의 무력 그 자체였다. 육신의 강함과 절대적인 권력, 둘 모두를 손에 넣고자 하는 것이다.

‘허어.’

불현듯, 모용군은 스스로가 우스워지는 걸 느꼈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모든 것을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 이치를 잊고 있었던가.’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은 마치 생사결을 벌이는 것과 같다.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 내 안전을 보장받은 채 상대를 죽이기를 원한다?

내가 살고 상대가 죽는다. 그런 결과를 위해 싸워야 함은 마땅하다. 하지만 과정까지 그래서는 아니 될 말이다.

상대를 죽이려면, 나 역시 죽을 수도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싸워야 한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어찌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겠는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내는 사람은, 자신의 파멸조차 염두에 두고 도전하는 사람이다.

그 싸움에서 성공하면 모든 것을 얻을 것이요, 패배하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삶이란, 정치란,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마치…….’

연호정을 보는 모용군의 눈에 다시금 뇌기가 번들거렸다.

‘저놈처럼.’

연호정은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말하는 기색을 보니, 아예 고민조차 해 보지 않은 것 같았다.

단순히 젊은이의 혈기나 패기라고 여기기에는 연호정이 지닌 능력과 재능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모용군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답지 않게 씁쓸함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또 졌군.’

졌다. 다른 무엇도 아닌, 무인의 자세에서 연호정에게 졌다.

하지만 패배는 곧 또 다른 깨달음의 시작인 법.

파지지지지지직!

시퍼런 뇌광이 가득했던 모용군의 뇌기가 점점 샛노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좋은 깨달음을 주었군. 그래, 자네 말마따나 한 발 떼는 걸 두려워하면 안 되겠지. 그게 두렵다면 차라리 은퇴를 해야지.”

“맞는 말이오.”

“자네나 나나, 결국 위태로운 칼날 위를 걷는 위험천만한 바보들이라네. 나는 그것을 잊고 있었어.”

훅!

위협적으로 번뜩이던 황금빛 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이 빚은 꼭 갚도록 하지.”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였다.

연호정이 웃으며 담벼락에서 내려왔다.

“이거, 적이 될 사람에게 너무 과한 공부를 시켜 준 거 아닌가 모르겠소.”

모용군이 웃었다.

“화려한 패배를 선물해 주겠네.”

“당신 셈법이 상식에서 벗어났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소. 참나, 패배를 선물하다니? 그게 은인에게 할 말이오?”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런 선물은 됐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오.”

“대낮부터 찾아왔길래 뭔가 부탁이 있을 줄 알았지. 뭔가?”

“뇌옥에 봐야 할 사람이 하나 있소. 같이 가 줄 수 있겠소?”

말이 같이 가 달라는 것이지, 결국은 힘 좀 써 달라는 뜻이었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어찌 그걸 나한테 부탁하시는가?”

“봉공분들 중 형옥(刑獄)에 관여하는 분이 두 분 계신다고 들었소. 그중 하나가 당신이라는 걸 알고 있소.”

“어중간하게 알고 있군. 봉공이라도 상부의 지시 없이 자격 없는 사람을 뇌옥에 들일 수 있는 권리는 없네.”

“그 상부가 봉공분들 아니오?”

“물론 그렇지. 다만, 자네가 왜 뇌옥에 들어가려 하는지를 설명하고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일일세.”

들여보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무림맹 뇌옥에는 위험천만한 죄수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수년 전 멸문한 구주명가의 고수들도 있었고, 변방에서 잡혀 온 마두(魔頭)들도 많았다. 유군 부대가 활동할 동안 무림맹의 다른 전투 부대도 각지로 파견 나가 작전을 수행해 왔던 것이다.

개중에는 전투 부대의 대장급들은 모르는, 철저하게 수뇌부들만 아는 위험인물들도 있었다.

당연히 아무나 들여보내 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봉공분들의 허가를 받고 들어가려 했으면 아버지나 군사님께 부탁을 드렸지, 당신에게 찾아왔겠소?”

“그렇겠지.”

모용군이 표정을 굳혔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 사실이 대외에 알려지게 되면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야. 나뿐만이 아니라 자네도 마찬가지일세.”

“안 걸리면 그만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군.”

“그렇다네.”

“심지어 그 죄수 중 하나를 밖으로 잠시 꺼내야 하오.”

“점입가경이군. 걸리면 주의를 듣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아. 자칫 잘못하다간 직위 해제는 물론 나란히 손잡고 뇌옥에 들어가게 될 수도 있네.”

“걱정하지 마시오. 안 걸리는 게 좋지만, 설령 걸린다 한들 당신이나 나나 파멸하진 않을 테니까.”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삼교에 관해서 알아볼 게 있어서 가는 거니까.”

순간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구미가 좀 당기시오?”

“확 당기는군.”

모용군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설명하게.”

* * *

뇌옥의 문이 열렸다.

이곳은 뇌옥에서도 최하층에 위치한 곳이었다.

간수 하나가 복도를 걸었다.

뇌옥이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둡고 축축한,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은 아니었다.

죄의 경중에 따라 죄수를 다루는 태도는 달라지지만, 적어도 뇌옥의 환경 자체는 그 어떤 곳보다도 좋다. 죄인을 대하는 무림맹의 태도는 다른 조직처럼 비인간적이지 않았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딸칵!

간수가 어느 독방의 문을 열었다.

스르륵.

차디찬 독방 벽에 기대어 앉은 죄수가 고개를 들었다.

화르르륵.

내공을 소실했음에도 두 눈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올 것 같다. 한때나마 지극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음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간수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수 번호 이천삼백칠십육(二千三百七十六) 번.”

“…….”

“일어나라.”

“……크큭.”

괴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무릎 꿇고 애원하면 일어나 주지. 어디 울면서 부탁해 봐.”

간수는 아무 말 없이 허리춤에서 곤봉을 꺼내 들었다.

빠각!

“컥!”

죄인의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힘이 하나도 없어 뵌다. 깨진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간수가 재차 입을 열었다.

“출옥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지 마라.”

“……뭐?!”

“너와 대면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전해 달라고 한 말이다.”

죄수의 눈이 흔들렸다.

간수가 열린 문 바깥으로 나와 뒷짐을 지고 섰다.

“나와라, 이천삼백칠십육 번.”

“……빌어먹을!”

비틀거리며 일어난 죄수가 이마에 흐른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내 이름은 천강이다. 이천삼백칠십육 번 따위가 아니야.”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