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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484화 (483/963)

484화. 조각 (2)

쿵!

천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두 발을 땅에 박았다. 하지만 내공이 없어서 근육과 관절에 강한 통증이 일었다.

파아아악!

천강의 주먹이 기이한 각도로 뻗어 나왔다.

일정한 형과 식을 가졌으면서도 지극히 실전적이다. 내공을 싣지 않았음에도 주먹에서 불꽃의 돌풍이 이는 듯했다.

부웅!

연호정의 턱 밑으로 천강의 주먹이 스쳐 지나갔다.

파악!

천강의 멱살을 놓은 연호정이 오른손 손등으로 천강의 코를 후려쳤다.

퍽!

“크악!”

천강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으며 비틀거렸다.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내공을 실은 것도, 육신의 힘을 다 끌어내서 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코피가 터지고 눈물이 났다. 부위가 부위인 만큼 정신이 번쩍 드는 고통을 선사했다.

그리고, 고통 이상의 분노를 자아냈다.

“이 새끼가!”

파아악!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도 천강의 감각은 죽지 않았다. 오랜 독방 생활에 육신은 피폐해졌지만, 극한의 내공으로 다스려진 혈관과 신경은 아직도 건재했다.

팍! 파바바박!

불을 뿜는 천강의 두 주먹은 연호정의 몸에 하나도 닿지 않았다. 연호정은 왼손을 대충 휘둘러 천강의 쌍권을 다 흘려 냈다.

연호정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별것도 없군.”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재차 소리치려던 천강은 순간 정수리가 폭발하는 기분을 느꼈다.

“개새끼가!”

쾅!

이번 일격은 제법이었다. 연호정 역시 내공을 끌어 올리지 않고 그의 주먹을 막았지만, 손아귀에 미미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역시.’

천강의 단전은 완전히 파괴된 게 아니다. 말하자면 반파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제대로 운용은 되지 않지만, 천강의 몸 곳곳에는 신화교의 고위 무공인 금제순화공(金帝純化功)의 화기가 돌고 있었다. 뜻대로 운용할 순 없으나, 범부 이상의 완력을 낼 수는 있다는 것이다.

“네놈들은 하나같이 밥맛이야!”

파바바바박!

예전에 구사했던 무공의 파괴력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된다. 하지만 그때의 현란하고 속도감 넘치는 술식은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천강의 주먹과 장법을 막아 내는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독기가 가득하군.’

굳이 모용군처럼 모욕을 가하거나 살기를 드러낼 필요가 없다.

그저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그뿐이다. 멱살을 잡고 한 번 휘두르는 정도, 딱 그것만으로도 천강의 감정은 폭발해 버렸다.

‘그래서 더 좋다.’

이성을 잃기 직전이다. 그런 상태에서 구현되는 무공엔 아무런 잡생각이 없다. 평생을 연마한, 몸에 밸 대로 밴 무공이 본능적으로 뛰쳐나오는 것이다.

‘움직임도 전부 보여.’

내공이 실리지 않았기에 그 무시무시한 속도도 내지 못한다. 그래서 투로가 훤히 보였다.

어느새 등을 돌렸던 모용군 역시 한옆에 서서 흥미로운 눈으로 천강의 무공을 보고 있었다.

‘권법, 장법…… 거기에.’

파아아아악!

쾌속한 권장공에 이은 화끈한 수도 일격.

신화교의 화룡마도(火龍魔刀)였다. 수도 손날로 펼치는 참격의 무공은 그 기세와 파괴력이 실로 남달랐다.

‘멋지군.’

궤적을 그리며 파고드는 투로.

비록 적이지만, 그 무공의 유연함과 실전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틀은 유지하는데, 수만 번 반복해 연성한 흔적이 엿보였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천강이 악을 썼다.

“이것만 봐도 알겠어! 네놈들은 모조리 불살라 버리는 게 나아! 명예도 뭣도 모르는 미친 개자식들에게는 사람대우를 해 줄 필요가……!”

파바박!

천강의 무공이 멈추었다. 그의 두 손, 팔목이 연호정의 손에 잡힌 것이다.

천강이 이를 악물었다.

팔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파 왔다. 내공을 쓰지 않는데도 악력이 무시무시했다.

연호정이 귀신처럼 웃었다.

“이걸로 끝이냐?”

“으드득!”

“끝인 것 같군.”

퍼억!

“쿨럭!”

무릎으로 복부를 맞은 천강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연호정은 손을 털며 생각에 잠겼다.

‘대충 알겠어.’

천강이 구사한 권법과 장법, 그리고 참격 대부분이 머리에 들어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펼쳐 보라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무공들의 약점과 파훼법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감이 왔다.

그 파훼법을 아는 것만으로도 어떤 움직임을 그릴지가 예측된다. 상대의 무공을 똑같이 그리는 게 아니라 허점을 꿰뚫고 외우니, 본질적으로 그 무공의 핵을 얻어 낸다.

연호정의 무시무시한 실전 능력을 지탱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안목이었다.

연호정이 모용군을 향해 물었다.

“대충 알겠소?”

“말 그대로 대충이네. 어느 정도 유사하게 펼쳐 보일 수는 있겠어. 자네는?”

“마찬가지요.”

“의외로군. 자네 재능이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나는 그런 천재가 아니라서 말이오.”

“그런 말 남들 앞에서 하지 말게. 욕먹네.”

“여하간 이걸로 볼 장은 다 봤소.”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저 멀리 떨어져 있던 간수를 향해 외쳤다.

“죄수 데려가시오.”

잠시 후, 간수가 다가와 천강의 양팔에 쇠사슬을 채웠다.

천강이 헐떡이며 말했다.

“이, 이 개 같은 놈들! 그럴 줄 알았다! 날 풀어 준다는 건 다 거짓말이었어!”

모용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해하지 마라. 그건 사실이니까.”

“뭐, 뭐?”

“정확히는 사실이었지. 나한테는.”

“……?!”

“너한테 볼일이 있는 사람은 나였다. 한데 넌 다른 사람한테 얻어맞고 쓰러지지 않았느냐? 애초에 내가 뭘 원하는지 알기나 하느냐?”

“이…… 이!”

“원망을 하려거든 이 괴물 같은 청년에게 하도록. 나는 약속을 깨지 않았어. 물론…….”

모용군이 차갑게 웃었다.

“나 역시 지킬 생각은 없었다.”

“이 개새끼!”

“이만 꺼져라.”

그렇게 간수가 천강을 데리고 사라졌다.

모용군이 연호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보는 거요?”

“이 또한 의외라서.”

“뭐가 말이오?”

“자네라면, 아무리 적이라도 약속을 지켜 줄 줄 알았거든.”

“당신이 말하지 않았소? 약속을 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소.”

“같잖은 말장난일 뿐이지. 자네도 알잖나?”

“물론 알고 있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순간 모용군은 등허리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의 웃음이, 도통 웃음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묻고 싶군. 당신은, 당대 강호에서 삼교를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시오. 당신? 아니면 구파의 장문인들? 그도 아니면 관부의 관리들?”

“…….”

“어쩌면 당신이 그렇게 화를 내 줘서 내가 평정을 유지한 건지도 모르겠소.”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갑시다. 놈의 무공을 제대로 복기해 봐야겠소.”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모용군이 이내 그를 따라 걸었다.

모용군은 생각했다.

‘대체 뭐지?’

예전부터 의아하게 생각하던 바였다.

모용군은, 아니 나이 든 모용씨들은 하나같이 중원이 아닌 외세의 족속들을 맹렬히 증오했다. 그 증오는 거의 병적인 수준으로, 모용씨의 근원과도 닿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연호정은 달랐다.

외세의 침공으로 내 가족이 죽을 수 있다? 당연히 대비해야 한다. 화도 날 것이고, 죽이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연호정이 보여 주는 증오는 이해 불가의 영역에 있었다. 평소에는 티를 내지 않다가, 방금처럼 서늘한 송곳니를 보여 줄 때는 정말이지 모골이 다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그것은 모용씨들이 외세를 증오하는 것이나 중원인들이 침략자를 증오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거하고 있었다.

‘거의 맹목적으로 보일 만큼의 살의다.’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연호정, 아니 연씨 가문과 삼교는 어떤 증오로 얽혀 있는 것일까?

“어서 갑시다. 왜 이리 느리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가네.”

* * *

파아아아앙!

연호정이 시연을 마치곤 자리에 앉았다.

제갈문호가 모용군을 보았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도나 거리 재기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거의 비슷하오.”

“음.”

연호정의 동작을 몽땅 외운 제갈문호는 재빨리 그것을 분석했다.

어떤 의미로, 보고 외우고 분석하는 데 있어서 압도적으로 특출난 제갈씨들이야말로 무림에서 손꼽히는 천재 가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진 무공을 몸으로 풀어 내는 것은 다른 문제지만, 적어도 천문지리(天文地理)와 기관진식 등을 배제하고 무공에만 힘썼다면, 지금쯤 육대세가의 수좌로 군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제갈문호와 제갈아연의 두뇌 능력은 무시무시했다. 특히나 하나의 현상을 해체, 분석, 재조립하는 과정이 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달랐다.

잠시 후, 제갈문호가 제갈아연에게 물었다.

“오행 상극 중 무엇의 역(譯)이냐?”

“수(水)와 목(木)이네요.”

다른 부분에선 부족하지만, 적어도 진법과 기관진식에 있어서만큼은 제갈문호보다 제갈아연이 한 수 위였다.

출중한 재능도 재능이거니와, 몇 달 동안 진법에 매달린 결과였다.

“그렇군.”

제갈문호가 불신 가득한 얼굴로 연호정을 보았다.

“정말이지…… 이럴 수가 있나 싶네.”

연호정이 표정을 굳혔다.

“비슷합니까?”

“비슷한 정도가 아니야.”

제갈문호가 지도를 가져와 펼쳤다.

“아연이가 의문을 가졌던 이곳 지형, 이곳에 진법 방정(方程)의 식(式)을 대입하여 쓸모없는 진법축의 허수를 모조리 제외하면…….”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간단히 말하면, 신화교 놈들이 어떤 진법을 쓰는지는 몰라도 진법의 기본 축은 알아냈다는 말이네.”

연호정과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즉, 이호무장 천강의 무공이?”

“정확하게 대입되네. 물론 빠진 조각은 많지만, 구사하는 무공의 투로의 방위와 점선을 이으면 지도상의 진법축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이런 미친……!”

연호정은 기가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용군이 허망한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이것들이 정신이 있는 놈들인가? 무공부터 시작해서 전략까지 저 도형에 대입되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겐가? 하나같이 전부?!”

대체 신화교는 뭘 하는 곳이란 말인가? 어떤 정신머리로 중원을 공격하려 한 것인가?

‘물론 이런 대입식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기는 힘들 것이다. 아니, 없다고 봐도 좋겠지.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어느 한쪽이 불살라져 없어질 전쟁 속에서, 이런 걸로 궁리나 하고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그때, 제갈아연이 말했다.

“즉, 이런 것이로군요.”

모두가 제갈아연을 보았다.

지도를 보는 제갈아연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다른 이교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신화교는 교도들을 일정한 틀에 가둔 채 가르치고 있어요. 말하자면 하나의 이치, 일리(一理)를 진리로 삼아 무공, 지략, 경전 등에 녹여서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일반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만약, 만에 하나.”

연호정의 눈이 흔들렸다.

“사음교와 광혈교도 이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제갈문호가 침을 삼켰다.

“이번 전쟁, 생각보다 쉽게 치를 수도 있겠군.”

“확인되지 않은 사항에 목숨을 걸 수는 없지요. 하지만 확인해 볼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작이 삼교 중 어디에서 파견된 놈인지는 아직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지요?”

“그렇다네.”

“소문 이후, 별다른 반응은 없었습니까?”

“없었네.”

“몸을 사리는 겁니다. 이럴 때 튀는 반응을 해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요.”

“그렇겠지.”

“봉공들의 뒷조사는 아직 진행 중입니까?”

“그렇다네. 생각보다 진행이 더뎌.”

“지금껏 모은 정보, 전부 공유해 주십시오. 모용가주님도, 제 아버님과 당가주님도 전부 투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예. 슬슬 때가 되었습니다.”

쾅!

연호정이 주먹으로 지도를 내리쳤다.

“정보 공유 후, 닷새 안에 세작을 잡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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