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조각 (3)
당관은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서당의 학동인 줄 아느냐? 이걸 다 읽고 느낀 점을 제출하라고?”
“이틀 안으로 부탁드립니다.”
연호정은 당관을 쳐다도 보지 않고 말했다. 그는 수북이 쌓인 문서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위도, 제갈아연도, 심지어 강량까지도 제각기 필사한 문서들을 읽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하다는 걸 아는 듯, 모두가 문서 분석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당관이 눈을 감았다.
그의 이마에 혈관이 불거졌다.
“좋다, 세작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 그 정도야 귀찮아도 해 줄 수 있지.”
“감사합니다.”
“한데…… 도대체 저자는 왜 여기 있는 거냐!”
당관이 눈을 번쩍 뜨며 가리킨 곳에는 모용군이 있었다.
모용군 역시 당관을 보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이곳에서 가장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 그였다.
연호정이 말했다.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다 동원해야지요.”
“동원? 하면 구파의 장문인들에게도 전한 거냐?”
“그건 아닙니다. 제아무리 현자들이라도 자신의 사생활까지 낱낱이 조사한 걸 읽으라고 할 수는 없지요. 물론…….”
연호정이 두툼이 쌓인 문서 뭉치 한쪽을 가리켰다.
“육가의 가주분들 것도 있긴 합니다만.”
“대체 지금 뭐 하자는……!”
“이런저런 것 설명해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부탁을 들어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가주님께서도 어서 분석해 주십시오.”
가만히 연호정을 노려보던 당관이 모용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용군은 당관을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는 누가 세작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눈알이 빠져라 문서들을 읽고 또 읽었다.
“흥!”
당관이 코웃음을 치며 한쪽 자리에 앉았다.
다들 열심히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목에 핏대 세워 가며 열을 내 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이거냐?”
“예. 문파별로 접어 두었으니 구분은 쉬울 겁니다.”
당관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생각보다 방대하군.’
장문인 한 명당 작게는 이십여 장, 많게는 백여 장에 이를 정도로 많은 정보가 기재되어 있다.
제갈문호의 집착과 광기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껏 구파와 육가의 수장들을 조사하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을 것이다.
결국 자리에 앉은 당관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흩어져 있다?’
물론 다 같이 모여 읽을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퍼져서 읽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중 가장 이상한 건 연호정이었다. 그는 넓은 방에서도 가장 구석에 앉아 있었다. 마치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반응을 보겠다는 건가.’
통찰력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이곳에 있는 사람 중에도 세작이 있을 수 있다.
벽산연가, 모용세가, 그리고 사천당가까지.
가주들을 제외, 그들의 반응을 투명하게 살필 수 있는 자는 연호정뿐이다.
연위와 모용군은 그 솔직한 감시를 기꺼이 허용했다. 그만큼 당당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뭐가 되었든, 여러모로 대단하군. 연가주야 그렇다 치더라도 모용군 저놈까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잠시 손을 잡는다.
아무리 목표가 같다곤 해도 적이었던, 하물며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자의 감시를 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모용군은 흔쾌히 그것을 허용한 것이다. 눈빛과 자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당관이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 역시 문서에 집중했지만, 그의 의식 일부분은 주변을 향해 있었다.
‘이제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군.’
구파의 장문인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무림맹의 군사인 제갈문호는 물론 숙적인 모용군에게까지 신뢰를 받는 연호정의 영향력은 가히 무림맹 정상급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면 과연 나는, 저놈을 인정하는가?’
당관이 미소를 지었다.
조소 같기도 하고, 씁쓸해 보이기도 하는 묘한 미소였다.
“싸가지.”
“예, 말씀하십시오.”
“미리 말해 두는데, 난 세작이 아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진짜냐?”
“예. 구 할 구 푼 정도는요.”
“……재수 없는 놈.”
“시간이 없습니다. 도와주실 거면 어서 도와주십시오.”
당관이 투덜거리며 문서를 들었다.
“어쩌다가 저런 놈과 얽혔는지.”
이틀 뒤.
“으음.”
연위, 모용군, 당관, 연호정 그리고 제갈아연이 각자 보고 느낀 바를 적은 문서들을 읽은 제갈문호가 침음을 흘렸다.
“역시나 느낀 바가 각자 다르군. 다르지만…….”
제갈문호가 연호정을 보았다.
“의심이 겹치는 사람이 딱 두 명 있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다들 똑같은 생각을 했어.”
“예, 그렇더군요.”
“자네는 그 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도 그 둘이 의심스럽나?”
“그렇습니다.”
“자네가 보는 그 둘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한 명은 알기 쉽고, 한 명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 정확한 평가일세.”
제갈문호의 검지가 탁자를 탁탁 두들겼다. 별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고, 일종의 습관이었다. 깊게 고민할 때의 습관.
잠시 후, 제갈문호가 입을 뗐다.
“하나 물어봄세.”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그때 이리 말했네. 닷새 안에 세작을 잡아 보겠다고 말이야.”
“그랬지요.”
“그 기한이 앞으로 사흘 남았군.”
“빠듯하지요.”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 식으로 세작을 색출하려 했는가?”
아직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은 그였다.
연호정이 말했다.
“군사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침투한 세작이 홀로 활동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특히나 본맹처럼 덩치가 큰 조직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거대한 단체에 세작 하나만 달랑 보내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만큼의 위험성을 알기에 정보 전달에 실패해도 걸리지는 않도록, 말하자면 알 박을 용도로 쓰는 경우지요.”
“그렇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삼교 놈들이 본맹에 그리 소심한 세작질을 하려 들진 않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럴 걸세. 애초에 이번 세작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가꾼 존재일 게야. 시작부터 아무 고생 없이 침투시켰을 테니, 들킬까 조마조마할 이유가 없지.”
“즉, 세작과 연결된 연락책이 있을 확률이 지극히 높습니다.”
“말하자면, 세작이 아닌 그 연락책을 보고 움직일 생각이었군.”
“그렇습니다.”
“그 방법은?”
“세작이 취합한 정보를 보내기 위해서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기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주기가 끊어지면 연락책이 반드시 움직이게 됩니다.”
“그렇겠지. 문제는 그 주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연호정이 문서들을 가리켰다.
“여기에는 각파 수장들의 사생활은 물론, 무림맹에 들어온 이후의 습관이나 활동에 대해서도 전부 적혀 있습니다.”
“음.”
“그리고 추려 냈지요. 두 명을요.”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그 두 명을 감시하겠다?”
“예. 하지만 그 두 명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세작으로 몰아가야지요.”
“……!”
“은밀하게 감시할 사람은 보고서로 추려진 둘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제외한 다른 사람을 가둬 두든 수감시키든 해야 합니다.”
“……위험한 작전이군.”
“그렇습니다.”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물론입니다.”
“하물며 사흘밖에 남지 않았군. 그런 식이라면 한 달, 아니 반년이 지난다 한들 잡기가 쉽지 않을 텐데?”
지나치게 수동적인 작전이 아니냐, 제갈문호는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지?”
“연락책을 제외한 또 한 명의 그림자가 존재할 테니까요.”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또 한 명의 그림자?”
“예.”
연호정의 어조는 확정적이었다.
“이런 작전에서는 결단력 있는 가정이 필요합니다. 어느 하나 제대로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지만, 일단 우리가 확신하고 움직이는 가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작이 중간에 포섭된 게 아닌, 시작부터 삼교와 함께해 왔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연락책이 있다는 것.”
“그렇습니다. 그 가정을 토대로 상황을 보면, 세작과 연락책 사이에 또 한 명의 인물이 존재할 것입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확신하는가?”
“그 가정이 확실하다면, 그림자의 존재 또한 십 할 확신해도 됩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놈들은 항상 그랬으니까요.
연호정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자신의 전생을 고백한 대상은 연위와 묵비, 둘뿐이었다. 제아무리 제갈문호라도 그런 부분을 말할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만 알아 주십시오. 일례로, 오랜 시간 남부의 암살자 세계를 잡아먹었던 음신에게도 그림자가 붙었습니다.”
바로 소방이었다.
“삼교 역시 침투전은 처음입니다. 불안해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하물며 무림맹입니다. 혹여나 세작이 배신할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관리자로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리자가 붙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 더 있습니다.”
“신화교.”
“정확하십니다. 우리가 신화교의 무장들을 여럿 죽인 이후, 그들은 각 지역에 관리자를 파견했을 겁니다. 그것도 다급하게요.”
그리고 그것이 삼교의 방식이다.
비단 이번 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과거 흑암제 시절, 놈들이 보낸 세작들을 잡아내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관리자를 봐 왔다.
개중에는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범부로 꾸민 자도 있었고, 초절정 고수의 눈도 손쉽게 속여 버리는 은신술의 대가도 있었다.
무림맹 세작 관리자는 필경 후자일 것이다. 연호정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즉, 연락책을 잡아내는 것보다, 그 둘과 연관된 사람을 추려 연락책 후보로 잡은 뒤 그들과 세작 사이에 존재하는 관리자 유무를 잡아내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독으로?”
“당가의 힘을 빌리기로 했지요.”
세부 방법까지 생각해 둔 모양이었다.
제갈문호가 턱을 쓰다듬었다.
“나쁘지 않지만…… 인력을 투입하기 쉽지 않은 작전이야. 물론 그 두 사람과 연관된 연락책 후보는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연호정은 강행하려 하였다.
사소하고, 어떻게 보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부분부터 잡아내다 보면 저절로 뿌리에 닿을 수 있는 법이다. 상황이 막막할 때, 조금은 주먹구구식이더라도 끈기 있게 파헤치는 연호정만의 방법이기도 했다.
“연락책…… 그리고 연락책과 연결된 관리자라…….”
몇 차례나 중얼거리던 제갈문호가 이내 눈을 빛냈다.
“자네와 나의 작전을 합쳐 보는 건 어떤가?”
“어떤……?”
“세작을 잡으면서, 자네와 얽힌 꽤 민감한 사항도 한꺼번에 해결을 보자는 말일세.”
“예?”
제갈문호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자네의 안목을 믿어서 하는 말이야. 뭐가 되었든, 이번 일은 자네가 고생 좀 해야 할 거네.”
* * *
다음 날.
“또다시 급작스레 회의를 잡아서 죄송합니다.”
갑작스러운 회의였지만, 봉공들은 전부 모였다. 제갈문호가 세작 관련된 문제로 뭔가를 알아냈을 거라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기색을 읽은 듯, 제갈문호가 무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 회의는 세작 관련으로 연 것이 아닙니다.”
용화진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하면 뭐요?”
“묵룡부 건에 대해, 제가 봉공분들을 설득할 사안이 있어서 이리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설득? 또 무슨 사고라도 쳤소?”
“사고는 아니고, 합당한 작전이지만 조금은 과격해 보일 수 있는 일이지요.”
“대체 뭔데 그러시는 거요?”
제갈문호가 눈을 빛냈다.
“유군 부대 총괄 대장 연호정 대수를 묵룡부에 파견 보내는 건에 대해 말씀드릴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