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1화. 폭풍우가 몰아치다 (2)
등천교가 형당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공동파 장문인은 워낙에 거물급 인사였다. 형당조차도 등천교의 입건을 쉬쉬했고, 애초에 연호정이 등천교를 묶어서 데려갈 때도 은밀하게 이동했던지라 본 사람이 없었다.
결국 그것을 아는 사람은 수뇌부와 형당의 인원들, 그리고 제갈문호가 부리는 정보대의 고위직 인사들뿐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이 사실이 무림맹 전체로 퍼지면 곧 천하에도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동파는 앞으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며, 최악의 경우 무림맹을 탈퇴할 수도 있다.
연호정과 모용군, 그리고 제갈문호가 사전 작업을 확실히 했기에 문제가 크게 번지진 않았다. 여러모로 다행한 일이었다.
물론, 무림맹의 봉공 하나가 형당으로 끌려간 것 자체가 큰일이긴 했지만.
“후우.”
승현진인의 거처에서 나온 연호정은 내성 이곳저곳을 걸었다.
연호정과 마주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유군 부대의 수장은 간부급 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바, 많은 사람의 인사를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연호정 역시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길을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
걸음을 멈춘 연호정이 우측 숲을 바라보았다.
‘굉장한데.’
익숙한 기도였다. 분명 익숙한데, 또 생소하기도 했다.
생각에 깊이 잠기긴 했지만, 연호정의 기감은 언제나 주변 상황을 민감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십여 장 안까지 접근하기 전에는 ‘그’가 숲에 있었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엄청난 발전이로군. 정말이지, 누구 하나 만만한 사람들이 없어.’
연호정이 빙긋 웃으며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시 후.
“오랜만이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충분히 높게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넌 대단하다. 맞싸움 정도는 가능할 줄 알았거늘, 이미 나보다 몇 단계는 위로 올라갔구나.”
“치열하게 살았거든요. 세상과 드잡이질도 좀 하고.”
“그래, 그것이 강해질 수 있는 원동력이지. 나처럼 골방에 틀어박혀 허구한 날 검만 휘두른다고 발전하는 건 아닐 거다.”
“그런 말씀을 하시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로 발전하셨습니다.”
“그래 보이나?”
“예. 무종지벽을 훌쩍 넘어선 것도 모자라, 거의 장문인급에 필적할 만한 무공을 연성하신 것 같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다. 다만, 검학을 연구하느라 머리를 좀 싸맸을 뿐이야.”
“무공을 만드는 것은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지요.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깨달음을 얻으신 듯합니다.”
“장문 사형의 배려 덕이다. 그간 배우지 못했던 무공들을 알려 주셨지.”
“그렇군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사일(射日)을 넘어설 만한 궁극의 무공은 얻으셨습니까?”
중년 사내, 패율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넘어섰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만…….”
“일차 완성은 됐군요.”
“그런 셈이지.”
연호정이 패율의 좌측 어깨를 바라보았다. 뒤쪽으로 단창(短槍)의 창대가 보였다.
등에 사선으로 멘 단창을 보던 연호정이, 이번에는 패율의 좌측 요대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한 자루 검이 매여 있었는데, 기존에 패율이 들던 검과는 달랐다. 검신이 좁고 유연성이 좋은, 거의 협봉검에 가까웠던 기존의 검과는 달리 소검(小劍)보다 조금 더 긴 정도의 짤막한 검이었다.
이 척이 살짝 넘는 길이. 검폭은 평범한 장검보다 두 배는 넓다. 짧지만 단단해 보이는 검이었다.
“전에 제게 말씀하셨지요. 관일검(貫日劍)이 될지, 관일창(貫日槍)이 될지 모르겠다고.”
“그랬지.”
“보아하니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신 모양입니다.”
패율이 미소를 지었다.
날카롭고 딱딱하던 기존의 인상은 여전했지만, 적어도 그때보다는 더 부드러워 보였다.
“고생 좀 했다.”
“사일(射日)이란 해를 향해 쏘아 냄을 뜻하고, 관일(貫日)이란 해를 이미 뚫어 버렸음을 뜻하지요. 선배의 무공이 완벽해지면, 필시 사일 이상의 위력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겁니다.”
얼굴에 금칠해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연호정의 진심을 느꼈기에, 패율은 눈으로 감사를 전했다.
“한데 이 시간에 여긴 어인 일이십니까? 제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다.”
연호정은 말없이 패율을 바라보았다.
패율 역시 말이 없었다. 그저 이전보다 훨씬 깊고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친근감과 경계가 서린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볼 뿐.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장로님을 뵈러 가는 걸 막으러 오셨습니까?”
무림맹의 봉공은 열둘이다. 그것을 십이봉공(十二奉公)이라 한다.
하지만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수장들만 해도 그 수가 열여섯이었다. 거기에 중소 문파의 대표 중 둘이 수뇌부로 이름을 올렸다.
구파의 여섯, 육대세가의 여섯이 십이봉공이며 남은 장문인들과 중소 문파의 대표 둘은 무림맹의 장로원(長老院)으로 빠졌다.
초기에는 함께 회의를 진행했으나, 봉공직에 관심이 없는 수장들이 장로로 빠진 것이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점창파의 장문인이었다.
“내가 막는다고 막아지겠느냐?”
“물론 그렇진 않겠지요.”
“너답다. 너의 그 자신감은 오만한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지.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의 자신감은 언제나 무서운 법이다.”
“점창 장문인께서 선배에게도 알려 주셨군요. 무림맹 수뇌부 중에 적측의 세작이 있다는 걸 말입니다.”
“그렇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저는 모두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너라면 분명 그렇겠지.”
“가능성을 따져 봤을 때, 장로원에 세작이 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습니다. 이유인즉, 봉공들만이 다룰 수 있는 극비 정보가 따로 있으니까요. 고로, 저는 봉공 중에 세작이 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데도 절 막으러 오셨습니까?”
패율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장문 사형이 적의 세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리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장문 사형이 적측의 세작이라면, 그간의 정(情)을 끊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직접 사형의 목을 칠 것이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점창 장문인에게 정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패율은 장문인이자 사형을 누구보다도 믿고 따랐다.
그럼에도 직접 목을 날려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그만큼 패율의 경지가 대단해졌음을 뜻한다.
무공만이 아닌, 마음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오욕칠정에 휘둘리지 않고 바르게 세상을 볼 줄 아는 눈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하면 저를 왜 기다리신 겁니까?”
“후배이자 전우(戰友)였던 녀석을 기다린 이유가 뭐가 있겠느냐?”
“……?”
“널 도우러 왔다.”
의아함으로 가득했던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돕는다고요? 저를?”
“그렇다.”
패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와 함께 다니면 재미있는 일이 자주 생기더군. 그때의 작전 이후, 너는 유군 부대의 수장으로서 아주 바빴을 것이다. 간간이 너의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폐관실의 문을 박차고 나와 버리고 싶은 욕망을 겨우겨우 참았더랬지.”
“…….”
“나름의 성과도 있었고, 내 인내심도 한계에 도달했다. 나는 골방에 틀어박혀 검을 휘두르는 것에는 재능이 없어. 풀뿌리 하나 보기 힘든 황야일지라도, 세상의 공기를 맡으며 검과 창을 휘두르고 싶을 뿐이야.”
멍하니 패율을 보던 연호정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최연소라지만 그래도 장로인데, 점창파에서는 뭐라고 안 그럽니까?”
“관일의 무공을 보여 줬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더구나. 오히려 하루빨리 쫓아 보낼 기세였다. 점창의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세상에 제대로 각인시키고 돌아오라 하셨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하하 웃었다.
성격은 다르지만 역시나 점창 사람들의 기질은 비슷비슷했다. 멸사군의 군병, 점창 출신의 척강도 패율과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창의 장문인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보통의 문파라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후배를 도우란 말을 못 할 텐데, 점창 장문인은 그런 격식을 따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힘드실 겁니다. 머리도 아플 테고.”
“머리 아픈 문제는 네가 해결해라. 나는 그저 날뛰고 싶을 뿐이니까.”
“이러신다고 점창 장문인을 의심하지 않을 거란 생각도 마십시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장문 사형이 세작이라면 내가 직접 목을 날릴 것이다.”
“참 살벌해서 좋습니다.”
“내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지.”
미소 짓던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선배의 도움,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패율 역시 포권을 취했다.
“네 일을 망치는 일은 없을 거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어디로 갈 것이냐?”
연호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화산파 장문인, 용화진인에게로 갑니다.”
* * *
“군사.”
“말씀하십시오.”
제갈문호의 얼굴은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군사가 무림맹을, 나아가 강호를 얼마나 생각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바 아니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심하셨소.”
등천교 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방장 대사님께는 송구할 따름입니다. 따로 말씀을 드릴까 했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을 듯싶어 조용히 일을 벌였습니다.”
“세작을 잡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외다. 하지만 세작 하나 잡자고 봉공들 간의 신뢰를 무너트려서는 아니 될 일이오.”
“신뢰…… 말입니까.”
제갈문호가 씁쓸하게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대사께서 말씀하시는 신뢰를 잘 모르겠습니다.”
“군사.”
“봉공 중엔 대사님이나 승현진인만큼 천하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으로 제 이권만 챙기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알고 있소. 그래도 이런 식이어선 안 되오. 조직에는 절차라는 것이 있소.”
“일은 절차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습니까? 들으셨겠지만, 먼저 연 대수에게 살수를 가한 것은 등 장문인이었습니다.”
제갈문호가 눈을 빛냈다.
“설마하니, 대사님께서도 등 장문인의 위치가 있으니 그 정도는 협의를 보라고 말씀하실 생각은 아니시지요?”
공공대사는 일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비슷한 생각은 했었다. 어찌 되었든 등천교는 공동파의 장문인이었다. 그의 위치와 명성이 있는데, 일을 너무 크게 벌인 감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군사. 강한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죄를 지었다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이오. 그러나 군사께서 한 개인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축소해서 보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는구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요.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개인의 영향력이 크기에 등 장문인 같은 사람은 봉공이 되어선 안 됩니다.”
“어허, 군사.”
“대사님.”
제갈문호가 눈을 빛냈다.
“지금은 체면과 역사를 접어 두고 실리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아닌 말로,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수 있는 판국에 분란의 씨앗을 남겨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군사의 말은 틀리지 않소. 그래도 이런 식은 안 된다고 보오. 단순히 체면과 역사 때문이 아니오. 이러다 공동파가 탈맹이라도 하면…….”
그때였다.
“군사님.”
“보고하라.”
“화산파 장문인, 용화진인이 형당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공공대사가 눈을 부릅떴다.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제갈문호가 담담히 말했다.
“탈맹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도 각개 격파당하기 싫으면 손을 보태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