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4화. 폭풍우가 몰아치다 (5)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고 있네.”
“…….”
“‘그’는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역시 그렇군.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두 가지 경우를 뜻하지. 몸을 사리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 둘을 버렸거나.”
“…….”
“뭐가 되었든, 우리라고 넋 놓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이미 연호정과 제갈문호가 목을 죄어 오고 있어. 특히 연호정, 그놈은 나를 의심하는 눈치였네.”
“…….”
“자네가 도와줘야겠어.”
“어떤 식의 도움을 바라십니까?”
“어떻게 해야 도움이 되겠나? 내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자네를 만나러 왔겠나? 자네의 최고 장점이 무엇인가?”
“…….”
“시간부터 벌어야 하네. 교란 좀 해 주시게.”
“목표는 누구입니까?”
“복호.”
“…….”
“가능하겠나?”
“누구라도 불가능할 건 없습니다. 문제는 뒤처리지요.”
“상황을 잘 보는군.”
“의심의 눈을 돌리는 시간이 빠르면 빠를수록 놈들이 진실에 다가가는 속도도 빨라질 겁니다. 길어도 닷새, 짧으면 사흘 안에 우리가 꾸민 짓이라는 걸 파악해 낼 수 있을 겁니다.”
“사흘…… 사흘이나 가면 다행이군.”
“…….”
“만약 나에 대한 연호정의 의심이 강하다면, 놈은 복호를 조사하면서도 나를 주시할 것이야. 즉, 시선을 분산하는 용도 외에는 이득이 될 게 하나도 없지.”
“그렇다면 왜 저에게 도움을 청하시는 겁니까?”
“죽일 생각이니까. 연호정과 제갈문호를.”
“…….”
“작업이 끝나면 말해 주게. 그다음 날 바로 둘을 죽일 테니까.”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내가 그들을 어떻게 죽일지 궁금한가?”
“그렇습니다. 연호정과 제갈문호는 만만한 놈들이 아니지요.”
“걱정은 내려놓으시게. 이럴 때를 대비해서 다 준비를 해 놓지 않았겠나.”
“설마 ‘그것’을 쓸 생각이십니까.”
“…….”
“그것은 적을 죽이기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최악의 경우 증거 인멸을 위한…….”
“죽고 싶나?”
“…….”
“자네는 그렇게나 죽고 싶나?”
“…….”
“자네는 그럴지 몰라도, 난 아니라네. 그렇다고 본교에 대한 충정이 사라졌다? 그것도 아니야.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서 어떻게든 본교에 도움이 되고 싶어. 그래서 이러는 것일세.”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 그때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해볼 때까지 해보고도 안 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지.”
“…….”
“다 그런 거 아닌가? 우리도 그렇고, 이 땅을 중원이라 부르짖으며 자만심에 도취된 채 살아가는 무림인들도 똑같네. 인생을 건 도박에서 실패하면, 그 끝은 죽음이지.”
“…….”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어 보겠나? 아니면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도주하겠나? 하지만 도주한다고 살 수나 있을까?”
“……오늘 저녁입니다.”
“……!”
“오늘 저녁, 작업을 시작할 겁니다. 일이 터지는 것은 내일 정오 전이 되겠지요.”
“고맙네.”
“그럼 이만.”
그렇게 연락책이 모습을 감추었다.
풍벽자의 눈이 차가워졌다.
“내일 정오는 너무 길어. 일을 치르려면, 동이 트기 전에 끝내는 게 좋지.”
* * *
후우우웅.
창가에서 스며든 바람에 촛불이 흔들렸다.
어두운 밤, 방 안에 홀로 앉아 차를 마시는 연호정의 눈빛은 귀신의 그것을 방불케 했다.
“여름도 슬슬 끝나 가는가.”
산중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제법 차갑다. 그걸 감안해도 여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서늘한 바람에 답답함이 가셨다.
답답함이 가시자, 다시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런 시간은 꼭 필요했다. 여러 사람과 부딪치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자신의 생각이 정리가 안 될 때가 있었다.
지금 이 시간, 이때야말로 생각을 정리할 적기였다.
‘움직일까?’
승현진인이든 복호사태든, 혹은 풍벽자든.
누가 세작이든 자신과의 대화로 인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승현진인보다는 복호사태일 확률이 높다.’
이 부분은 하도 많이 생각한 탓에 복호사태를 떠올리는 순간 정리된 목록들이 머리 한구석에 따다닥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내 직감만 보면, 풍벽자가 의심스럽다.’
이성과 감성의 괴리다.
연호정은 이럴 때 보통 직감을 따르는 편이었다. 젊었을 때, 그러니까 흑암제의 명성을 얻기 전에는 이 직감이라는 게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지만, 무수히 많은 아수라장을 겪고 난 이후에는 육감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생존, 탐색, 살육, 색출, 배신.
흑도를 지배하는 패자로서가 아닌 암투에 능한 그림자 무사로서 속지 않고 속이기 위해, 죽지 않고 죽이기 위해 살아온 환경이 그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려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거와 능력이 있다고 하여 직감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견된 세작의 능력은 지극히 뛰어나다. 그러나 빈틈은 있어.’
연호정의 귀안(鬼眼)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놈에게는 경험이 없을 것이다.’
문파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삼교에서 키운 놈이든, 아니면 중간에 돌아선 놈이든.
놈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세작임을 걸리지 않은 채 살아왔다.
그만큼 능력이 뛰어나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이러한 압박감을 느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무사는 실전을 겪어 봐야 성장하고, 정치인은 정치판에서 굴러 봐야 성장하는 법.
세작도 마찬가지다. 서서히 목을 조여 오는 그 살벌하기 그지없는 압박감을 수도 없이 겪어 봐야 위기 상황에서 올바른 대처를 찾을 수 있다.
적어도 무림맹의 세작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부족했다. 그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경험 부족에서 오는 실수를 바라고 움직이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놈은 최고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해.’
그리고 또 한 가지.
‘놈은 절대 그냥 있지 않을 거야. 거의 무조건 나나 군사님, 혹은 둘 모두를 죽이려 들 것이다.’
끝까지 인내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도주한다?
평범한 세작이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놈은 무림맹의 봉공으로 이 자리에 있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능동적인 일 처리에 익숙하다는 뜻이고, 몸을 내뺀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알 만한 놈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오직 무림맹의 정보 탈취를 위해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세작이다. 무슨 수를 써서건 그 자리를 유지하려 할 것이다.
‘아마도 죽이려 들기 전에 사전 작업에 들어가겠지.’
후우우웅.
불어오는 바람에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누군가에게로 시선을 돌리려 할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승현진인이라면?
‘공공대사를 물 것이고.’
만약 그 사람이 복호사태라면?
‘풍벽자를 물 것이며.’
만약 그 사람이 풍벽자라면?
‘복호사태를 물 것이다.’
연호정의 검지가 연신 탁자를 두들겼다.
‘시간이 중요하다. 놈은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어. 사전 작업이 끝난 직후, 나와 군사님을 죽이려 들겠지.’
만약 풍벽자가 지금 연호정의 생각을 알았다면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연호정은 풍벽자의 사고를 거의 정확하게 읽어 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경험의 차이였다. 풍벽자가 세작으로서 다사다난한 경험을 겪었다면, 지금과 똑같이 행동했을지언정 연호정의 선수를 치려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수까지 염두에 둔 연호정은, 파군각과 군사부 일대에 초고수들과 은신 전문가들을 깔아 둔 상태였다.
‘뭐가 어찌 되었건, 할 수 있는 준비는 전부 해 놨다.’
이제 상대의 반응을 살피면 된다. 늦어도 내일 정오까지 뭔가 일이 터지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연호정의 역공이 시작될 것이다.
“후우.”
생각을 정리한 연호정이 차를 마셨다. 어느새 다 식어 버렸지만, 씁쓸한 맛이 텁텁해진 입 안에 나름의 청량감을 주었다.
“그나저나…….”
사실 연호정은 세작 색출의 준비 과정에 있어서 큰 불안을 느끼진 않았다.
그가 정말 의아하고 불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관리자 놈은 어디에 있는 거지?”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졌다.
“설마하니 내가 잘못 읽었던 걸까? 이 사태, 이 과정에서 관리자가 관여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세작의 움직임을 읽고 세운 작전에는 관리자의 존재도 포함되어 있었다.
분명 놈은 관리자가 있어도 자신이나 군사를 죽이려 할 것이었다. 문제는, 그 관리자가 누구인지 감도 안 온다는 것이다.
“구파나 육가의 수장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그렇다면 세작이 자주 만나는 사람이거나, 자주는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는 ‘누군가’일 가능성이 큰데.”
그리고 그 가능성에는 연락책도 포함된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과연 누가…….”
그때였다.
“대수님.”
창밖에서 당상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움직였다고 하시더군요.”
“어디?”
“무림맹 내성, 음향단(飮香團) 소속 일꾼이에요.”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음향단. 향을 마시다.
무림맹 내성 곳곳에 있는 주루들로 유통되는 찻잎과 주류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외성 너머 하청 업체에서 물건을 받아 유통하는데, 중간에서 독이 든 술과 찻잎을 검수하기 때문에 무공을 연성한 사람들도 은근히 많았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복호사태.’
우연하게도 승현진인, 복호사태, 그리고 풍벽자에겐 저마다 정기적으로 만나는 내성 타 조직 인물들이 있었다.
승현진인은 무기를 유통하는 철방, 복호사태는 음향단이었으며, 풍벽자는 의복단이었다.
복호사태의 경우, 젊을 때부터 차에 일가견이 있어서 찻잎을 고르는 데에 상당히 까다롭다고 하였다. 즉, 복호사태가 음향단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고 따로 찻잎을 받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세작이라면?
혹은, 진짜 세작이 그녀에게 의심을 씌우고자 한다면?
“모용가주에게 전해! 복호사태 쪽으로 붙으라고! 당가주님은 군사부로!”
“구, 군사부요?!”
“시간이 없어. 빨리!”
“네!”
연호정이 벌떡 일어났다.
만약 복호사태가 세작이라면 능동적이고 꾀에 강한 모용가주가 붙는 게 좋다.
풍벽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신이 가야 한다.
당관을 군사부로 보내는 것은, 세작의 공격이 독이나 화약에 집중될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에서 경계가 삼엄하기로 손에 꼽히는 군사부다. 조용한 암살 같은 짓거리로 시간 끄는 짓을 할 리가 없다.
그리고 승현진인에게는 아버지 연위를 보냈다. 승현진인이라면 연가 무공의 화신인 연위가 상대하는 게 가장 좋을 것이다.
파아악!
단숨에 창밖으로 몸을 날린 연호정이 곧장 풍벽자의 거처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는가.”
파앙!
신법을 멈춘 연호정이 날카로운 눈으로 우측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절묘한 장소였다. 숲은 아니었지만, 까마득히 이어진 골목길은 어둡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
풍벽자가 있었다.
“너무 바쁜 게 아니면 나랑 대화 좀 하겠나?”
그 시각.
연호정이 그 존재를 의심하는 관리자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직이는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풍벽자의 단전에 자리 잡은 ‘가면’의 기운이 한껏 붉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너무 빨라. 이건 풍벽자가 급한 게 아니야. 제갈문호가 풍벽자를 제대로 물고 흔든 모양이군.’
천하의 그도 이 일의 주역이 연호정이라는 건 알지 못했다. 풍벽자처럼 제갈문호의 방패막이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어쩔 수 없다.
오랜 세월 공들여 가꾼 세작이지만, 버릴 때는 과감해야 한다. 어차피 이미 무림맹에서 다뤄지는 극비 정보 상당수를 빼돌렸다. 상부에서도 상당히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이 정도면, 조금 아쉽긴 해도 나쁘진 않다.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
그때, 용화진인이 말했다.
“빌어먹을! 내, 이곳에서 나가면 연호정 그놈의 살점을 잘근잘근 씹어 먹을 것이오!”
등천교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러나 무심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맞장구쳤다.
“아들놈을 그따위로 키운 연가 놈도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