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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03화 (502/963)

503화. 정리, 그리고 도전 (3)

촌철살인(寸鐵殺人)이라는 말이 있다.

간단한 말 한마디로 사람의 감정을 뒤흔든다는 뜻이다.

연호정의 말은 촌철살인이라 하기에는 너무 장황했다. 하지만 상대의 허를 찌른다는 의미에서는 분명 촌철살인이라 할 만했다.

평생을 갈고닦은 미소를 두른 채 냉혹한 판단을 주저하지 않았던 남궁인.

그 오랜 세월 가꾸어 왔던 강철의 가면에 조금씩,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협박이 될 수도 있다…… 자네는 말을 희한하게 하는군.”

“종종 듣는 말입니다.”

“자네 직감이 종사들의 인정을 받을 만큼 뛰어나다는 건 잘 알겠네. 하나, 제아무리 대단한 직감이라도 증명할 거리를 들고 와야 대화가 되지 않겠나?”

“가주님께서는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착각?”

어느새 호칭이 봉공에서 가주님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남궁인은 그 미묘한 차이를 읽을 수 없었다. 평정심이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증거를 갖고 찾아왔으면 주의나 부탁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잡아 족치거나, 어떻게든 무너트려 평생 무림맹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지요.”

“……!”

“그저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될 걸, 구질구질하게 말 섞어 가면서 이랬니 저랬니 따지는 것도 구차한 일 아닙니까?”

남궁인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거두었다.

“제 언사가 거칠고 무례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솔직함과 무례는 다르지요. 저 역시 그걸 유념하고 있습니다만, 막상 입을 열 때면 그것을 조절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

“요(要)는, 지금이라도 마음을 달리 드시기를 부탁드린다는 것입니다.”

“자네 말투를 듣자 하니, 그런 마음이 들다가도 쏙 사라지는군.”

“인정하시는 겁니까?”

“말장난하고 싶지 않네만.”

“말장난이 싫다면 허례허식까지 치우고 말씀드리겠소.”

후우욱.

연호정의 몸에서 매서운 기도가 솟아났다.

마냥 깊고 신비롭기만 하던 기도가, 세상을 불태울 것만 같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바뀌었다.

한순간 바뀌어 버린 기도. 그 앞에서 남궁인은 크게 경악했다.

‘이럴 수가!’

연호정의 무공이 종사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의 이 기도만 보자면, 이미 구파의 장문인이나 육가의 가주급을 초월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지금은 죽고 없는 등 장문인과 화산의 용화진인을 어떻게 형당으로 이송했는지 알고 있소?”

“…….”

“나는 한번 표적으로 삼은 목표물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와중에도 놓지 않소. 살점이 뜯어지고 뼈가 가루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고약한 놈이 바로 나요.”

“…….”

“그래서 등 장문인과 용화진인을 그리 다룬 것이오. 앞으로의 무림맹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제 잇속을 챙기거나 방해가 될 사람은 필요치 않으니까. 그래서 치워 버린 것이오.”

남궁인은 순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란 생각이 들었지만, 가슴으로는 저 말에 깃든 진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과격하기 짝이 없는 그 계획에 군사님도 동의하셨소. 모용가주? 말해 뭐 하겠소. 모용가주가 아니었다면 그만한 거물들을 형당에 처박아 둘 수 있었으리라 보오?”

“…….”

“즉, 앞으로 또 그와 같은 사람이 나온다면 당금 무림맹 수뇌부 중 둘 이상이 칼을 뽑을 거란 뜻이외다. 내 말, 이해하시겠소?”

남궁인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말은 좋군. 결국 무림맹을 흑도와 다름없는 독재 체제로 만들겠다는 소리 아니던가?”

“전쟁을 앞둔 군대의 결속과 절대 권력을 쥐고 흔드는 일인 집권 체제의 차이를 모른다면, 그 또한 봉공의 자격이 없소이다.”

“말장난일세.”

“현실을 그리도 모르시오?”

“현실이라 함은…….”

“이런저런 소리로 꾸미고 속여 봐도 결국 현실은 하나요.”

연호정의 눈이 어두워졌다.

“이대로라면, 우린 삼교와의 전쟁에서 패배할 거요.”

“……!”

“중원은 불바다가 되겠지. 황궁과 무림이 무너지고, 결국 삼교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될 거요. 힘없는 사람들은 마음에도 없는 신을 위해 교리를 외워야 할 테고, 뜻 있는 지사들은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아무도 모르는 차디찬 땅 위에서 피 흘리며 스러지겠지.”

남궁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말을 하는 연호정의 표정에서, 눈빛에서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경험자의 처절함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남궁이라고 무사할까?”

남궁인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남궁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자부심 때문에 뿌리까지 뽑혀 나간 문파 수는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지경이라오. 그리고 설마하니…….”

“…….”

“우리가 삼교와의 전쟁에서 패배해도, 남궁만 멀쩡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궁인 역시 삼교가 싫기 때문이었다.

비단 삼교만이 아니었다. 중원 무림을 넘보는 어떤 세력이라도 좋아할 수가 없다. 그것은 무림에 속한 이들, 특히 기득권일수록 그 증오의 깊이가 남다를 것이다.

“설령 전쟁에서 지고 남궁만 살아남았다고 칩시다. 그때부터 남궁이 살아남기 위해서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이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명백한 조소였다.

“삼교의 가랑이 사이로 들어가는 것이지.”

“허튼소리!”

“안 그러면 남궁은 멸망할 거요. 남궁세가에서 키우는 개 한 마리까지 싹 몰살당하겠지.”

“감히 남궁을 모욕하는가? 그런 상황이 온다면 마지막까지 장렬히 싸울 것이다!”

“왜 마지막까지 기다리려 하오?”

“……!!”

“그렇게 뒤가 없는 처절한 싸움을 선택하지 말고, 지금부터 함께 싸웁시다.”

남궁인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분명히 말하겠소. 내가 묵룡부로 가려는 것은, 지금은 흑과 백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 두 집단이 하나가 되어 삼교와 맞서야 할 때임을 알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것은 모용가주만이 아니라 묵룡부주도 알고 있소. 우리 백도가 그렇게 멸시하고 우습게 보는 흑도 연맹의 총수조차도.”

“…….”

“당신 정말로, 흑도의 총수보다도 못한 사람이 되고 싶소? 파멸이 예정된 잠깐의 권세를 그리도 누리고 싶소?”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남궁인이 씹어뱉듯 말했다.

“더 이상 나를 모욕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사람을 나쁘게 봐도 정도가 있는 법이야. 내가 그렇게 앞뒤 분간도 못 하는 바보인 줄 아는 것이냐?”

“그러게나 말이오.”

연호정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내가 욕을 먹고, 당신이 화를 내는 이런 결과라면 다행이오.”

“뭣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 남궁가주로서 대의를 지키고 싶다면 지금 당신이 한 말을 잊지 말라는 것이오.”

“……!”

“누가 욕을 먹으면 어떻소? 내가 바보에 무례하기만 한 병신, 머저리가 되면 어떻소? 가주께서 진정 하나의 대의를 위해 힘을 써 주는 결과가 된다면, 나를 어떻게 욕해도 상관이 없소.”

연호정이 빈 잔을 거꾸로 뒤집어 내려놓았다.

“술 잘 마셨소. 향이 좋더군. 하지만 너무 고급스러운 술이오. 가끔은 쓰디쓴 백주의 매력도 느껴 보시오.”

“그건 또 무슨 헛소……?!”

“백주에는 인생이 담겨 있거든. 독하고 맛도 없는 술이지만, 잘 찾아보면 즐길 거리가 있소.”

“…….”

“향 좋은 술은 과음하게 되잖소? 그 좋던 향도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는 상태가 되면 똥 냄새보다도 역하게 느껴지는 법이지.”

정말이지 말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한다. 하지만 남궁인은 어느새 연호정에게 휘둘리는 자신을 느꼈다.

어느 때든 화제를 자유자재로 바꾸는 것도 모자라 내내 대화를 주도한다.

때로는 무공보다도 무서운 재능이 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화술이었다.

“분명히 말씀드리리다. 권세를 누리고자 한다면, 그대에게 무림맹은 맞지 않소. 그 욕망을 평가할 생각은 없소만, 적어도 터전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책임감 넘치는 열사들을 방해하면 안 되지.”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 주시길 바라오.”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은 방에서 나가 버렸다.

온갖 감정으로 점철된 눈으로 탁자를 바라보던 남궁인은 순간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쾅!

탁자를 후려치는 주먹은 어느새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남궁인의 거처에서 나온 연호정이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잠시 후, 그의 곁으로 한 사람이 다가왔다.

패율이었다.

“다녀왔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어디서 자꾸 그렇게 귀신처럼 나타나시는 겁니까?”

“웃기고 있군.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거야 그렇지요.”

“재수 없는 놈.”

투덜거리던 패율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잠도 안 오길래 대무나 한 판 하려고 찾아왔더니, 남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지.”

“그러셨군요.”

“한데 갑자기 남궁은 왜? 남궁도 사고 쳤냐?”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하하하 웃었다.

“사고 치는 사람만 찾아다니는 사람입니까, 제가?”

“네 입장에선 사고고, 그 사람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겠지. 보통 다 그랬잖느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 틀린 말은 아닙니다.”

남궁인 입장에선 분명 그럴 수 있다.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 적도 없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젊은 후기지수가 아무런 물증도 없이 욕심을 버리라고 소리를 쳐 댔으니.

“그냥 욕심을 버리길 바랄 뿐입니다. 무림맹은 곧 반 봉문 상태에 돌입할 텐데, 봉공씩이나 되는 사람이 사고를 치면 골치가 아프거든요.”

패율의 눈이 빛났다.

“봉문?”

“예, 그렇게 될 겁니다.”

패율은 그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하면, 무림맹이 대외의 활동을 크게 축소한다는 말이렷다?”

“그럴 겁니다. 물론 반 봉문인 만큼 대외 활동을 완전히 금하지는 않겠지요.”

“흐음.”

패율이 턱을 쓰다듬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안 됩니다.”

“뭐가?”

“저는 강량만 데리고 갈 겁니다.”

“내가 뭐라고 하더냐? 웃기는 놈이로군.”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대신, 우연히 임무지가 겹칠 수는 있겠지.”

연호정이 이마를 짚었다.

“저 말고 다른 데서 재미를 찾으십시오. 세상에 싸움판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십니까?”

“싸움판이야 많지. 한데 너만큼 흥미진진한 싸움판을 만들어 주는 놈은 없어.”

“전쟁을 대비하면서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꼭 그리 흥미진진하게 사셔야 합니까?”

“내가 강해지면, 딱 그만큼 전력의 상승이 오지 않느냐? 강해진 아군이 전장에서 활약하는 것만큼 좋을 일이 어디에 있더냐?”

“내가 미쳐.”

“말하는 싸가지는 예전하고 달라진 게 없군.”

“선배의 그 말도 안 되는 투쟁심이라고 다를 것 없군요.”

패율이 피식 웃었다.

“뭐, 그건 차차 생각해 보기로 하고. 어땠냐, 남궁은?”

“글쎄요.”

연호정이 고개를 돌려 남궁의 처소 쪽을 바라보았다.

“남궁인은 무공보다 정치에 뜻을 둔 사람입니다. 이제야 이빨을 드러낸 게 새삼스럽진 않지만…… 무림맹에 더 이상의 사고는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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