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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08화 (507/963)

508화. 전력, 그리고 벽 (1)

번쩍!

허공을 베어 내는 검날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매서웠다.

지극히 깔끔한 일검이었다. 천하 모든 검사들의 교본이 되어도 부족하지 않을 한 수였다.

하지만 연심은 자신의 검을 보며 낙담했다.

‘점점 약해진다.’

검신에 서린 광택이 예전보다 많이 죽었다.

그 광택은 의지의 광택이었다. 적어도 예전에 구사했던 검결은, 지금보다 강하진 않았어도 명확한 목적과 꿈을 담고 있었다.

지금은?

‘공허하구나.’

그녀 정도 경지에 이르면, 아니 굳이 그 정도 영역에 도달하지 않아도 일격에 자신의 색깔과 깊이를 담아내는 고수가 많다.

그녀에게는 색깔이라는 게 없었다. 그나마 있던 흐릿한 색조차, 지금은 더욱 희미해져서 지나치게 투명한 감이 있었다.

팅.

연심의 검이 바닥에 닿았다.

근래 들어 무공을 수련하고자 하는 욕구조차도 줄어들고 있었다. 시원하게 땀을 흘려 본 지가 언제인지 가물가물할 지경이었다.

“하아.”

한숨을 몇 번이나 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 한옆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군.”

깜짝 놀란 연심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양천이 있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수련을 할 바에야 차라리 검을 뽑지 않는 게 더 나을 걸세.”

연심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양천을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아니 보타암에 있어 양천은 원수 중의 원수다. 어떤 의미로 그는 수백 년 역사의 보타암을 갈기갈기 찢어 버린 원흉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화를 낼 수도, 묵룡부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구나.’

말없이 자신을 보는 연심의 얼굴을 살피던 양천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의 재능을 높이 샀네. 성정이나 목표야 경험과 깨달음으로 바뀌기도 한다지만,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야. 재능 없이 노력만으로 정점에 이른 자들도 있지만, 그런 특수한 경우에 더는 목을 매고 싶지 않았다네.”

“…….”

“하지만 지금, 나는 내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연심의 눈이 흔들렸다.

혼란 가득한 그녀의 눈빛과 달리 양천의 눈빛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자네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뭔가?”

“…….”

“스스로를 붙들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로 있고 싶다면, 어디 계속 그래 보시게.”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보는 이의 심장을 철렁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나는 약자도 품어 주고, 임무에 실패한 부하도 품어 주는 편이네. 하지만 의지박약에, 자신이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반편이는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

“자네를 귀하게 본 내 눈이 틀렸다면, 그저 틀렸다고 인정하면 그뿐이네. 그러나 자네는 치워지겠지. 화약 없는 화포는 창고에 자리만 차지하는 고물에 불과해.”

연심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게, 그게 당신이 할 말인가요?”

그녀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다. 이런 발언을 듣고도 입 한번 떼지 못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이다.

양천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하면? 자네들 문파를 무너트린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왜 그 검을 겨누지 못하나? 죽는 게 두렵나?”

“…….”

“강량이라는 녀석이 있네. 흑도의 명문 출신으로, 놈의 문파는 내 손에 무너졌어. 부모도, 형제도 모두 죽었지.”

갑자기 강량이라는 검사는 왜 운운하는가?

“운이 좋은 건지 뭔지, 연호정 그놈이 채 가더군. 다시 봤을 때 그놈이 내게 뭐라고 한 줄 아나? 단 한 순간이라도 날 짓누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거라고 했네. 내 목을 따기 위해서.”

“……!!”

“그놈은 곧 연호정과 함께 본부에 파견을 올 거야. 내 목숨을 노리지만, 그 전까지는 본인이 해야 할 일, 혹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지. 심지어 원수의 휘하에서 말이야.”

가만히 연심의 얼굴을 보던 양천이 몸을 돌렸다.

“연호정의 부탁이 있었네. 제 놈이 돌아오기 전까지 보타의 후예들을 잘 돌봐 달라더군.”

“…….”

“그건 약속일세. 그리고 난 어지간해선 약속을 어기지 않아. 하니, 그 녀석들이 올 때까지는 본부의 식량을 축내든 어쩌든 상관 않겠네.”

양천의 뜻은 분명했다.

연호정과 강량이 온 이후에는 쫓아내겠다는 뜻이었다. 만약 계속 있으려거든, 그 전에 바뀌어 자신에게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비록 연심은 세상을 잘 모르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저따위 발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여기는 강호고 무림이었다. 평범한 세상과는 동떨어진, 이치와 상식이 존재함에도 정의 내릴 수 없는 기괴한 법칙을 주축 삼아 살아가는 광기 어린 무사들의 세계였다.

심지어 묵룡부는 흑도 무림을 대표하는 연맹체였다. 자선과 평화, 협의와 도리를 일선으로 지키는 집단이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머리로는 양천의 행동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면서도 가슴으로는 자신이 어중간하고 우유부단하다고 느끼던 연심을 자극했다.

후우우욱.

연심의 검에 강렬한 기운이 연기처럼 타올랐다.

치솟는 분노와 상한 자존심이 그녀의 얼굴을 발갛게 데웠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양천을 쫓아가 생사결을 제안하고 싶었다.

하지만.

‘…….’

연심은 탄식했다.

“도대체 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연심과는 전혀 다른 사람도 있었다.

‘흐음.’

뒷짐을 진 채 정안을 보는 양천의 얼굴에 은근한 감탄이 일었다.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저리 깊어졌는가.’

연호정이 떠난 뒤, 정안은 검 한번 제대로 휘둘러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수련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하루 대부분을 명상으로 지낸 그녀의 기도는 예전보다 훨씬 더 깊고 가지런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리고.

번쩍!

한 번씩 몸 주변에서 폭발하듯 번쩍이는 그녀의 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풍성하고 빈틈없는 기파를 발산했다.

마음이 심란하여 명상에 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공을 성장시키기 위한 명상이었던 것이다.

검을 휘둘러 연마할 단계는 지났다. 그녀는 그렇게 판단했고, 적어도 그 방법이 그녀에게는 옳았다. 그래서 짧은 순간, 이렇게까지 기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연호정이 눈여겨보았다…… 다르긴 다르다는 건가.’

양천은 내심 씁쓸함을 느꼈다.

자신이 선택하고 가지려 한 연심은 특유의 날 선 재능마저도 꺾이고 있었다. 한데 연호정과 함께 왔던 정안이라는 검후 후보는, 연심보다 재능은 부족할지라도 그사이 벌써 발전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사람 보는 눈이 다른 것인지, 아니면 내가 틀린 것인지.’

애초에 양천 역시, 제자들이 스스로를 증명하기 전까지는 완전한 사제지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양천의 방식이었고, 또한 흑도의 방식이기도 했다. 가르쳐서 발전할 수 있는 눈치라면, 그냥 죽든지 아등바등 이겨 내서 살아남든지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결과적으로 정안은 충분히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허허.”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

스르륵.

정안이 눈을 떴다. 양천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이다.

양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군. 나 때문에 명상이 깨졌나.”

“아닙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안이 양천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여기는 어인 일이신지요?”

양천이 재미있다는 듯 살짝 비꼬는 어조로 답했다.

“묵룡부 전체가 나의 영토라네. 어딜 가든 내 마음이고, 가끔 이렇게 별생각 없이 여기저기 들러 보기도 한다네.”

“그런가요.”

“그렇다네.”

정안은 어떻게 나올 것인가. 연호정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검후 후보는 과연 어떤 면모를 보여 줄 것인가.

스르륵.

정안은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둘러보고 가시지요, 그럼.”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명상에 잠겼다.

대범한 척하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혼은 순식간에 무의식의 저편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적지 안에서, 그것도 적의 수장이 보는 앞에서 진짜로 명상에 들어 버린 것이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괴물 같은 배포로고.’

저런 모습은 자신조차도 쉽게 보일 수 없는 것이었다.

상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긴장감 때문에라도 저런 행동은 불가능하다.

그런 놀라운 일을, 연심보다 못한 재능의 저 어린 녀석이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허어.’

양천은 속으로 탄식했다.

‘정말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로군.’

이내 그가 몸을 돌렸다.

정안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술이 간절해졌다.

* * *

“흐음.”

패율의 목소리에 연호정은 순간 집중에서 깨어났다.

“벌써 왔구만.”

그렇다. 일행은 벌써 묵룡부의 본단 십 리 앞까지 도착해 있었다.

패율이 주먹으로 연호정의 팔뚝을 쳤다.

“이 자식, 뭐 그렇게 생각이 많은 거냐? 너답지 않게 긴장한 건 아니겠지?”

“예?”

“중간에 계속 멍하니 있길래 내가 선두에 섰다.”

“아!”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죄송합니다. 이것저것 생각 좀 하느라.”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긴장한 건 아닐 테고,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했냐? 너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셨어.”

“벌써 이틀이나 지났습니까? 어쩐지 목이 마르더라니.”

연호정이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말도 많이 힘들었겠습니다.”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군. 몇 번을 쉬었다, 인마.”

“……그랬습니까?”

패율이 혀를 내둘렀다.

“극한의 집중 속에서도 주변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는 놈이, 이번에는 완전히 긴장을 놓은 거냐?”

긴장을 놓은 게 아니었다.

패율과 강량을 믿고, 그간의 어중간했던 의식을 완전히 스스로에게 집중한 것이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굳이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무공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습니다.”

“무공?”

“예. 근래 또 새로운 걸 익혀서요. 균형을 맞추려면 없는 시간도 쪼개서 연마해야지요.”

딱히 운공을 하지 않아도, 신공의 구결을 더듬어 보고 신단의 기를 활성화시키는 것만으로도 검극사기와 신장기의 성취가 올라간다.

덕분에 그 잠깐 새에 두 신공의 성취가 높아졌다. 벽라진결과 용포기의 이해도가 완벽했다고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무시무시한 연성 속도라 할 수 있겠다.

‘연가신단 덕분이다.’

모든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 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만약 신단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 연성 속도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래도 한참 부족하지만.

물 몇 모금으로 목을 축인 연호정이 말했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십 리밖에 안 남았으니 빠르게 가시지요.”

“좋지.”

그렇게 세 사람이 말을 몰고 묵룡부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흐음.”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느꼈냐?”

연호정이 한가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즉 느꼈지요.”

강량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는 방금 막 느꼈습니다.”

패율이 고개를 저었다.

“놀라운 힘이로군.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일품이야. 장문 사형만큼이나 강한 것 같은데.”

“누군지 알 것 같군요.”

“아는 사람이냐?”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는 기운이긴 합니다. 묵룡부주의 사자공(獅子功)을 기반으로 한 내공이군요.”

다시 일각 뒤.

일행의 앞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뉘쇼?”

뒷짐을 지고 선 사내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답했다.

“엽성(燁星).”

“이름 말고, 누구시냐고.”

상대의 거침없는 언사에 흥미가 동한 것일까?

사내, 엽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투왕 양천의 대제자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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