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화. 전력, 그리고 벽 (5)
태사의의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양천의 모습은 무척이나 나른해 보였다.
“해서, 마음을 정했나?”
연심은 대답 없이 흐린 눈으로 양천을 올려다보았다.
양천은 내심 혀를 찼다.
‘좀 나아질 줄 알았더니만…… 정말이지, 저런 정신력으로 잘도 저런 경지에 올라갔어.’
저래서야 검이 제아무리 날카롭다 한들 써먹을 수가 없다.
물론 부선을 대하는 것처럼 애정을 갖고 어떻게든 가르쳐 본다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천은 그럴 의지가 없었다.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는 자, 언제든 땅바닥으로 추락할 수 있는 법이다.
부선은 부족한 재능을 독기 가득한 노력과 무서운 집착으로 메웠다. 만약 부선이 첫째와 셋째의 재능을 부러워하기만 했다면, 지금쯤 셋째보다도 못한 무력으로 빌빌거렸을 것이다.
양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손톱만큼이라도 나아진 줄 알았거늘, 오히려 더 나빠졌군.”
“…….”
“패배자를 다독이는 취미 따위는 없네. 이만 꺼지시게.”
연심의 눈이 충혈되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저 역시 묵룡부에서 나갈 생각으로 온 거예요.”
“멀리 안 나가겠네.”
“하지만 그 전에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어요.”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부탁? 어떤 종류의 부탁이든, 내가 그걸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네만.”
“비무를 신청합니다.”
“음?”
스릉.
연심의 엄지가 검집에서 검을 밀어 냈다.
“묵룡부주에게 정식으로 비무를 신청합니다.”
“……비무?”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던 양천이 돌연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우웅! 우우웅!
대전을 꽉 채우는 양천의 웃음소리는 무지막지한 공명을 일으켰다.
연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양천의 웃음에 섞인 내공은 가히 듣도 보도 못한 수준의 영역에 거하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만으로도 내부가 진탕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 쌓아 온 무공만큼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참을 웃던 양천이 돌연 표정을 굳혔다.
“주제도 모르는 것!”
콰드드드득!
연심의 두 발이 순간 복숭아뼈까지 바닥으로 파고들었다.
콰지직!
푹 꺼진 그녀의 두 발 주위로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붉은 융단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이이이잉.
연심의 몸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다. 양천의 무지막지한 내공력에 대항하기 위해 그녀 역시 보타의 신공을 끌어 올린 것이다.
양천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일부러 가공하여 뽑아내는 살기가 아닌 진짜 살기다. 양천은 진심으로 연심에게 실망했고, 진심으로 그녀에게 살기를 품었다.
“멋대로 자포자기 심정이 되는 거야 너의 자유지만, 죽을 자리조차 찾지 못해 타인의 손을 빌리려는 행태는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구나!”
우우우우웅!
수천 개의 바늘이 귀를 뚫고 들어와 뇌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분노한 양천의 음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압박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한 농도를 자아내고 있었다.
연심의 몸이 땀으로 젖어 들었다.
성천십삼좌가 무림 최강을 논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자신과 양천의 무력 격차가 바다만큼 넓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주먹을 내지르지도, 손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진기의 압박만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이것이……!’
연심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중원 최강을 논하는 성천의 힘!’
양천이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무것도 못 하겠나? 혼란 가득한 마음을 수습하기 힘든가? 그 과정이 너무나 힘들어, 이제는 고민조차 하기 싫어진 건가?”
“…….”
“그렇다면 네가 든 그 검으로 스스로의 목을 찔러라! 나는 죽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 하는 얼치기 애송이의 목숨을 대신 취해 줄 정도로 못난 사람이 아니야!”
양천이 손을 휘둘렀다.
순간 연심은 엄청난 힘이 자신의 몸을 둘러싸는 것을 느꼈다.
휘이이익! 콰앙!
연심의 몸이 붕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무지막지한 내공을 이용, 극에 달한 허공섭물의 기예로 대전의 문까지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한데 그 와중에 방향을 틀어 좌측 벽에 틀어박혔다.
어떻게든 저항은 한 것이다. 확실히 무공 하나만큼은 쓸 만했다.
“꺼져라.”
울컥!
바닥에 내려온 연심이 한 움큼 피를 토했다.
그녀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엄청나다!’
지금 자신의 무공은 구파일방 장문인보다도 높은 경지라 들었다. 그것은 양천조차 인정한 바였다.
그런 자신을, 허공섭물의 기예만으로 이 멀리까지 날려 버린 것이다.
‘괴물……!’
인간이 아니다.
무공이 극에 이르러, 기(氣)의 조화만으로 강호의 흔치 않은 고수를 날려 버리는 기예다. 이 정도면 무공이 아니라 초능(超能)의 영역이었다.
그렇다. 상대는 자신을 손가락 하나로도 죽일 수 있는 천외천의 강자였다.
그렇기에 필요했다. 저자와의 비무가.
입가를 닦은 연심이 다시 융단 위로 올라섰다.
양천의 얼굴에 조소가 깃들었다.
“그렇게 죽고 싶은가?”
“다시 부탁드려요.”
연심이 포권을 취했다.
양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묵룡부주, 투왕께 비무를 신청합니다.”
“…….”
양천은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스르륵.
대전 전체를 장악했던 흑사자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엄청난 범위를 꽉 채웠던 기를 찰나지간에 수습한다. 양천의 능력은 보면 볼수록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졸자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두 눈 가득 혼란을 담고 있으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보여 주는 지금의 넌 확실히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고 볼 수 있다.”
“…….”
“하지만 묘하군. 너의 그러한 태도는 여전히 못마땅하지만, 다시 살펴보니 예전의 머저리 같은 모습과는 조금 달라.”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나와 싸우고 싶나?”
“그렇습니다.”
“이유는?”
이유를 물었다.
연심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원수이자 강호의 거인이 비로소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다. 그녀는 승부수를 던졌다.
“일검(一劍)입니다. 단 일검이라도 부주의 몸에 닿는다면, 제게 당신의 심득을 가르쳐 주십시오.”
“호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양천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나의 심득을 가르쳐 달라?”
“네.”
“내 제자가 되겠다는 뜻이더냐?”
“당신은 보타암을 무너트린 원흉이며 당연히 저에게도 원수와 같습니다. 비록 지금의 혼란스러움을 이겨 내지 못해 스스로의 삶조차 주체적으로 이끌지 못하는 상황일지라도, 원수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양천이 피식 웃었다.
“내 제자도 아닌 사람에게 심득을 전해 줄 거라 생각하느냐?”
“네.”
“왜 그리 생각하지?”
“부주께서 보타암을 그 지경으로 만들고 저를 빼앗으려 한 것은, 저의 전력이 쓸 만하다는 판단에서였지요.”
“그랬지.”
“또한 그때 말씀하셨습니다. 최고의 검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보타암에서 나와 부주의 밑으로 들어가면, 폭발적인 성장을 약속한다고 하셨지요.”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러했지. 하지만 그것은 네가 보타의 이름을 버리고 내게 올 때의 일이다. 그 무엇도 포기하지 않은 채 얻을 것만 얻고 나가겠다? 거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지.”
“그래서 일검입니다.”
연심이 검을 흔들었다.
“강량이라는 검사가 그랬다지요? 훗날 부주를 이길 수 있는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겠다고요.”
“…….”
“저는 부주의 손발이 되어 드리지요. 부주께서 명령을 내리면,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겁니다.”
“호오.”
“하지만…… 이번 비무에서 저의 검이 부주의 몸에 닿지 못한다면…….”
연심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십 년간 주종의 예를 다하겠습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던 모양이다. 제 딴에는 그 고민이 치열했을 것이고, 그 치열한 고민 끝에 이러한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양천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른다면, 조언대로 따라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거기에 십 년 인생을 걸었다면, 나름대로 계산도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나 또한 마음이 급했던 것일는지도 모르지.’
연호정이 선택한 정안,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연심.
그 두 사람의 차이는 명백했다. 정안은 최악의 환경에서도 자신이 할 일을 찾았고, 연심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더더욱 연심에게 실망했다. 그 실망감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양천은 다시 연심을 보았다.
고개를 든 연심의 눈은, 여전히 혼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결심의 빛도 보였다. 이번 한 번의 비무로 자신의 십 년을 내걸었다. 뒤로 무를 수도 없는 싸움인 것이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와의 비무, 받아들이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당장…….”
“무뎌진 검날로 내 몸은커녕 옷깃이라도 벨 수 있을 성싶으냐?”
“네?”
양천이 턱으로 대전의 문을 가리켰다.
“열흘의 시간을 주겠다. 그 안에 무뎌진 검을 날카롭게 벼려라. 그 꼴 보기 싫은 눈빛부터 바꾸도록 해. 그러지 않으면 무슨 수를 써도 내 몸에 검을 박진 못할 것이다.”
연심의 눈이 흔들렸다.
지금 싸우면 무조건 유리한 비무일 텐데도 상대는 자신에게 시간을 주었다.
완벽한 몸을 만들고, 완벽한 무(武)를 다듬어라.
비무에서의 유불리를 떠나, 준비되지 않은 자와는 손속을 나누지 않겠다.
‘크구나.’
이것이 바로 절대자의 자세였다. 당장 내일 하늘이 무너진다 한들, 왕의 격을 떨어트리는 승부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연심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양천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을.
도덕과 윤리를 떠나, 상대는 자신이 잴 수 없는 거물인 것이다.
연심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열흘 후에 뵙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연심이 대전을 나섰다.
태사의에 몸을 묻은 양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걸 느꼈다.
“재미있군. 무너지기 직전이지만, 또한 이 정도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내가 택한 검이지.
멋진 반전이었다. 크게 실망했지만,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양천은 열흘 후의 비무가 기대되었다.
그때였다.
“부주님. 무림맹 파견원 연호정 대수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오, 들라 하라.”
쿠구궁!
문이 열리고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오셨는가?”
“왔소. 한데…….”
대전 안을 한 차례 둘러본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사람을 너무 괴롭힌 것 아니오?”
벽에 난 흔적, 움푹 꺼진 융단만 봐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유추해 낸다.
양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실망했지. 하지만 당분간 지켜봐도 될 것 같네.”
“그렇소?”
“그렇다네.”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시군. 왜? 저치가 부주의 아래로 들어오겠다 하더이까?”
날카로운 놈.
“조건을 걸더군. 웃기지도 않는 조건이지만, 적어도 나름의 인생을 걸어 본 선택이었다네.”
“그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군.”
“허허허.”
연호정은 생각했다.
‘정안에게 떠난다고 했던 것은, 묵룡부가 아닌 보타암을 떠난다는 뜻이었나.’
여러모로 예측이 안 되는 녀석이다. 하기야, 사문이 무너지고 스승은 타락했으며, 원수의 성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몇 달을 지냈다.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으리라.
“그나저나, 예까지는 어인 일이신가? 여독을 풀지 않고.”
“연심이 정안에게 떠난다고 말했다는 얘길 들었소. 그걸 막으러 왔는데, 상황을 보니 안심해도 될 것 같군.”
“떠난다…… 틀린 말은 아니지. 다만 본부를 떠나는 게 아닐 뿐이야.”
“그렇소.”
양천이 피식 웃었다.
“왜? 연심이 떠나면 보타암을 규합하여 강호에 혼란을 드리울까 싶었나?”
“확실히 부주는 눈치가 빠르시오.”
연호정이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어쨌든 연심의 일이 마무리됐다면, 이왕 온 김에 우리 일 얘기나 다시 해 봅시다.”
“좀 쉬게. 가끔 보면 자네는 업무 중독인 것 같아.”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부주께서도 그리 생각하지 않소?”
“그건 그렇지.”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생각을 해 봤는데, 창왕은 아니오.”
“음?”
“다른 성천의 강자들을 모두 하나로 만들 생각이라면, 창왕부터 끌어들여서는 안 될 것 같단 말이오.”
양천의 안광이 번뜩였다.
“하면, 자네가 생각하기엔 누구부터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할 것 같은가?”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삼군(三君)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