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13화 (512/963)

513화. 전력, 그리고 벽 (6)

삼군.

성천십삼좌에서 십 인의 신선제왕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을 뜻하는 별호였다.

십 인의 신선제왕보다는 확연히 아래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의심할 나위 없는 중원 최강의 고수들이 삼군이었다. 실력 차이가 제법 나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성천의 이름으로 묶인 것은, 그만큼 그들의 무력이 불가해의 수준에 올랐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선제왕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강호에서 원로 이상의 대접을 받는 진짜 고수들.

- 혈옥마군(血玉魔君) 곽준(郭俊)

- 광혼귀군(狂魂鬼君) 곡경(曲硬)

- 백병신군(百兵神君) 막원(幕源)

그들의 연배는 환갑에도 이르지 못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비슷하거나 더 어린 나이라는 것이다.

그런 나이로 성천의 칭호를 얻었다. 재능만큼은 신선제왕과 동급, 혹은 이상이라고까지 평가받는 괴물들이 삼군이었다.

“삼군이라.”

양천이 손가락으로 수염을 쓸었다.

“혈옥마군 곽준은 혈청신마나 마선 혁련휘처럼 마도를 표방하고 있네. 누구한테 사사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무위만큼은 진짜지.”

“그렇다고 들었소.”

“광혼귀군 곡경. 녀석은 전형적인 사파야. 하지만 스스로를 흑도인이나 사파라고 말한 적은 없지.”

“본 적이 있소?”

“묵룡부를 세우기 전에 한 번 봤더랬지. 데려오고 싶었거든.”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신선제왕의 일인 투왕과 삼군의 일인 귀군의 만남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정보가 돌지 않은 것을 보면, 비밀리에 접근했던 모양이었다.

“어땠소?”

양천이 얼굴을 구겼다.

“싸가지가 없더군.”

참으로 그다운 평가였다.

“대뜸 싸워 보자며 주먹부터 날려 오는데, 어찌나 황당한지 한 대 맞을 뻔했지. 그렇다고 싸움에 미친 놈 같지는 않았네. 그저 내가 자신보다 윗길로 평가받는 게 싫었던 게야.”

“명성에 연연하는 사람이라는 거요?”

“무림인 중에 명성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면에 있어선 참 알기 쉬운 놈이긴 했네.”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첫인상이 정말 별로였던 모양이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그 승부는 어떻게 되었소? 설마 지진 않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 서른 합 만에 때려눕혔더랬지. 길게 끌면 팔다리가 다 부러져도 잇자국을 내려고 덤빌 기세였어.”

“용케 살려 두셨군.”

“그래도 같은 흑도 아닌가. 지금도 휘하로 들일 생각은 요만큼도 없지만, 미래란 어찌 변할지 모르는 거니까.”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그걸 떠나서, 놈의 재능은 성천의 이름을 달기에 부족함이 없었어. 그때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 놈이 얼마나 성장했을지는 나조차 감이 안 오는군.”

“흠.”

“사실 말이 서른 합이지, 빈틈을 노리지 않았다면 백 합도 넘길 수 있는 상대였네. 신선제왕과의 차이는 분명했지만, 찰나의 실수로 승패가 뒤엎어질 수도 있었어.”

승부란 그런 것이다. 제아무리 그들의 경지가 드높다 한들 말도 안 되는 변수가 터지면 뜻밖의 결과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연호정과 양천이 싸운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룬 경지와 진기, 무공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연호정의 패배가 거의 확실하지만, ‘기적’ 수준의 운과 변수가 작용한다면 양천이 질 수도 있다.

승부에 십 할 확률은 없다. 그래서 싸움이 재미있는 것이다.

“하면 혈옥마군은?”

“놈을 본 적은 없네. 하지만 믿을 만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십 년이 지나면 혈옥의 이름이 신선제왕과 동급으로 불릴 것이다. 하지만 십오 년이 지나면 혈옥이 신선제왕 윗줄에 놓일 것이다, 라고.”

“호오.”

“그 친구는 무공이 별로 강하진 않네. 하지만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진짜지.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사실일 확률이 높아.”

연호정은 그 친구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그럼 막원은 본 적이 있소?”

“없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놈의 비밀을, 정확하게는 ‘놈들’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나를 포함, 극소수에 불과할 게야.”

“그럴 거요. 무림맹도 모르는 사실이니까.”

연호정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일전 양천이 건넨 소현립에 관한 정보 문서였다.

“설마 막원이 소현립의 사제였다니.”

그렇다.

창왕 소현립은 스승도, 사형제도, 제자도 없이 창 한 자루에 목숨을 건 구도자라 하였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에게는 사제가 있었고, 지금은 그 사제와 사이가 틀어진 상황이었다.

백병신군 막원.

삼군의 일인이자 소현립과 동문수학했던 사제가 그였다.

“그들 사형제 사이가 왜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네. 하지만 괜찮겠는가?”

“뭐가 말이오?”

“자네는 삼군부터 회유하겠다고 했네. 만약 막원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다면, 창왕이 함께하지 않을 확률이 높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뭐, 그건 그렇지만.”

연호정이 턱을 괴며 말했다.

“어쨌든 삼군부터 시작하겠소. 혈옥마군의 소재지는 모를 거고, 광혼귀군은 마뜩잖아하는 것 같으니 백병신군부터 노려 보겠소.”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양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나? 굳이 삼군부터 시작해야 할 이유가 있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건 차차 알려 드리리다. 뭐가 되었든, 그들 모두가 우리 편으로 돌아선다면 좋을 일 아니겠소.”

“흐음.”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냥 알려 주기 싫은 것일 수도 있지만.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하면 막원부터 시작하도록 하세.”

“그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네. 막원은 자신의 위치를 굳이 숨기려 들지 않았으니까.”

“다행이구려.”

“다만, 회유를 하려면 놈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좋겠지. 한 달만 기다리게. 최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 주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한 달은 너무 길어. 열흘 뒤에 출발하겠소. 그에 대한 정보는 시시각각 전달해 주길 바라오.”

“좋을 대로 하게. 한데 열흘은 왜?”

“익숙해지고 싶은 병기가 있어서 말이오.”

“병기?”

“창.”

양천의 눈이 빛났다.

“자네, 창술도 할 줄 아나?”

“당연하오. 지금 들고 있진 않지만, 내가 어떤 병기를 휘두르고 다녔는지 알지 않소?”

“흠, 그렇지. 광룡부라 했던가?”

“그렇소.”

“하긴, 그만한 중병이자 장병을 다루려면 창술의 달인이 되어야 하지. 생각해 보면 자네만큼 창을 잘 다루는 사람도 찾기 힘들겠군.”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왜? 막원과 소현립을 회유할 때 창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순수한 무열(武熱)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소. 근래 기존의 병장기가 통 손에 붙질 않아서.”

“손에 붙질 않는다…… ‘그’ 영역에 오르기 전부터 그랬겠지?”

“짐작 가는 게 있소?”

“있지. 하지만 알려 줄 생각은 없네.”

연호정의 성장을 마뜩잖아하는 게 아니었다. 말해 줘 봤자 이해도 못 할 것이고, 그런 문제는 홀로 돌파하는 게 더 낫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련장이나 제공해 주시오. 창도.”

“물론 그래…….”

고개를 끄덕이던 양천은 순간 턱을 쓰다듬었다.

“창술이라?”

“음?”

“자네, 의정군을 이끌면서 기마 전술에도 꽤 능하지 않은가?”

“기마 전술에 능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마전(騎馬戰)에는 제법 능한 것 같소.”

“그래?”

양천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연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또 뭘 시키려고…….”

“이왕지사 본부에 파견을 왔으니, 그럴듯한 지위 하나쯤은 가져가는 게 좋겠지.”

양천이 씨익 웃었다.

그의 미소가 짙어질수록 연호정의 표정은 점점 뚱해져만 갔다.

* * *

“연호정?”

“그렇다네.”

황석태(黃晳太)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것 맞소? 연호정을 본단의 특임 부관(特任副官)으로 들인다고?”

백서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임시일세. 또한, 그 위치의 특수성에 기인하여 자네보다 아래가 아닐세. 말이 부관이지, 결국 그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부주님뿐이니까.”

“그럼 더 볼 것도 없겠군.”

황석태가 몸을 돌렸다.

“거절하오. 다른 부대를 알아보시오.”

“부주님께서 직접 내린 명령일세.”

황석태의 몸이 움찔했다.

제아무리 그라도 묵룡부의 총수인 양천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거부는 항명이고, 항명은 곧 죽음이다.

다른 걸 떠나서, 황석태는 양천을 존경했다. 그 무력도, 배포도, 위치도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실력이 좋은 건 알겠지만 아직 서른도 안 먹은 젊은 놈이다. 그런 놈을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양천도 이해하기 어려웠고, 양천의 총애를 받는 연호정이라는 위인 자체가 싫었다.

“대체 왜 우리 부대요?”

“연호정은 도끼와 철쇄 외에 창술에도 일가견이 있다더군. 그 무력을 생각하면, 아마 본부에서도 당해 낼 사람이 몇 없을 걸세.”

“그걸 말이라고……!”

“더하여, 연호정은 백도 무림맹의 대표일세. 흔한 부대에 처박아 두고 홀대할 수 없는 위치이지.”

백서는 그답지 않게 좋은 말로 황석태를 달랬다.

“자네가 이해하게. 자네 부대는 묵룡부 최강이 아니던가.”

달래려고 하는 말이지만, 그 말 자체가 거짓은 아니었다.

용아철기단(龍牙鐵騎團).

현재 묵룡부가 보유한 최강의 전투 부대였다. 또한 무림의 전투 부대답지 않게 기마 부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기마술에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이 말을 타지 않는 백병전에도 통달한 전사들이어서, 안 그래도 막강한 전력을 더욱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그 수는 일천이며, 철기단의 단주 황석태의 무공은 초절정의 영역에 도달했다. 묵룡부가 그 존재를 숨긴 강자 중 하나가 그였다.

가만히 백서를 보던 황석태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부주님의 명령이니 받겠소. 하지만 그놈이 본단에 어울리는지 아닌지 그 자격 여부는 내가 판단하겠소. 어떻게 다루는지는 관여치 마시오.”

“그건 알아서 하시게.”

백서가 돌아간 후, 황석태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용아철기단은 병력의 특성상 묵룡부 내부로 들어가는 일이 적었다. 대부분이 평지와 산악 훈련을 반복하며, 당연히 야외에서 숙식하는 날이 많았다.

‘천하제일 후기지수라고?’

벽산호장이라는 별호로 중원을 뒤흔들고 있는 정파 최강의 후기지수.

황석태의 눈이 차가워졌다.

‘애송이.’

재능도 출중하고 안목도 놀라워서, 부주님조차도 감탄해 마지않는 존재라 하였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철기단에는 철기단만의 규칙이 있었다.

‘쓸데없이 사고 치지 않게 기부터 눌러 놔야겠군.’

반 시진 후.

멀리서부터 세 명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왔나.’

황석태는 한눈에 누가 연호정인지 알아보았다. 대전에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윽고, 연호정 일행이 황석태 앞에 도착했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연호정이오. 당분간 신세 좀 지겠소.”

황석태가 턱을 치켜들었다.

“찬밥 신세가 되고 싶지 않다면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

차갑고 오만한 태도였다. 연호정의 위치를 생각하면 대뜸 하대하는 것도 무례한 일이었다.

강량의 눈빛이 변하고, 패율의 기도가 사나워졌다.

반면 연호정의 표정은 지극히 여유로웠다.

“무인이 쓸모를 증명할 수단은 무력뿐. 내 무공을 보고 싶은가?”

황석태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백도엔 백도의, 흑도엔 흑도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는 흑도의 방식에 누구보다도 익숙한 남자였다.

“애들 모으시게. 보여 주지, 내가 누구인지.”

“……?!”

“아니면 지금 그대가 내 창을 받아 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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