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화. 전력, 그리고 벽 (7)
백도에서 이런 말을 하면 누구라도 도발로 받아들일 것이다.
실제로 도발이 맞기도 했다. 하지만 연호정의 도발 아닌 도발은 흑도에선 흔하다 못해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황석태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 그것만으로도 인상이 확 변하는 듯했다.
“백도의 샌님이 부주님을 어떻게 꼬드겼는지 궁금했는데, 제법 그럴듯한 배포를 가지고 있었군.”
“질투 나나?”
황석태의 눈이 차가워졌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앉는다 했지. 하지만 질투 많은 사내의 한은 한겨울의 눈도 녹일 만큼 독한 법이야.”
“…….”
“사내놈들 질투는 진저리가 나. 상대가 아니꼽다고 생각할 시간에 주인 앞에서 꼬리라도 한번 흔들어 보는 걸 추천하지.”
이번 도발은 첫 도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매서웠다. 패율조차 나직이 휘파람을 불 정도였다.
하지만 황석태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주둥이 놀리는 실력 하나만큼은 성천의 강자 찜 쪄 먹는 수준이군.”
“같은 뜻이라면 장점이 많다고 표현해 주게.”
연호정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황석태는 상대의 그 여유가 싫었다.
“네놈은 한 번 부주님을 속였다.”
황석태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묵룡부의 중진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연호정은 묵룡부에 세작질을 하러 왔던 놈이다. 말하자면 믿을 수 없는 놈이라는 뜻이다.
특히나 양천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황석태에게 있어, 연호정이란 존재는 썩은 상처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화농과도 같았다.
“부주님께서 널 용서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다. 나는 널 인정하지 않아.”
“마음대로 해라. 그건 그렇고…….”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창을 받아 주지 않을 텐가? 설마 수하들을 앞세워 내 무력을 평가하고 싶은가?”
“…….”
“그게 아니라면 저기 꽂혀 있는 병장기를 들고 오게나. 수하들 앞에서 개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지금이 기회야.”
도발이 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츠츠츠.
황석태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제법이군.’
지극히 야수적인 살기지만, 또한 완벽하게 정제되어 있었다.
살기만 봐도 알겠다. 황석태는 강한 무인이며 능력 좋은 단주일 것이다. 무력의 강약을 떠나 저만큼 살기를 정제할 줄 안다면, 어떤 사태에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인에게 냉정은 미덕이다. 황석태는 강할 것이다.
“마음 같아선 네놈의 그 같잖은 오만을 직접 깨부숴 주고 싶군.”
“싸우지 않겠다는 뜻인가?”
“뭐가 되었든 너는 당분간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될 것이다. 내가 널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야.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너 자신을 증명해라.”
연호정이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독특한 놈일세그려.’
수하들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놈이 분명했다. 부드럽고 친근감 넘치는 상사보다는, 규율을 중시하고 신상필벌이 확실한 딱딱한 상사일 것이다.
대개 그런 사람일수록 도발에 약하고 모욕에 인색한 법이다. 한데 황석태는 그러지 않았다.
함께 지내게 될 테니, 함께 지낼 이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증명하라 한다.
쉽게 하기 힘든 생각이었다.
“뭐가 됐든 좋아. 하지만 하나는 틀렸어.”
“……?”
“나는 너희와 같이 지내면서 훈련할 생각 자체가 없다.”
황석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내가 받은 직위는 특임 부관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직위지만, 결국 하는 건 별로 없지. 다만, 내 몇 없는 권한 중 하나가 바로 너희의 훈련을 담당하는 거다.”
“뭣이?!”
“당분간 용아철기단의 훈련 일정 및 과정은 내가 잡는다.”
화아아악!
황석태의 몸에서 무서운 기파가 뻗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애써 억누르는 목소리였다.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분노로 가득한 소리이기도 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백서, 그 양반이 말해 주지 않던가?”
“철기단의 단주는 나다. 본단의 훈련은 나와 부단주가 맡는다. 그것은 내 권한이야.”
“그러도록 해라. 다만, 특임 부관으로 있는 한 너의 권한은 내 것이다.”
연호정이 턱으로 묵룡부 쪽을 가리켰다.
“의심스러우면 직접 부주를 찾아가 확인해라.”
황석태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믿을 수 없는 놈이라지만, 적어도 이런 부분에 있어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성 이전에 지능의 문제였다. 곧바로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 놈을 부주께서 신뢰할 리가 없다.
하지만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철기단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놈이 훈련을 담당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러니까 보여 줘야지.”
“……?!”
“너희에게 나의 무력을 증명하겠다. 너희는 나에게 철기단의 힘을 증명해라.”
“……이놈.”
순간 발작할 뻔했다. 황석태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리고 그의 폭발을 막은 것은 연호정의 기도였다.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바뀐 연호정, 그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도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후우욱!
황석태의 기도가 차가운 파도였다면, 연호정의 기도는 뜨겁게 달아오른 강철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기도는 곧 사위를 압도하는 위엄이 되어 황석태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
황석태의 표정이 돌변했다.
기도만으로도 알겠다. 눈앞의 이놈은 진짜 강자다. 단순 무공의 경지만도 자신을 한참이나 초월해 있었다.
상대가 강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부풀리기 좋아하는 백도 샌님들의 허풍이 섞인 명성인 줄 알았더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눈앞에서 확인한 연호정의 기도는, 오히려 소문이 축소되었다 생각될 만큼 막강한 힘을 자아내고 있었다.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상부의 명령이다. 항명은 죽음이야.”
“…….”
“죽음을 불사하고 막고 싶다면, 지금 바로 부주에게 달려가도록 해라.”
황석태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동쪽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철기단의 인원이 일천을 헤아린다고 들었는데, 고작 백여 명만 불렀나?”
저 멀리서부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대지를 진동케 하는 백여 기의 기마. 멀리서 보는데도 대지를 박차는 말의 힘찬 신력(神力)이 느껴졌다.
‘굉장하군.’
용아철기단을 보고 있자니 아무래도 의정군, 그중 탕마군과 비교를 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보급품에 있어선 철기단의 압승이야.’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멀리서도 보였다. 마갑(馬甲)은 물론 경장 갑주를 걸친 단원들의 모습이.
갑주가 무거우면 제아무리 품종 좋은 말이라도 저런 속도로 달리지 못한다. 즉, 높은 강도의 철을 최대한 가볍게 만든 합금인 것이다.
탕마군의 합금도 뛰어난 수준이지만, 저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말들의 생기(生氣)부터가 달랐다.
잠시 후.
히히히히힝!
선두에서 달려오던 기마 무인이 고삐를 잡아챘다. 말이 무시무시한 포효를 터트리며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파바박!
귀신처럼 절묘한 기마술로 일제히 말을 멈춘 그들이 동시에 땅으로 내려와 고개를 숙였다.
“철기일대(鐵騎一隊)가 단주님을 뵙습니다!”
“단주님을 뵙습니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놀라운 패기가 깃들어 있다.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느라 고생했다.”
연호정이 황석태를 바라보았다.
그새 평정을 되찾았는지, 황석태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부대는 이곳에서 이틀 거리에 있는 곳으로 수련을 떠났다. 근방에서 훈련 중인 부대는 철기일대뿐이다.”
“그랬군.”
연호정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굉장한데. 제대로 단련이 되었어.”
한참 훈련을 하던 도중 귀환 명령이 떨어졌음에도 기도에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날 선 훈련을 하던 중이었는지, 하나 되어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놀랍도록 흉흉했다.
황석태가 말했다.
“일대주.”
“예, 단주님.”
“이자의 무력을 확인해라. 필요하다면 일대 전체가 나서도 좋다.”
일대주가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듭니다.”
연호정이 누군지, 왜 그런 명령을 내리는지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시킨 명령은 즉각 받든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멸사군과는 다른,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진짜 군부대의 모습이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황석태의 눈이 차가워졌다.
“철기단의 열 개 부대 중 일대는 가장 공격적인 무력을 자랑한다. 당연히 묵룡부에서도 최고로 손꼽힌다.”
“그래 뵈는군.”
“부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이 있는바.”
쿵!
황석태가 발로 바닥을 찍었다.
티이이잉!
저 멀리 꽂혀 있던 여러 자루의 장창 중 하나가 날아와 황석태의 손에 잡혔다.
그가 연호정에게 창을 던졌다.
가볍게 창을 받아 든 연호정이 부드럽게 휘둘러 보았다.
‘좋은 창이야.’
신병이기라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명인의 작품임은 분명했다. 좋은 철을 썼고, 강도와 탄력이 적절하며, 균형 역시 무척 좋았다.
“백도의 방식은 잊어라. 흑도의 비무는 생사를 도외시한다. 죽일 기세로 덤비지 않으면 네가 죽을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드는군.”
“그럼…….”
“내 창에 너의 수하들이 다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로 이해하겠다.”
황석태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승부의 무게를 모르는 자, 철기단에 들어올 수 없다. 나도, 그들도 함께한 그 순간부터 모두가 목숨을 걸었다.”
“좋아.”
부우웅! 부우우웅!
창대의 중간을 잡고 매섭게 돌린 연호정이 일대주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츠츠츠츠.
일대주가 자세를 낮추며 양손으로 창을 쥐었다.
패율과 강량이 한옆으로 물러났다. 승부는 벌써 시작된 것이다.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싸늘하게 타오르는 살기의 향연. 연호정의 창끝에서 연가신단의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뚝. 뚝.
일대주의 이마에서 떨어진 땀이 바닥을 적셨다.
황석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지?’
연호정의 살기는 분명 대단했다. 하지만 이 정도 살기에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일대주는 약하지 않았다.
‘땀을 흘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스르륵.
창대를 꽉 쥔 손에도 땀이 나는지 몇 번이나 다시 쥔다.
평소의 일대주에게서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철기단의 대주 중에서도 가장 실전에 능한 투사였다.
황석태가 연호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짓을……?’
그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일개 부대를 상대로 무력을 증명하라…… 이건 아니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저 대주란 놈은 이미 내 무력을 실감하고 있다. 그 수하들도.”
황석태가 고개를 돌렸다.
연호정의 말이 옳았다. 어느새 백여 필의 말들은 투레질도 못 한 채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연호정의 투기에 압도당한 것이다.
‘뭐?!’
황석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느끼지도 못한 새, 저들 모두를 기로 압박하고 있었단 말인가? 대체 어떻게?!
연호정이 창을 내렸다.
“내 힘은 증명했으니, 이제 너희 철기단의 힘을 보겠다.”
철기일대가 아니라 철기단의 힘을 보겠단다.
황석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개소리를……!”
그때였다.
콰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연호정이 황석태에게로 돌진했다.
황석태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런!’
그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군도(軍刀)를 뽑아 들었다.
하지만.
‘……?!’
쏘아지는 장창이 일순 뱀처럼 꿈틀거리며 군도의 칼날을 타 넘었다.
퍼어엉!
창날 끝에서 폭발한 발경, 황석태는 부지불식간에 군도를 놓치고야 말았다.
연호정의 자세가 낮아졌다.
빠각!
황석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며 무릎을 꿇은 것이다.
재빨리 일어나 공격에 대응하려는 순간.
퍼버버버벅!
어떻게, 뭘로 맞았는지조차 모르겠다.
황석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상반신 전체에 타격을 받은 그의 몸이 절로 앞으로 수그러졌다.
그리고.
척!
앞으로 고꾸라진 황석태의 목덜미에 싸늘한 창날이 닿았다.
연호정이 일대주에게 말했다.
“이십사 시진을 주겠다. 남은 부대를 전부 불러 모아라.”
한순간 입장이 바뀌었다.
이제부터 연호정이 철기단의 힘을 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