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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18화 (517/963)

518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2)

두두두!

백 기가 넘는 기마 모두가 무서운 속도로 평야를 달렸다.

평야도 평야지만, 이 기마들은 거친 숲길도 기가 막히게 내달릴 수 있었다. 모래밭은 물론 산악 지형에서까지 인마일체(人馬一體)의 전술을 구사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훈련받았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야.’

귀주성(貴州省)은 대체로 산이 많은 지역이었다. 신법에 자신 있는 고수라면 기마에서 내려 직접 달리는 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철기단의 기마들은 달랐다.

덩치가 크면서도 엄청나게 유연했고, 무게가 많이 나갔음에도 지구력이 의정군의 기마들보다 좋았다.

양천이 용아철기단을 제대로 밀어 줬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먹일 것도 부족한 영약을 말에게까지 먹이면서 키운 철기단이다. 지금 철기단의 기마들은 무림인과의 싸움에도 통할 만큼, 가히 하나의 병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아아악!

몇 개의 산을 타 넘은 일행은 잠시 휴식에 접어들었다.

“여기야.”

주변을 둘러보던 황석태가 말했다.

“저기 시커먼 건물 보이나?”

연호정이 내공을 끌어 올려 안력을 집중시켰다.

저 멀리, 숲속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건물이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의 크기였고, 어지간한 무림인이라도 그냥 지나칠 만큼 숲과 잘 동화되어 있었다.

“그래.”

“저곳이 귀주에 뿌리를 둔 몇 안 되는 묵룡부의 정보 거점이다. 이곳 상황은 저곳의 정보원들이 알려 줄 거야.”

“좋아.”

황석태가 일대주에게 명령했다.

“이미 우리가 온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가서 백병신군 막원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져와라.”

“명을 받듭니다.”

파아악!

말에서 내린 일대주와 단원 몇 명이 빠르게 산을 타고 내려갔다.

패율이 말에서 내렸다.

“우리는 좀 쉬지.”

“그러시지요.”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평평한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황석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당장 움직여야 할 수도 있다. 긴장을 놓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쉴 수 있을 때 쉬어 주는 것도 좋아.”

“그러다가 뒤통수 맞으면 후회한다.”

“긴장 상태와 육체의 회복을 다르게 보지 말게. 감각은 예민하게, 육체는 느슨하게. 철기단은 전투 부대이니만큼 규율과 군기가 중요하겠지만, 이 앞으로는 어떤 싸움이 벌어질지 몰라.”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황석태가 단원들에게 말했다.

“모두 휴식을 취해라.”

“예!”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황석태의 저런 부분은 참 괜찮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지만, 귀와 마음은 잘 열어 두고 사는 것이다.

황석태가 연호정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생각하지?”

“뭘 말인가?”

“이곳 공기.”

연호정이 패율에게 물었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긴 뭘 어때.”

단창을 뽑아 창날을 손질하던 패율이 툭 던지듯 말했다.

“엄청나게 더럽지.”

“더럽다…….”

“흉흉한 살기가 공기를 타고 흐르고 있어. 공기는 좋은데, 그 안에 사금이 섞인 것 같다.”

패율이 침을 뱉었다.

“깔끔하지 않은 맛이야. 잡스럽다고 해야 하나.”

“동감입니다.”

황석태가 의외라는 눈으로 패율을 보았다.

연호정이 패율더러 선배라고 하는 걸 자주 들었다. 그리고 패율이 점창파의 장로라는 것도, 그 무위가 자신에 비해 모자람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연호정의 존재감이 너무 강해서 눈이 잘 안 간 것도 사실이었다. 기실, 패율 정도만 되어도 어지간한 문파의 조사(祖師)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실력이었다.

황석태가 패율의 단창을 보며 물었다.

“점창은 사일검(射日劍)이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라.”

황석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었나? 점창하면 사일이고, 사일검은 정파 최고의 자격(刺擊)으로 명성이 높다고 알고 있는데?”

“지금은 그런 검 없다.”

“그런 검이 없다고?”

황석태는 아무도 모르게 진기를 끌어 올려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우우우웅.

이제야 비로소 패율의 힘이 제대로 보인다.

완벽하게 정제되어 있는 힘. 강력한 내공을 단 하나의 낭비도 없이 온전히 갈무리했다.

무종의 벽을 넘어섰다 한들 경지와 장단점은 제각각인 법이다. 하지만 황석태가 보기에 패율의 기도는 가히 무결점이라 할 만했다.

‘거기에 검과 창이라…….’

게다가 점창의 검은 찌르기 위주의 쾌검이라, 검신의 폭이 좁고 날은 무디며 끝이 극단적으로 뾰족한 검을 쓴다고 했다.

‘그것도 아니군.’

패율의 검은 소검(小劍)보다 조금 더 긴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검폭이 넓었다. 제아무리 검신이 짧아도 저런 검으로는 찌르기 위주의 쾌검을 난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기형검과 단창을 주무기로 하는 점창의 장로라…….’

황석태가 이번엔 연호정을 보았다.

‘정말 끼리끼리 다니는군.’

사일검으로 유명한 점창파의 장로가 어울리지도 않는 병장기를 들고 있다.

연호정은 더했다.

벽산연가는 중원 정통의 검맥을 잇고 있는 검가(劍家)였다. 그곳의 장남인 연호정은 무지막지한 도끼를 주무기로 쓰며, 지금은 창을 멘 채 희한한 철쇄까지 몸에 둘렀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조합이다. 이놈 일행 중엔 차라리 강량이라는 놈이 가장 정상적이지 않은가.

하긴, 원수가 수장인 단체에 들어와 속없이 웃어 젖히는 그놈도 특이하기는 했다.

“그나저나.”

패율이 연호정에게 물었다.

“관부의 고수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했나?”

“예.”

패율의 눈이 깊어졌다.

연호정은 황궁이 아니라 관부의 고수라 했다. 무림인에게 있어 황궁이나 관부나 똑같이 들리지만, 연호정은 분명히 그 두 곳을 분리하는 듯했다.

그리고 패율은 연호정이 굳이 그 두 곳을 구분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황궁은 또 하나의 복마전(伏魔殿)이라 들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고수들이 득실거린다고 들었어.”

“사실일 겁니다. 특히 황제의 핏줄을 수호하는 고수들 중에는 입이 떡 벌어지는 절대고수도 있을걸요?”

“하지만 관부에는 그만한 고수가 없지 않냐? 관부의 전술 전략이 뛰어나다 한들 상대는 백병신군 막원이야. 설령 화포를 동원한다 해도 잡기는커녕 반대로 몰살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텐데.”

실제로 연호정 역시 기우희를 구출할 적에 직접 화포를 깨부수고 돌진한 적이 있었다.

강철도 깨부수는 무공과 뛰어난 전략 전술을 가진 초절정고수에게는 화포도 무용지물이다. 제대로 맞는다면 초절정고수라도 즉사를 면키 어렵겠지만, 어디 그걸 쉽게 맞아 준다던가.

하물며 백병신군이다. 백병신군은 무극의 경지에 진입하여 자신만의 일가를 이룬 절대고수다.

사방이 막힌 곳에 가둔 채 수백 문의 화포를 쏘지 않는 이상, 절대 잡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럴 겁니다. 문제는 막원이 현재 모종의 이유로 쫓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으음.”

“그 정도 무공의 소유자가 적을 상대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멀리 달아나 버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명백히 쫓긴다고 했으니, 둘 중 하나겠지요.”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관부에서 막원을 잡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병력을 파견했거나, 아니면 막원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거나.”

“…….”

“혹은, 둘 다일 수도 있습니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패율이 피식 웃었다.

“정말이지 잘 따라왔군.”

“예?”

“말했잖느냐? 널 따라다니면 재미있는 일이 생긴다고.”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구출 작전입니다. 섬멸전이 아니에요. 그리고 구출이든 섬멸이든 간에 피 보는 일이 아닙니까? 저는 재미 없습니다.”

“나는 재미있다. 앞으로도 널 졸졸 따라다닐 생각이야.”

“마음대로 하십시오.”

시큰둥한 얼굴로 손을 저은 연호정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패율의 말마따나, 정말 공기가 더럽다.

잡스러운 살기가 가득하다는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산의 공기 자체는 좋았지만, 거기에 섞인 살기가 불편해서 제대로 숨을 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연호정은 생각에 잠겼다.

‘과연 누구일까.’

기습을 당했든 어쨌든, 정상이 아니더라도 막원은 강할 것이다.

애초에 무극지경에 올라선 고수는 상식이 통하질 않는다. 팔다리가 하나씩 날아가고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한들, 지금의 연호정도 맞상대하기 부담스러울 정도의 무력을 뽐낼 존재들이 성천의 고수들이다.

관부는 그런 고수를 쫓고 있다.

화포고 뭐고, 막원과 맞상대가 가능한 고수가 분명히 끼어 있을 것이다. 적으면 하나, 많으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황궁이 몰래 고수를 파견한 걸까? 아니면 관부 측에서 아무도 모르게 고수를 양성한 걸까? 하지만 관부는 결국 황궁의 수족이다. 그렇다면 황궁과 관부, 두 집단을 하나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텐데.’

문득 드는 생각에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하니, 이 일에 삼교가 개입했을까?’

처음에는 그 생각이 강하게 들었더랬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그 가정은 접었다.

삼교가 끼어들었다면 신화교일 확률이 높다. 그리고 중원에 들어온 신화교의 고수 중 많은 수가 연호정을 위시한 고수들의 손에 죽었다.

신화교는 황궁을 장악하려 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제아무리 성천의 강자라도 사람 하나 끌어들이기 위해 고위급 전력을 투입하긴 어려울 것이다.

‘물론 전부 가정에 불과하다. 나는 아직 신화교에 대해서도, 황궁의 사정에 대해서도 잘 몰라.’

그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해석한 문제.

즉, 이번 사건에 삼교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아직은 모른다.’

애써 삼교가 아니라 생각한 것은, 감정에 휩쓸려 차가운 이성을 잃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삼교가 개입했다면?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연호정이 싱긋 웃었다.

‘그럼 싸우는 거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삼교든 뭐든, 자신의 임무는 막원을 정사연합(正邪聯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만.

퍼엉!

순간 연호정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음? 왜 그러냐?”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석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방금 이상한 소리 안 들렸습니까?”

“안 들렸는데?”

“…….”

“왜? 뭔가를 느꼈느냐?”

패율의 얼굴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연호정의 감각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예민하고 뛰어났다. 그들 모두가 못 잡은 소리도 연호정이라면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뭔가…….”

“말해라.”

“폭발하는 소리였습니다. 화포 소리와 비슷한 것 같은데, 메아리를 쳐 대는 통에 구분이 잘…….”

그때였다.

번쩍!

순간 연호정은 은근하게 치솟는 한 줄기 빛을 느꼈다. 소리가 울려 퍼진 곳이었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무림인도 제대로 보기 힘든 곳.

바로 그곳에서.

황금빛 화염의 꼬리가 올라가는 걸 목도했다.

연호정이 벌떡 일어났다.

“패율 선배! 먼저 움직입시다!”

황석태의 눈이 커졌다.

“뭐?!”

“자네는 정보단과 접촉 후에 와! 일이 급하니 먼저 가겠다!”

“이, 이봐!”

파아아아앙!

눈 깜짝할 사이에 연호정과 패율이 사라졌다.

황석태는 기가 차는 걸 느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군.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저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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