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3화.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7)
주르르륵.
막원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역시 아직은 무리다.’
천무병장기는 천고의 신공이었다.
그의 사문은 하나의 주 심법을 알려 준 후, 수많은 무공서를 독파하도록 했다.
거기에 하루하루 피 흘리는 수련은 물론이요, 무공서 외에 문사(文士)로 입신양명할 수준의 학문도 배웠다.
문무를 겸비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소양’ 때문에 그러한 가르침을 내리는 게 아니었다.
사문이 대표하는 하나의 심법.
그 하나의 심법은, 연성한 자의 재능과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습을 보여 준다.
막원은 사문의 가르침에 따라 무수히 많은 서적을 독파했고, 치열하게 싸웠으며, 무공서를 분해했고, 나아가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그렇게 완성한 것이 천무병장기였다. 사문의 원형 심법과는 완전히 멀어져 버렸지만, 천무병장기는 하나의 신공절학으로 꽃피게 되었다.
그러한 신공으로도, 체내의 독을 제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내외상이 심하다. 거기에 환경도 좋지 않아.’
달리는 말 위에서의 운공이었다.
막원 정도의 고수는 어떤 상황, 어떤 자세에서라도 편안한 운공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몸이 피폐해지면, 집중이 흐트러지고 운공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지금의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환경과 치료, 그리고 신공의 자가 복구 능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쥐꼬리밖에 안 남은 내공으로도 어떻게든 독을 감쌀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당분간은 날뛰지 못할 것이다. 그 당분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으십니까?”
여유롭게 신법을 펼치며 달려오던 황석태가 물었다.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소. 괜히 나 때문에 그대가 고생이오.”
“별말씀을.”
황석태 성격에 이런 말을 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만큼 막원을 무인으로서 존경한다는 뜻이리라.
그때였다.
퍼어어엉!
전장에서 이십 리나 떨어졌는데도 폭음이 들려왔다.
굉장한 폭발력이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충격파나 기세를 느끼긴 힘들었지만, 소리만으로도 얼마나 격정적인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걱정이구려.”
막원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연호정과 패율은 놀라운 고수였지만, 크게 보면 후배이기도 했다.
후배들이 목숨을 걸고 적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미안함과 고마움, 무기력함과 씁쓸함이 막원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황석태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는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지만 그 역시 폭발음을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 둘이 강하기는 하나…….”
“저도 둘을 본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릅니다.”
“허어, 하면 병력을 충원해야 하지 않겠소? 나 하나의 목숨 때문에 저만한 인재들이 죽는 것은…….”
“상부의 명이 있었습니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 그게 철기단입니다. 그리고 저 둘 역시 한시적으로나마 철기단에 속해 있습니다.”
“…….”
“지금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십시오.”
막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두두두두두.
철기단의 이동 속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졌다.
그 속에서, 황석태는 생각했다.
‘화포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살수들, 거기에 초절정 고수까지 끼어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 초절정 고수는 치명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백병신군을 상대로 승부 비슷한 공방을 주고받았다고 했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거야.’
전설을 왜 전설이라 부르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천십삼좌는 절정이니 초절정이니 하는 무인들과 아예 차원이 다른 고수다. 애초에 무극의 경지에 도달하고도 오랜 세월 연마하여 제각기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한 무적의 괴수들인 것이다.
보는 것도 다르고 서 있는 곳도 다르다. 구파일방 급 대문파가, 전대 고수까지 동원해도 막기 힘든 무지막지한 전력을 단독으로 뽑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람이 아니다.
즉, 연호정이 싸우는 적은 최소한 무극 직전에 다다른 고수라는 뜻이었다. 그 정도 고수가 아니면 중상을 입었대도 막원의 일초를 막기 힘들 것이다.
‘과연 막을 수 있을까.’
호남에서 귀주까지 열흘이 조금 넘게 걸렸다. 그 전엔 열흘도 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이다. 심지어 그중 닷새는 대화는커녕 인질로 잡혀서 분통만 터트렸더랬다.
한 달도 안 되는 인연. 연호정을 걱정해 줄 이유가 없다. 묵룡부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이지만, 여기서 죽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황석태는 연호정의 죽음을 선뜻 떠올리지 못했다.
‘지독하게 오만한 놈이지만…….’
연호정의 언사가 떠올랐다.
강력한 무공도, 그리고 불순물 따위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자신감도.
‘오만을 떨 자격이 있는 놈이야.’
마음 같아선 함께 싸우고 싶었다. 연호정 때문이 아니라 철기단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철기단은 부수고, 파괴하고, 점령하는 부대다. 요인 구출에 특화된 부대가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지금은 자존심보다 유연한 상황 판단으로 임무를 성공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죽지 마라. 우리만 살아 돌아가면 찝찝하다.’
* * *
“그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접근하는 두 사람에게 번작이 경고했다.
패율이 피식 웃었다.
“우린 우리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 지껄이는 건 자네 맘대로 하게. 그 정도 자유는 허용해 주지.”
“목숨을 잃고 싶다면 언제든 와라.”
“엉.”
성의 없는 대답과 함께 패율은 성큼성큼 번작에게 다가갔다.
화르르륵.
땅을 짚은 번작의 손에서 황금빛 불꽃이 타올랐다.
그 불꽃의 온도가 실로 대단했다. 패율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더럽게 뜨겁군. 썩어도 준치 수준이 아니잖아?”
패율이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멈추십시오. 더 접근하면 위험하실 겁니다.”
“그래 뵈는군.”
패율은 당당하게 세 걸음 뒤로 물러났다. 자존심도, 호승심도 강했지만 쓸데없는 데에 목숨 거는 성격은 아닌 것이다.
연호정이 번작을 향해 백룡부를 겨누었다.
번작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의지로는 막을 수 없는 당혹스러움이 눈동자에 맺혔다.
“이봐, 노란불.”
“…….”
“이호무장 천강이라는 놈 알지? 그놈이 본맹의 뇌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
번작의 눈이 깊어졌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려 두었을 줄은 몰랐다.
물론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는 천강을 아주 잘 알았다. 가끔 경박하고 생각 없는 모습을 보여 주지만, 적어도 충성심과 독기 하나는 대단한 놈이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오체분시 될래, 아니면 그놈과 손잡고 우리한테 협조할래?”
번작이 코웃음을 쳤다.
“웃기는 놈이군. 내가 협조한다고 한들 믿어 줄 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연호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믿지. 너 같으면 믿겠냐.”
“한데 왜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냐.”
“글쎄다.”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스스로 왜 이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 죽이기에는 찝찝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뭐가 좀 걸리기는 하는데.’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연호정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순간.
퍼어어어억!
“크윽!”
어떻게든 피한다고 했지만 연호정의 비부술(飛斧術)이 너무 빨랐다.
번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멀쩡한 다리의 허벅지에 박힌 백룡부가 근육의 결을 따라 파고들었다.
푸화아아악!
창에 뚫린 곳도 동맥이 찢어진 상황이었다. 금제순화진기로 끊어진 동맥이 말려 올라가는 것과 출혈을 막아 두었는데, 또 한 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화르르르륵!
서둘러 진기를 나누어 도끼가 박힌 허벅지로 이끌었다.
후욱.
번작의 손에서 소용돌이치던 화염이 기세를 잃었다.
내상이 심한 데다 두 다리가 봉쇄되었다. 새로이 찢어진 동맥도 묶어야 했고, 혈관이 상반신까지 말려 올라가는 것도 막아야 했다.
거기에 출혈도 심했다. 안 그래도 허연 번작의 낯빛이 이젠 푸르스름하게 보일 정도였다.
화정이 제아무리 대단해도 쏟아 낸 피까지 복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한 번 더 대량의 출혈을 일으킨다면, 천하의 번작이라도 생존은 불가능할 것이다.
“생각도 정리할 겸, 다른 걸 물어보고 싶은데.”
연호정이 보란 듯이 쪼그려 앉았다.
자세가 아주 제대로다. 묵룡부에 파견 온 이후, 흑도 뒷골목에서 생활하던 과거의 그로 조금씩 돌아가는 것 같았다.
“백병신군 그 양반과 안면이 있는 것 같던데.”
“…….”
“뭐, 자세한 건 그 양반한테 물어보면 되고. 너한테 묻고 싶은 건 다른 건데.”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양반만 조지려 드는 건 아니지?”
번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호정은 대답 없는 번작의 반응 자체를 무시했다.
“황궁을 점령했든 관부를 장악했든, 그거야 너희 신화교 쪽 사정이고.”
“…….”
“남은 사음교와 광혈교는 힘을 합쳐서 강호 무림을 뒤집어엎어야 하는데 말이야.”
“…….”
“물론 너희한테도 성천급 강자가 꽤 있다는 건 알아. 아는데, 전쟁이라는 게 병력만으로 부딪치는 싸움은 아니잖아? 전략도 짜야 하고, 보급도 신경 써야 하고, 어떨 때는 내 장기 말을 내주면서 상대 기물도 따먹고, 그래야 하는 거라고.”
“…….”
“즉, 침략자인 너희 입장에서는 우리 쪽의 최고 병력을 최대한 제거하는 게 좋아. 변수도 없애야 할뿐더러, 이겨도 상처뿐인 영광이 되면 안 되거든.”
그건 전쟁의 기본이었다.
모르는 사람은 말한다. 병력과 병력이 붙을 때, 한쪽이 전멸해야 이기는 거라고.
하지만 실제 전쟁에서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거대 병력이 붙을 때, 한쪽이 이 할에서 삼 할 이상의 피해를 입으면 전멸(全滅)이라고 친다.
단어 정의로서의 전멸과 군사 용어의 전멸은 다르다.
군사, 전쟁에서의 전멸이란 전투 속행이 불가능할 때 쓰는 표현이었다.
적의 병력은 멀쩡한데, 아군 병력은 이 할에서 삼 할 정도를 잃었다?
무조건 퇴각이다. 더 이상 싸우는 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 의미 없는 싸움에서 적의 전력 붕괴를 목적으로 끝까지 쫓아가 전부 잡아 죽인다면, 그때는 ‘괴멸’이라는 표현을 쓴다.
전멸과 괴멸의 차이였다.
그래서 적의 부대를 괴멸할 상황이 와도 괴멸하지 않는 것이다. 전쟁이 승패의 전멸전이 아닌 생사의 괴멸전이 되는 순간, 양측 모두 파멸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전쟁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일어나도, 힘의 차이가 극심하지 않은 이상 절대 상대를 뿌리 뽑지 않는다.
그것이 전쟁이고 정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백병신군이 첫 번째 목표 같지는 않더라고.”
“…….”
“첫 시작이 어찌 되었든, 너희는 백병신군을 아주 자연스럽게 추격하고 몰아붙였어. 경험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
“…….”
“자, 제대로 된 질문 들어간다.”
연호정이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신선제왕, 그리고 삼군. 그중에 몇을 구워삶았고, 몇을 죽였냐? 남은 인원이 몇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