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화. 백병의 신안(神眼) (4)
후우우웅!
내지른 적창(赤槍)에서 강렬한 기백이 쏟아져 나왔다.
빠르지도 않고 위력적이지도 않았다. 단순한 일격에 불과한데, 묘하게 다가가기가 힘들다.
살기였다.
창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황석태 본연의 패기가 어우러져 범접지 못할 무형의 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무공이라는 것은 초식이 전부가 아니었다. 초식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줄 아는 눈도 중요했고, 상대에 따라 속도와 힘의 세기를 조절할 줄 아는 경험과 감각도 필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닌바 무공의 위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정심(貞心)과 기백이었다.
‘이게 아니야.’
황석태가 적창을 거두었다.
‘나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만족할 만한 수준도 아니다.’
황석태 정도가 되면 이미 초식의 한계를 넘어선 수준이라 봐야 했다.
게다가 실전 경험도 많았고, 전투 시 응변의 기지도 충분했다. 그 정도면 강호 어디에서도 통할 만한 초일류의 실력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그 이상을 넘보기 위해선 기(氣)를 제대로 다루는 것이 중요했다.
‘마치 그때, 연 부관처럼.’
황석태는 굴욕적인 그때를 떠올렸다.
기실, 처음에는 굴욕적이었지만 이후에는 그러한 굴욕감도 느끼지 못했다.
무려 천 명을 상대하는 초고수의 격전이 며칠이나 이어졌다. 그 쫄깃쫄깃한 승부를 지켜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연호정은 강했다.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땐 빨랐고, 강하게 밀어붙여야 할 때는 강했다. 무겁게 내디뎌야 할 땐 태산과 같았으며, 가볍게 빠져나와야 할 때는 깃털과 같았다.
그 많은 역전의 병사들이 몰아붙이고 있는 와중에도, 기가 막히게 약점을 파고들어 진형을 휘저었더랬다.
황석태는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마음을 품었더랬다.
연호정은 전투의 신이었다. 일 대 일이든 일 대 천이든, 상대와 싸울 때 어느 무공을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라 해도 경험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 나이대에 거머쥘 만한 경험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황석태는 깨달았다.
연호정은 경험도 대단하지만, 무엇보다도 싸움의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들일 줄 알았다.
그리고 그 흐름을 끌어들이는 무수히 많은 방법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게 바로 ‘살기’였다.
‘완전히 다른 영역의 싸움이었다. 다가오는 적의 일부를 살기로 옭아매어 반응을 늦추곤, 가장 발 빠르게 공략할 수 있는 부위를 무너트려 진형 전체의 균형을 파괴한 것이야.’
놀라운 일이었다.
살기란 정신력의 발현이다. 절정고수 수준으로 기를 잘 다룬다면 자신의 살기 역시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지만, 그래도 감정이 격해지면 억누르기 힘든 게 살기였다.
연호정은 거기서 몇 발을 더 나아갔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 원하는 표적에게만 살기를 쏘아 낸다. 그 사람을 제외하곤 누구도 살기를 느끼지 못한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섬세함이었다. 그리 섬세한 살기 조절은 듣도 보도 못했다.
‘감히 장담하건대 본부에서도 부주님을 제외하곤 그만한 기예(技藝)가 가능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흉내조차 쉽게 내기 힘들 거야.’
섬세함이 극에 달한 살기 제어.
연호정의 상단전(上丹田)은 넓고 풍부할 것이며, 그물처럼 세밀한 신기(神氣)로 꽉 차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만한 기예를 숨 쉬듯 자연스레 구사할 순 없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황석태가 늦은 밤, 밖으로 나와 홀로 수련에 매진하는 이유였다.
‘연 부관은 표적, 농도, 범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살기로 싸움의 판도를 마음껏 조절했다.’
황석태의 눈이 빛났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어떤 난전에서도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황석태는 연호정의 그 능력이 부러우면서도 동일한 능력을 얻고 싶진 않았다.
그가 얻고 싶은 능력은 무공 자체의 파괴력 증대였다.
‘살기를 그 정도로 다룰 수 있다는 건, 품을 수 있는 살기의 크기와 농도 자체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스르륵.
황석태가 창을 내밀었다.
달빛을 받은 붉은 창날이 으스스한 광채를 뿜었다.
‘그 살기를 오로지 창 한 자루에 담을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을 상대하는 적은 무지막지한 심력 소모로 나가떨어지거나 생각지도 못한 빈틈을 보일 것이다.
‘아마 연 부관도 그런 식으로 살기를 다룰 것이다.’
싸움의 흐름을 조종할 정도의 능숙한 살기 제어다. 오롯이 무기에 담아 휘둘러 상대를 무너트리는 수법에도 능할 것이다.
‘어떻게 하지?’
주르륵.
황석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 그런 것이 가능하지?’
일부러 살기를 피웠고, 줄여도 보았다. 한 곳에 집중하려 했고, 사방으로 퍼트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연호정 정도의 세심한 운용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지나친 살기 제어로 심력 소모가 극심하여 어지럼증까지 일 정도였다.
아무나 하는 수련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날뛰는 살기에 상단전에 흠집이 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한 수련이기 때문에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정도에서 머물고 싶다면, 그간 해 왔던 수련만 계속하면 된다.
하지만 황석태는 이 이상을 원했다. 그렇다면, 이 이상의 경지에서 노닐 수 있을 만큼의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목숨이었다. 극한의 경지에 오른 초절정고수들이 다음 관문을 열기 위해선, 생사를 도외시한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아마 그도 그랬을 것이다.’
자신만만한 연호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러한 얼굴이 어울렸다.
‘그 표정, 그 눈빛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을 것인가.’
이제는 나이가 어리다고 우습게 보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어리기 때문에 더 대단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했다. 그 어린 녀석이 목숨을 걸고 하루하루를 노력할 시간에, 자신은 부대를 이끈다는 변명하에 하루라는 마지막 시간을 날려 버린 셈이니까.
후우우웅!!
황석태의 창끝에서 뿜어진 진기가 강렬한 돌풍을 만들어 냈다.
진기에 살기가 실렸다. 하지만 살기는 여전히 애매하게 맴돌았다. 섬세하게 가다듬으려 하자, 의지와는 달리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이다.
황석태는 참았다. 머리가 아프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났지만, 그조차도 잊었다.
‘뾰족하게.’
다리가 덜덜 떨렸다. 손끝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더 날카롭게, 한 점을 향해서.’
파아앙!
일순 강한 폭음과 함께 창끝에서 충격파가 일어났다.
“빌어먹을.”
황석태가 숨을 헐떡이며 창을 회수했다.
“오늘도 실패인가.”
살기가 제대로 제어됐다면 진기가 폭발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멈추지 않는다.’
황석태는 포기하지 않았다.
또다시 창을 내질렀고, 창끝에서 몰아치는 살기를 제어하려 했다.
쉽지 않았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히려 기존보다 더 엉성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지나 어느새 동이 터 올랐다.
“헉헉!”
탈진 직전까지 간 황석태가 땅을 짚고 숨을 헐떡였다.
바위를 지고 산을 오르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육체의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정신의 고통은 참기 힘들다.
‘자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제길.’
황석태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반 정도지만 내공도 남았고, 근육에 힘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힘을 쓸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다. 정신력이 고갈됐기 때문이다.
“이 정도로 우는소리 하지 말자.”
크게 심호흡을 하던 황석태는 이내 어깨에 창을 걸치곤 몸을 돌렸다. 아침도 먹어야 했고, 수하들도 관리해야 했다.
그때였다.
‘……?!’
황석태의 귀가 쫑긋거렸다.
정신력이 바닥이 날 때까지 수련한 직후지만, 집중을 풀자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그 예민한 감각이 알려 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제법 떨어진 숲에서 누군가가 싸우고 있음을.
‘적은 아니다. 발소리가 익숙해.’
아마도 연호정과 패율일 것이다.
‘아니다. 그 둘이 전부가 아니야. 누군가가 또 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황석태가 몸을 돌려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평소의 그라면 향하지 않았을 곳으로 내딛는 발걸음이다. 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잠시 후.
파아아앙!
한 자루 단창을 너무나도 부드럽게 휘두르는 백병의 초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초인을 상대로 기가 막힌 창술을 보여 주는 또 한 명의 만능자도 있었다.
황석태는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몸놀림으로 장창을 회피하다가도, 한순간 거리를 좁혀 단창을 내지르는 막원의 무공은 가히 예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태양이라도 꿰뚫을 듯했다. 손에 쥔 단창이 마치 거대한 화살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번쩍!
한 줄기 섬광으로 화한 단창은 가히 해를 관통하는 무공이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반면.
치리리링! 키이잉!
야수의 앞발처럼 장창을 휘둘러 단창의 투로를 어긋나게 하고, 묵직한 보법으로 다가가 사납게 창날을 쑤셔 대는 실전의 화신이 있었다.
무서운 창술이었다.
아니, 저것은 창술이지만 창술이 아니기도 했다. 손에 창을 들든 검을 들든 도끼를 들든, 그 어떤 병기를 들어도 저만한 위력과 사나움을 보여 줄 것이다.
황석태의 얼굴에 황홀한 빛이 떠올랐다.
‘저것이다.’
그의 눈은, 놀랍게도 천하제일을 논한다는 삼군이 아닌 그의 발치에도 못 미치는, 그러나 백년지재의 괴물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한 청년에게 향해 있었다.
‘조금은 다르지만…… 바로 저러한 무공을 닮고 싶었다.’
무공의 이치? 도리? 깨달음?
다 필요 없다.
저처럼 물러섬이 없는 공격을, 사납고도 수준 높은 공격을 구사하고 싶다.
임전무퇴의 무공, 오로지 전진만이 가득한 패기 넘치는 무공이야말로 자신의 이상향이었다.
황석태는 저도 모르게 한 발, 한 발 승부의 세계로 다가갔다.
“헛!”
한옆에서 자신의 초식을 구사하는 막원을 보던 패율이 놀라서 일어났다.
“위험해!”
치리리링! 쾅!
장창과 단창이 부딪치며 강렬한 폭음을 일으켰다.
연호정과 막원이 뒤로 물러나 공간을 만들었다. 그들 역시 황석태가 접근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거리를 벌린 것이다.
연호정이 툴툴거렸다.
“그것참,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러는 거야? 승부 중에 함부로 끼어들면…….”
연호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보는 황석태의 눈빛이 몽롱했기 때문이다.
“이봐, 철기단주.”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지?”
“뭐?”
“나는…….”
황석태가 손을 뻗었다.
마치 무언가를 쥐려는 듯 뻗어 낸 손에서, 강렬한 욕구가 피어올랐다.
“나는 그와 같은 힘을 원한다.”
홀린 듯 당당하게 말하는 황석태.
동시에 그의 눈이 휙 풀려 버렸다.
풀썩!
쓰러진 황석태를 안아 든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 인간, 뭔 수련을 한 거야? 완전히 탈진했군.”
그때, 막원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 무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모양일세.”
“그렇다면 이 인간도 아직 멀었군요. 절세의 무인이 앞에 있는데, 어정쩡한 사람 닮아서 뭘 하겠다고.”
“자신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군.”
“진심입니다.”
“뭐, 그거야 그렇고.”
막원이 웃으며 황석태의 창을 들었다.
“묵룡부로 돌아가기 전, 며칠 동안이라도 같이 수련할 사람이 늘어난 것 같지 않나?”
“하루빨리 가야 합니다.”
“어차피 또 임무를 수행하러 갈 거라면, 아군의 성장이 도움이 되겠지. 안 그런가?”
연호정이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황석태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