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화. 백병의 신안(神眼) (5)
“헉!”
황석태가 벌떡 일어났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지금은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다.
“벌써 일어났나? 강골은 강골이군.”
깜짝 놀란 황석태가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연호정이 작은 칼로 과일을 잘라 물고 있었다.
“상태를 보니 살기공(殺氣功)을 연마했던 모양이야. 그것도 날이 새도록.”
“…….”
“무식하게도 수련했네. 그렇게 앞뒤 가리지 않는 수련을 지속하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걸세.”
황석태가 담담하게 말했다.
“더 강해지고 싶다면 목숨을 걸어야지. 아니 그런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그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아. 하지만 목숨을 걸 곳에 걸어야지. 일단 부딪치고 보는 수련도 나쁘진 않다만, 위험 부담이 큰 수련을 하기 전에는 충분히 생각하고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해.”
“나는…….”
“자네는 일천 기병을 이끄는 철기단의 대장이잖나? 자네가 무너지면 수하들도 갈 길을 잃게 돼.”
황석태는 말없이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부러운가?”
“뭐?”
“내 무공을 닮고 싶다며?”
순간 황석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말을 듣자 쓰러지기 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가 떠올랐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부끄러웠지만, 사실이기 때문이다.
“추구하는 이상향이 같을 수는 있다. 다만 자네가 먼저 도달했을 뿐이야.”
그래도 자존심은 상했던 모양이었다. 황석태의 발언은 다소 변명조로 들렸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지 말게. 내 무공의 이상향은 자네와 다르니까.”
“다르다?”
“자네가 본 나의 창술은, 내 무(武)의 일부분일 뿐이야.”
“……?!”
“나는 필요하다면 암살도 할 놈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세작질도 할 수 있어. 하지만 자네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
“무공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내 인생에서 손꼽힐 만큼 큰 가치를 이루고 있지만, 무공 하나에 목숨을 거는 인생은 아니란 말이지.”
황석태의 눈이 흔들렸다.
무림인임에도 무공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이해관계를 떠나, 저런 말을 실제로 내뱉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즉, 내 무공을 따라잡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네. 자네는 지금도 충분히 강해.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무(武)를 만드는 것이지.”
“자네를 따라잡을 생각은 없어. 그저 그때 보았던 자네의 창술이, 내 이상향과 닿아 있었을 뿐이야.”
“그렇다면 대화가 쉬워지겠군.”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대주를 시켜서 묵룡부에 서신을 보내게 했네.”
“뭐?”
“앞으로 사흘이야. 사흘 동안 자네만의 무도(武道)를 찾아보게. 사흘 후 아침에는 무조건 출발할 테니까.”
“나와 상의도 없이 그런……!”
“너무 쩨쩨하게 굴지 말자고. 어쨌든 이번 임무의 책임자는 나야. 자네는 나를 도와주러 온 거 아닌가.”
황석태가 침음을 흘렸다.
“사흘 동안 철기일대를 따로 수련시키겠네. 철기단 특유의 진형에 혼란을 주지 않는 선에서 시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네는 특별 강사에게 배움을 청하도록.”
“특별 강사?”
연호정이 엄지로 창밖을 가리켰다.
황석태가 그곳을 보았다.
‘……!!’
창 너머에서는 막원과 패율이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주로 묻는 쪽은 패율이었고, 설명하는 쪽은 막원이었다.
“막원 선배가?!”
“그렇다네.”
황석태는 당황했다.
“하지만 나는…….”
“왜? 스승이 따로 있나? 아니면, 타인에게 무공을 배우는 걸 묵룡부에서 금지라도 시켰나?”
“……그건 아니지만.”
“쓸데없는 이해관계 따위는 집어치우게. 지금 중요한 건 스스로가 얼마나 간절한지야.”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철기일대 수련도 사흘 동안 진행될 거네. 그렇게 알도록 해.”
“…….”
“분명히 말하는데, 괜한 고민으로 시간 낭비하지 말게. 나 같았으면 지금 바로 저 양반한테 달려가서 가르침을 청했어.”
연호정이 문을 열었다.
그때, 황석태가 다급히 물었다.
“다다를 수 있을까?”
“음?”
“자네가 아닌, 막원 선배께 배워도 내가 원하는 무도를 개척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겨울의 삭풍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려거든 여름의 뙤약볕을 쐬어 봐야지.”
“…….”
“어떤 가르침이든, 그것을 소화하고 자기화하는 건 자네야. 하물며 백병신군이다. 저만한 거물의 가르침이 자네가 추구하는 무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자네 그릇도 거기까지인 거겠지.”
쿵.
연호정이 문을 닫고 나갔다.
묘하게 자극적인 말임에도 황석태는 화가 나지 않았다. 연호정의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진정으로 자신을 생각해서 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배우건, 배운 것을 응용하는 것은 결국 나의 몫이다…….’
잠시 후, 황석태가 막원과 패율에게 다가갔다.
“시간 괜찮으십니까?”
“음.”
막원이 패율을 바라보았다.
패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흘도 빠듯합니다. 선배의 교정을 체화하는 것 말입니다.”
그가 황석태를 힐끔거렸다.
“선배도 빠듯할 겁니다.”
패율은 그 말을 남기고 숲으로 들어갔다.
막원이 껄껄껄 웃었다.
“저 사람 참,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잘도 한단 말이야.”
한참을 웃던 막원이 황석태를 보았다.
“연 부관에게 따로 말은 들었네.”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황석태는 망설이는 어조로 말했다.
“선배를 존경하지만, 선배의 제자가 될 수는…….”
“이보게, 후배님. 내 사문의 무공을 전수할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자네의 스승이라 생각하나?”
“예?”
막원이 유쾌하게 웃으며 일어났다.
“창을 들고 따라오게. 사흘 동안 죽고 싶을 만큼 고될 걸세.”
그날부터 연호정은 철기일대와, 막원은 황석태와, 패율은 홀로 수련을 시작했다.
묘한 인연이었다. 임무로 얽힌 관계였지만, 그들 모두가 천상 무인이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수련 모임도 가능했던 것이다.
철기일대는 연호정이 가르쳐 주는 전략 전술을 체화하기 위해 피땀을 쏟았고, 패율은 관일공의 생각지도 못한 빈틈을 발견한 이후 미친 듯이 무공 교정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황석태는, 성천의 강자인 막원의 가르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극한의 정신력이 필요한 수련을 감내하고 있었다.
고작 사흘이지만, 각자가 충분히 기반을 다질 수 있을 만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또 한 계단 위에 발을 올리고 있었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러하였다.
그리고 열흘이 지났다.
* * *
“부주님. 연호정 특임 부관과…….”
“들라 하라.”
백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한다.
양천이 이리 급한 기색을 보인 적은 얼마 없었다. 그만큼 들뜬 기색도 엿보였다.
잠시 후.
쿠구구궁.
대전의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양천의 얼굴에 황홀한 빛이 어렸다.
‘드디어.’
스스로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지만, 기도를 제어해도 사람 본연이 가진 존재감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천하의 연호정조차도 그 강렬한 존재감에 묻히는 기분이었다. 갈무리된 기도에서 읽히는 예기는, 그 종류만도 수십 가지였다.
한 사람이 수십 개의 예기를, 매 순간 다르게 발산하고 있다.
정말이지 독특한 존재감이었다. 마치 백 개의 병기를 몸 안에 감춘 듯, 소름 끼치는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처음 뵙겠소.”
붉은 융단의 한가운데에 선 막원이 당당하게 허리를 폈다.
성천의 강자, 그것도 신선제왕의 일인인 양천을 마주하고도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당했고,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양천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존재감 앞에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백병신군 막원이오. 묵룡부주를 뵙소.”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잘 오셨네.”
나이 차이가 제법 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초면이라면 서로 존대하는 것이 예법이었다.
하지만 양천은 그러지 않았고, 막원 역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처음 본 사이지만 마치 오랜 시간 서로를 알아 왔던 동문의 관계 같았다.
“투왕의 명성은 예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만, 상상 이상이구려.”
“나쁘지 않나?”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오. 알고는 있었지만, 나 역시 아직 멀었구려.”
“허허, 지나친 겸양일세. 자네의 그 무공, 정말이지 강하고 독특하군. 자네와 승부를 보려면 나 역시 목숨을 걸어야겠어.”
무시무시한 고평가였다.
상대가 삼군이기에, 같은 성천의 이름으로 묶인 사이이기에 나올 수 있는 발언이었다.
막원이 절도 있게 포권을 취했다.
“대화에 앞서, 내 목숨을 구해 주어 감사하오.”
“이 사람아. 자네 목숨을 어디 내가 구했던가? 자네의 은인은 자네 옆에 있잖은가.”
연호정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연 부관은 내 은인이오. 그러나 연 부관 혼자였다면 어려웠을지도 모르지. 철기단은 물론, 허가를 내준 부주의 용단 덕분이기도 하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알지 않은가?”
양천이 은근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 은혜를 어찌 갚을지, 자네는 이미 알고 있네. 그렇지 않나?”
막원이 쓰게 웃었다.
“진짜 은인은 연 부관이라더니, 지금은 또 대뜸 은혜를 갚으라 하시는구려.”
“자네가 나도 은인이라며? 그래서 그런 게지.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자고, 우리.”
묘한 사람이야.
막원은 생각했다. 양천이란 인물이 자신이 짐작하던 것보다 꽤 친근한 사람이라고.
소문으로 들었던 투왕 양천은 중원에서 거칠기로는 제일가는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별호도 투왕이겠는가. 광기 어린 투쟁술로 상대하는 적의 살점 하나 남기지 않는 공포의 무공으로 유명한 남자가 양천이었다.
한데 이리 직접 보니, 어째 소문과는 많이 달랐다.
‘어쩌면 소문 그대로의 남자일지도 모르지. 다만, 그만한 본성을 저리 잘 감추고 있다면 저자의 그릇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련가.’
막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연 부관에게 다 들었소. 무림맹과 동맹을 맺었다는 얘기, 그리고 맹과 부가 삼교와 어떻게 싸워 왔는지도.”
“호오, 그래?”
양천의 눈이 빛났다.
“그 얘기를 다 듣고도 이곳까지 왔다…… 전우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는데. 아닌가?”
역시나 양천이었다. 연호정이 했던 말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막원이 입맛을 다셨다.
“전우라…… 뭐, 어떻게 불러도 좋소. 결과적으로 나 역시 삼교와 양립할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허허허.”
태사의에서 일어난 양천이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와 막원의 양손을 잡았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자네의 그 판단이 올바른 판단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내 최선을 다하겠네.”
막원은 내심 당황했다. 양천이 이토록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때, 연호정이 말했다.
“속지 마십시오, 선배님. 우리 부주님께서는 천의 얼굴을 가진 사기꾼이거든요.”
“이 사람이.”
양천은 평소 쓰지도 않는 친근감 넘치는 목소리로 연호정에게 투덜거렸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닐세.”
“틀린 말도 아닌데요, 뭘.”
“자네는 다 좋은데 꼭 빠져야 할 때도 끼더구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어쨌든, 두 분께서 할 얘기가 많으실 겁니다. 저는 먼저 가서 쉬지요.”
“그러게.”
“그럼.”
“연 부관.”
“예.”
“정말 고생했네.”
연호정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좋아 죽는군.’
양천이 저렇게 함박웃음을 짓는 걸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 그럼 나도 사고뭉치들이나 만나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