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백병의 신안(神眼) (7)
막원의 눈이 깊어졌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흑도의 수장으로서 할 말은 아니네만, 자네는 참 우직해서 좋네. 비록 그전까지는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자네와 잠깐 대화해 본 것만으로도 성품을 알겠어.”
“…….”
“자네는 좋은 사람일세. 바름을 알고 의리를 알아. 그 두 가지를 아는 사람은 인간사의 도리도 아는 법이지. 세상 사람들이 백병신군을 정파의 인물이라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어.”
“나는…….”
“하지만 자네가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네의 무공이 강했기 때문이야.”
양천이 눈을 감았다.
과거를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막원을 생각하는 것일까.
“모두를 압도하는 무공을 가졌기 때문에, 자네는 세상사 불편한 영역에 몸을 담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었던 걸세.”
“나도 내 경험이 옅다는 것을 알고 있소.”
“경험의 많고 적음이나 짙고 옅음을 말하는 게 아니야.”
“……?”
“자네는 무림인으로서 독야청청하게 살아왔네. 남을 위했고 악을 징벌했지만, 그래도 자네는 이 강호의 사회(社會)를 관전하기만 했을 뿐 발을 들이진 않았네.”
“부주께서는 그것을 어찌 아시오?”
“나는 자네처럼 강하지 않았으니까.”
“……?!”
막원의 얼굴에 불신의 기색이 어렸다.
양천은 성천의 강자였고, 그중에서도 신선제왕으로 꼽히는 절대자였다. 말하자면 천하십대고수 중 하나다. 무공만으로 천하제일을 노려 볼 수 있는 열 명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강하지 않았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투왕이라 불리는 것이, 내가 싸움을 잘하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더군.”
“아니오?”
“맞지. 일부분은.”
“……?”
“나는 약했기 때문에 싸웠네. 실제로 수도 없는 패배를 겪었지. 흑도에서의 패배는 곧 죽음이야. 말하자면, 죽을 고비를 셀 수도 없이 넘겼다는 것일세.”
양천이 피식 웃었다. 지난날의 자신을 생각하자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이 험한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대로 나는 죽음을 겪어야 했네. 그렇게 아득바득 이 악물고 싸우다 보니, 어느 순간 패배보다 승리가 많아졌네. 무공이 강해졌고, 생존하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어.”
“…….”
“그렇게 얻은 깨달음 중 내가 가장 신뢰하는 깨달음이 뭔 줄 아나?”
“…….”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선, 내 것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한다는 것이야.”
“……!”
“그것은 목숨이 될 수도, 무공이 될 수도, 집단이 될 수도 혹은…… 과거가 될 수도 있지.”
양천이 다시 막원을 돌아보았다.
막원의 눈은 호수처럼 깊었다. 표정도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자네는 생각했어야 했네. 우리가 자네의 위험을 어떻게 간파했는지.”
“조사를 하셨겠지.”
“당연하지. 하나, 그 조사 과정에서 자네의 위협만 보았을까? 굳이 콕 집어서 자네를 구하려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삼군 중 하나인 백병신군만을 조사했을까? 아니면 막원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조사를 했을까?”
“……!!”
“자네는 우리를 은인이라 하였네. 하지만 자네는 자네의 장부를 보여 주지 않았어. 자네는 연 부관과의 거래를 제대로 마치지 못한 것이야.”
막원이 다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아무리 은인이라 할지라도, 내 개인의 일을 속속들이 알려 줄 의무는 없소.”
“당연하지. 자네 말이 맞네.”
“하면……?”
“자네가 백병신군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당금 강호의 분위기가 이리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자네 말이 맞네.”
“……!”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말했지? 자네는 세상을 관전했을 뿐이야. 거기에 녹아든 적은 없어. 한 번이라도 세상에 발을 들여 봤다면, 내 앞에서 그따위 소리를 하진 못했을 것이야.”
“…….”
“이상은 추구해야 마땅한 법. 그러나 현실을 무시하진 말게. 현실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자비하고 부조리하네. 그걸 여태 몰랐던 건, 말했듯 자네가 강했기 때문이야.”
“…….”
“그리고 나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도 가장 독하다는 강호 무림의 최강자 중 하나, 하물며 흑도의 총수라네.”
막원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하면 연 부관은? 연호정은 흑도 총수인 나조차 감당키 힘든 괴물이야.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무공도 약하지만, 단 한 번도 놈을 함부로 대한 적이 없네. 아니, 얕본 적도 없지. 얕보면 내가 당할 거거든.”
막원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양천이 연호정을 이렇게까지 고평가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알겠나? 자네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흑도 세상의 총수와 그 총수마저 긴장케 하는 괴물을 상대하면서도 자네 패를 다 꺼내지 않은 게야.”
“…….”
“이제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묵직한 말이었다.
양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콱콱 박힌다.
막원은 배운 게 많은 사람이었다. 무공을 연성하며 어지간한 석학보다도 많은 학문을 익혔으며, 그를 응용하여 자신만의 무도를 창안하였다.
하지만 그 방대한 지식을 갖고도 양천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말의 무게감의 차이다.
책은 세상을 향한 창구다. 세상을 향한 배움이기도 했다.
다만 막원은 그 세상을 책으로만 익혔고, 양천은 몸으로 겪었다.
누가 맞고 틀린 것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 있어서, 막원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양천을 이해시킬 수 없다.
반면 자신은 이해했다. 양천에게 설득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어 주어야 했다. 상대의 거래 방법에 응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곳의 규율이었다.
“별로 대단한 과거는 아니라오.”
막원이 한숨을 쉬었다.
“그저 어디에서나 볼 법한 과거에 불과하지.”
“그러나 무림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절대자 간의 얘기라면 다르지.”
“별 볼 일 없는 얘기지만, 그 때문에 내가 실례를 저지른 것이라면 응당 말하겠소.”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만 하네. 세상은 흑백으로 나뉘지 않지만, 전쟁은 흑백으로 나뉘거든.”
“흑백이라…….”
막원이 쓴웃음을 지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절대 만만하지 않네. 절대 단순하지 않아. 하지만, 단순하지 않은 세상을 살기 위해선 어느 정도 단순해질 필요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하네.”
오늘 양천에게 들은 말 중 가장 가슴을 후비는 말이었다.
막원은 양천 옆으로 가서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야말로 까마득한 높이였다. 제아무리 성천의 강자라도 떨어지면 목숨을 장담키 힘든 높이였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막원이 툭 던지듯 물었다.
“부주께서는 이 사람을 정직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보았다고 말씀하셨소.”
“그렇다네.”
“참으로 감사한 평가외다. 그리 말해 준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막원이 양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양 부주가 야망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양천이 유쾌한 얼굴로 답했다.
“정확하게 봤네. 나는 야망이 크지.”
“그 야망이 어느 정도인가? 전쟁이 승리로 끝나면, 재차 병력을 규합하여 백도 정파를 밀어붙이고 천하를 손에 넣을 수도 있는 야망이라 보오.”
지금까지 막원이 놀랐다면, 이제는 양천이 놀랄 차례였다.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소.”
“흐음.”
“그리고 앞으로도 이 생각이 바뀌진 않을 것 같소. 양 부주는 욕심을 버릴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거든.”
굉장한 안목이군.
양천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녹아들지 못했느니, 관전만 했느니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막원이 대단치 않은 사람이라 생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상대를 볼 때, 상대 역시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제대로 된 세상 경험도 없이 그런 것이 가능하다니, 가히 신안(神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양 부주를 은인이라 생각하긴 해도, 내 모든 것을 온전히 맡기고 싶진 않소.”
“내 욕망 때문에?”
“그렇소. 당장의 위험을 타파하고자 손은 잡겠지만, 묵룡의 사람이 되고 싶진 않소.”
“말하자면 전우로구먼.”
“그렇소.”
“그래서 아쉽네. 자네가 세상을 관전만 한 것이.”
양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세상과 제대로 드잡이질을 했다면, 나의 이 욕망을 이해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이해는 했어도 동의하진 않았을 거요. 나도 머리가 굳을 대로 굳어서, 내 사상과 신념을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소.”
“허허허.”
“연 부관은 달랐소.”
“음?”
막원이 뒷짐을 졌다.
“나는 부주께서 연 부관을 그리 고평가할 줄은 몰랐소. 내가 모르는 연 부관의 능력을 잘 알고 계신 것이겠지. 다만, 나도 연 부관을 보며 느낀 게 있소.”
“…….”
“연 부관에게는 야망이 없소. 오로지 신념이 있을 뿐이오.”
“신념이라.”
“그렇소. 연 부관의 두 눈이, 그의 살기가, 천하제일 후기지수의 불타는 심장이 노리는 곳에는 오직 삼교만이 있을 뿐이오.”
“…….”
“점쟁이가 아닌지라 사람의 미래를 점칠 수는 없소만, 적어도 내가 본 연 부관은 삼교를 막는 데에 성공하면 세상일에 손을 떼고 고향으로 가서 고즈넉하게 살 사람처럼 보였소.”
보면 볼수록 놀라운 안목이었다. 양천 역시 연호정이 원하는 삶이 그러한 삶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소. 세상은 욕심 가진 사람들 덕분에 피폐해지고, 또 그들 덕분에 발전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막원이 피식 웃었다.
“지금의 나는, 연 부관의 그런 면이 참 마음에 드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하면? 묵룡부 소속으로 들어오지 않겠다는 것인가?”
“무림맹 소속으로 들어갈 것이오.”
“……?!”
“어차피 무림맹과 동맹을 맺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다면, 내가 어느 곳에 소속되든 나라는 전력 하나는 얻었다는 뜻이 될 것이오. 하긴, 무림맹이 나를 받아 줘야겠지만.”
“이보게, 막원.”
막원이 고개를 저었다.
“나를 설득하려 들지 마시오. 설득되지 않을 테니까. 그건 부주께서도 알고 계시잖소?”
“…….”
“우리는 공동의 적을 맞이하여 힘을 합칠 것이오. 부주께서도 그것을 원했잖소? 하니, 지금의 내 선택에 충분히 만족해 주시오.”
양천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자네 말마따나 전쟁이 끝나면 흑도와 백도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 있을 걸세. 그런 상황이 생길 경우, 나는 무림맹 소속이었던 자네를 친근히 대해 줄 수 없네.”
“새삼스러울 것 없잖소? 삼교와의 일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부주께서도 내 목숨을 걱정하지 않았을 것 아니오?”
“……끄응.”
양천이 투덜거렸다.
“자네는 참 사람 마음 복잡하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군.”
“천성인 모양이오.”
막원이 몸을 돌렸다.
“갑시다. 연 부관도 불러 주시오. 창왕, 아니 내 사형에 관한 얘기도 전부 해 드리리다.”
뒷짐을 진 그가 느긋한 걸음으로 협곡을 내려갔다.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연호정, 이 나쁜 놈아.”
대체 그놈에게 무슨 매력이 있는 걸까.
어째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아닌 연호정이 바라보는 곳을 선택하려 하는 것일까.
물론 양천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을 인정하면, 자신은 야욕에 미쳐 날뛰는 노회한 추물에 불과한 자가 되어 버리니까.
“참, 꿈 한번 이루기 쉽지 않구먼.”
양천은 투덜거리며 막원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