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강자존(强者存) (3)
엽성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미쳐 날뛴다…… 확실히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네는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누구보다 과격해질 수 있는 사람이지.”
“틀렸다.”
우우웅.
연호정의 눈에 은은한 홍색 광채가 떠올랐다.
“굳이 필요하지 않아도, 열받으면 앞뒤 안 재고 난장을 치는 놈이 나야.”
“아니, 그렇지 않아. 너는 남들에게 그런 식으로 협박을 했겠지만, 내가 조사한 너는 지독하게 치밀하고 계획적인 놈이다.”
“나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슬슬 열받기 시작했다는 거지.”
엽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어쩔 텐가? 내가 너를 잡아 족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너 역시 절대 나를 공격할 수 없을 텐데?”
“왜 그렇게 생각하나?”
“이유는 네가 말하지 않았나? 너는 무림맹이 파견한 대표야. 그런 사람이 묵룡부의 후계자 중 하나를 공격한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정치적 사안인지 모르나?”
“편할 대로 생각하는 그 버릇, 그게 네 목줄을 조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텐데.”
“뭐?”
우두둑!
연호정이 손목을 돌렸다. 단단하게 주먹을 쥔 손에서 은은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이보게, 멍청한 친구. 정치에서 ‘절대’는 없다네.”
“…….”
“어떤 심각한 사안이라도 무마할 수 있는 게 정치야. 그리고 모든 정치는 이해관계에 그 근본을 두지.”
연호정이 검지를 펴 엽성을 가리켰다.
“너와 나, 둘 중 누굴 더 중히 여길 것 같으냐?”
“같잖은 말장난이군. 이건 누굴 더 아끼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잘 봤다. 누굴 더 아끼느냐의 차이가 아니야. 누굴 더 필요로 하느냐의 차이다.”
연호정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방금 네가 말했지? 나는 치밀한 놈이라고.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한 수, 한 수를 계획하는 놈은 아니지만, 필요하다면 충분히 대가리를 굴릴 수 있는 사람이 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내가 왜 별 인연도 없는 네가 청한 술자리에 순순히 응했는지 아나?”
“……?”
“설마 당연하다고 생각했나? 투왕 양천의 대제자니까 누구도 내 부탁을 거부할 수는 없을 거다. 뭐,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었나?”
엽성의 눈이 굳어졌다.
연호정의 말을 들으며, 그는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무슨 짓을 하진 않았다. 이제 할 생각이지.”
“뭐?”
“굳이 이런 유치한 짓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네가 뱉은 말을 부주께 전해 드릴 생각이다.”
“……?!”
“양 부주는 후계자 다툼 따위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어. 삼교와의 전쟁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계획을 짜고 있는 사람이 나야. 부주도 나도, 너 따위 애송이들의 정치판에 낄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너……!”
“부탁에 목숨을 건다고? 하면, 상대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했어야지. 한데 고작 한다는 생각이 내 사람들을 괴롭혀 보시겠다? 너 정말 양 부주 제자 맞냐?”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정 실권을 잡고 싶었다면 시원하게 다른 후계자들부터 박살을 내 놓고 왔어야지. 그랬다면 네 말마따나, 양 부주도 기특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
“아까도 말했지만, 넌 너무 편한 대로 보면서 사는군. 차라리 부선인가 하는 그 여자가 열 배는 더 낫겠어.”
순간 엽성의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후우우우웅.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공기가 놀라 제멋대로 흩어지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그야말로 대단한 살기였다. 살기의 농도만 보자면 연호정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호정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객잔의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뿐이었다.
엽성이 말했다.
“그 문을 열면, 넌 죽는다.”
무서운 목소리였다.
농도 짙은 살기와 섞여 나오는 목소리는 마치 거대한 야수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연호정이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헛짓거리하면 너도 죽어.”
딸칵.
문이 열렸다.
엽성의 주먹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퍼어어어엉!
폭음과 함께 엽성의 몸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가지처럼 휘청거리며 객잔 끝 벽까지 물러났다.
엽성의 표정은 여전히 살기로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경악으로 얼룩져 있었다.
“쓸 만하군.”
연호정은 몸을 반만 돌린 채 한 손을 뻗고 있었다.
커다란 손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엽성의 권풍(拳風)을 받아친 장법, 연가의 절정무공 반룡장(反龍掌)이었다.
“확실히 재능은 있어. 이 재능을 오롯이 무도(武道)에 쏟았다면, 지금쯤 나와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었을 텐데.”
“……!”
“넌 강해. 하지만 그뿐이다.”
연호정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우두둑.
천천히 말아 쥐는데도 살벌한 소리가 났다.
이전이었다면 코웃음을 치며 넘겼을 소리가, 지금은 그렇게 살벌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자, 그럼.”
스르륵.
연호정이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엽성은 물론 점소이 역할을 하던 고수, 그리고 주방 안에 들어가 있는 두 명의 고수까지 모두가 몸을 움찔거렸다.
강하게 진각을 밟은 것도 아니요, 그저 부드럽게 한 발 내디딘 것에 불과한데도 공기가 바뀌고 있었다.
“가볍게 회초리 좀 들어 볼까.”
엽성이 외쳤다.
“공격……!”
콰아앙!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점소이 역할을 하던 고수의 머리통이 폭발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해일처럼 쏟아져 나온 호왕구벽장(虎王九霹掌)의 장력은 그 너머 주방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콰르르릉.
객잔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세 명의 일류고수들이 눈 깜짝할 새에 죽어 버렸다.
그야말로 인정사정없는 살수였다. 어차피 자신에게 살수를 가할 놈들이니, 선수를 쳐서 먼저 죽여 버린 것이다.
잔혹하고 무정하다. 하지만 이것이 흑도의 방식이었다.
수틀리면 상대는 물론 상대의 모든 전력을 땅에 파묻어 버리는 것.
모든 문제를 피의 무게로 해결한다. 그것이 흑도의 방식인 것이다.
파아아아앙!
연호정의 접근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엽성은 살면서, 양천 이외에 이토록 빠르게 움직이는 자를 처음 보았다.
콰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객잔 벽 한쪽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벽 하나를 날리고도 힘이 줄지 않은 장력은 멀찍이 떨어진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까지 분쇄해 버린 후에야 사그라들었다.
‘……!!’
본능적으로 회피한 엽성은 연호정의 공격이 만들어 낸 광경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 정도 결과는 자신도 낼 수 있다. 문제는 속도와 범위, 내력의 조절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 할 정도의 내공을 쓰면 그 역시 저런 결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연호정은 한 푼도 안 되는 내공으로 자신보다 더 빠르고, 더 강하고, 더 넓은 범위를 휩쓸어 버리는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단 한 수만에 엽성은 깨달았다. 연호정은 자신이 감히 비빌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극한의 강자라는 사실을.
‘미친!’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연호정이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아무리 잘 쳐줘도 자신에 근접한 실력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적어도 엽성에게는 그러했다.
하지만 그는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미 연호정의 나이에 그만한 경지에 오른 것 자체가 비합리적이며, 그렇다면 엽성 자신보다도 우위에 있을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는 점이었다.
연호정의 공격이 이어졌다.
부우우웅! 퍼어엉!
그 잠깐 새에 코앞까지 도달하여 송곳처럼 날카로운 각법을 쏘아 낸다.
양팔을 교차해 막았는데, 막은 부위에서 폭음이 터졌다. 막아 낸 양팔이 또 하나의 급소가 된 것처럼 엄청난 통증과 충격이 느껴졌다.
‘포탄 같다.’
고작 발길질 한 번이었을 뿐이다. 그 발길질 한 번의 위력이 화포로 쏘아 낸 화탄을 연상케 했다.
파바바박!
엽성은 곧바로 자세를 갖춰 후속타를 대비했다.
하지만.
‘……?!’
연호정이 보이질 않았다.
또 그 찰나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빠른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정수리가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신법이나 보법을 쓰면 늦는다.
엽성은 본능적으로 땅을 굴렀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옳았다.
콰앙!
하늘 위에서부터 내리꽂힌 주먹질 한 번에 뼈대만 남았던 객잔 골조가 태풍을 맞은 것처럼 사방으로 뜯겨 날아가 버렸다.
“크윽!”
엽성의 입에서 기어이 신음이 흘러나왔다.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회피했는데도 무섭게 증폭된 충격파에 내부가 진탕되었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직격타를 허용한 것도, 간접적인 일격을 허용한 것도 아닌데 고작 충격파만으로도 내상을 입었다.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무공인가. 지금의 엽성으로서는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경지였다.
같은 초절정의 영역?
이건 이름만 같은 초절정이다. 수준이 다르고 깊이가 달랐다. 보고 있는 세상 자체가 다른 것이다.
“설마하니.”
훅!
그 광범위한 일격을 터트렸음에도 불구하고 또 곧바로 자신의 앞에 도달했다.
숨도 안 쉬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력 운용이 번개보다도 빠르다.
“비루한 똥개처럼 여기서 꼬리를 마는 건 아니지?”
“이 새끼가!”
부우우웅!
엽성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마치 사자의 앞발처럼 손가락을 잔뜩 구부려 후려치는 무공, 사자철조(獅子鐵爪)의 무공이었다.
퍼어어엉!
엽성의 눈이 흔들렸다.
마땅히 연호정의 복부 근육을 뜯어냈어야 할 손이, 어느새 연호정의 손에 잡혔다.
그것도 깍지를 낀 채로.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단련은 열심히 했는데, 성과가 영 꽝이군.”
“……!”
“이 정도 아귀힘으로 네 스승의 일격이나마 받아 낼 수 있겠나?”
연호정의 손에 백호기가 소용돌이쳤다.
그의 손가락이 엽성의 손가락과 손등을 그대로 뭉개 버렸다.
우두두두두둑!
“크악!”
엽성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질러 놓고도 스스로가 깜짝 놀랄 만한 비명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비명을 지른 적이 없던 그였다.
하지만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섯 손가락과 손등뼈가 모조리 으스러지는 고통은 맨정신으로 참기 힘들 정도였다.
연호정의 발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퍼버버버버벅!
이번에는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초근거리에서 화탄처럼 쏘아지는 십이 연격의 각법이 그의 복부와 갈비뼈에 집중적으로 쏟아진 것이다.
“쿨럭!”
엽성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쓰러지진 않았지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내상을 입은 것도 모자라 갈비뼈가 다섯 대나 나가 버린 것이다.
연호정이 손을 털었다.
“이 정도로 봐주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널 죽이면 안 되거든.”
“쿨럭! 우웨에엑!”
“이제 집으로 가거라, 꼬마야.”
엽성이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엽성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연호정의 눈빛이 너무도 살벌했던 것이다.
살기였다.
그 자신이 지닌 진하기만 한 살기가 아니라, 극단적으로 집중되어 정신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살기였다.
“안 가? 지금 여기서 죽을래?”
“이익!”
엽성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묵룡부로 향했다. 서둘러 도망치려는 듯, 걸음이 무척이나 빨랐다.
스르륵.
연호정이 기도를 잠재웠다.
“거 새끼 참, 인내심 하나는 좋네. 쓸데없이 말만 많았잖아. 먼저 손쓰게 하느라 너무 나불거렸어.”
놈이 어지간한 흑도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얘기의 절반도 가지 않아서 이미 칼을 뽑았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나름대로 장점을 가진 놈이긴 했다.
“사냥꾼으로 살다가 사냥감이 된 심정, 처절하게 느껴 보도록 해라.”
연호정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엽성의 뒤를 쫓았다.
호랑이가 초주검이 되어 나타났으니, 기회를 노리던 암사자와 늑대가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