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47화 (546/963)

547화. 서쪽으로 부는 바람 (1)

“부주님. 연 부관이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라.”

쿠구궁.

대전의 문이 열리고, 연호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는가?”

양천은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가만히 그를 보던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답지 않게 혼자 분위기 잡고 계셨습니까?”

“그냥.”

양천이 웃으며 물었다.

“잡았나?”

“잡았습니다. 어떻게든 목숨은 붙여 놨지요.”

“잘했네. 본부의 형옥 관리자들이 사람 속내 끄집어내는 데엔 일가견이 있거든.”

고문의 전문가라는 뜻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목숨을 내놓은 사람입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목숨을 내놓은 무수히 많은 놈들이 죄다 입을 열게 만드는 게 형옥의 관리자들이라네. 상대에 따라 최적의 방법을 찾아서 없던 비밀까지 탈탈 털어 낼 걸세.”

“없던 비밀을 토설하게 하면 안 되지요.”

“말이 그렇다는 걸세.”

양천이 턱짓으로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켰다.

“와서 한잔 들게. 고생했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연호정이 시원하게 잔을 비웠다.

“엽성은 잡았습니까?”

“잡았네.”

“역시 묵룡부 안에 있었군요.”

“녀석이 어떻게 움직일지 대강 알고 있었네. 녀석은 스스로를 잘 숨긴다고 숨겼겠지만, 생각보다 알기 쉬운 성격이거든.”

양천이 쓰게 웃었다.

“반면, 그 녀석은 나를 저 좋을 대로만 보고 있었더구먼.”

“스승의 그림자가 무거우면 다들 그렇게 되는 법이지요.”

양천은 답이 없었다.

그의 잔을 채워 주며, 연호정이 말했다.

“사음교일 확률이 지극히 높습니다.”

“……역시 그런가.”

“문제는, 엽성만이 다가 아니라는 거지요.”

“그렇겠지.”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잘된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잠시 사천으로 가야겠습니다.”

“그러시게. 음제가 사천과 섬서를 오간다고 하였지. 아마 지금쯤 섬서에 있기야 할 테지만…….”

“음제도 그렇고, 당가에도 잠시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

“당가?”

“당가에 사흡공이 풀렸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설명하게.”

연호정은 효극과의 대화를 전부 들려주었다.

“흐음.”

양천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남만 오독궁이라…… 그래, 꽤 오래전이었지. 당가와 오독궁이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는 말은 들었네.”

“당가는 중원 천하에 산재하는 모든 약독(藥毒)에 정통한 가문입니다. 하지만 단 한 군데에선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었지요.”

“운남성(雲南省).”

“그렇습니다. 당가는 그쪽으로도 진출하고 싶어 했으나, 뜻밖의 철벽이 가로막고 있었지요. 그게 바로 오독궁이었습니다.”

“오독궁과의 싸움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네. 애초에 크게 떠들어 댈 것도 아니었지. 다만, 운남에서 벌어진 싸움이 상당히 지독했다는 건 알고 있네.”

“제가 잡은 자가 바로 오독궁의 일원입니다. 그자는 당가의 ‘당’ 자만 들어도 본능적으로 살기를 흘릴 정도로 증오로 가득 차 있었어요.”

“그런데도 삶을 포기했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의 복수를 이루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즉, 당가에 일이 생겼을 확률이 지극히 높습니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이보게, 연 부관.”

“말씀하십시오.”

“그건 당가에서 알아서 하라고 하게. 자네는 묵룡부 소속이야.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묵룡부 소속으로서, 그리고 무림맹 파견원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이 사실을 당가 측에도 알릴 생각입니다.”

“그래, 다른 데에 신경 쓸 때가 아니네.”

“다만…… 혈족(血族)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철혈의 당가라도 제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흐음.”

양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굳이 끼어들어야겠나?”

“사실 저도 당가 문제에까지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별수 없어요.”

“왜 그런가?”

“당가는 사천의 제왕입니다. 청성과 아미가 버젓이 버티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천의 경제와 민생을 아우르는 역할은 당가가 맡고 있지요.”

“그렇겠지.”

“무림사(武林史)를 뒤져 봐도, 새외와의 싸움에서 당가만큼 피해가 큰 가문이 없습니다. 이유는 분명하지요. 새외 세력이 중원으로 침투하는 일차 관문이 사천성이기 때문입니다.”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대개의 경우 그렇지.”

“기실,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형식이든 사천성이 무너지면 삼교 병력의 중원 진출이 한결 쉬워지지요.”

“음.”

“사천성은 거대한 분지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외세가 쉽게 뚫지 못하는 형국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적들이 탐을 내는 지역입니다. 한번 장악하면, 어지간해서는 뚫리지 않으니까요.”

“허어.”

양천이 한숨을 쉬었다.

“정말 신경 쓸 데가 많구먼.”

“그렇지요.”

“자네가 아니어도 일 잘하는 사람은 많아. 자네만큼은 아니겠지만. 더군다나 사천당가에는 ‘그’가 있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암왕 당형.”

당대 무림의 절대자 중 하나.

사천제일의 무신(武神)이자 독암(毒暗)의 지배자로,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무인이라 불리는 희대의 패자가 그였다.

“당형과는 만나 본 적이 없지만, 그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인물인지는 잘 알고 있네. 일선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가문에 삼교의 마수가 드리워졌음을 알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게야.”

“맞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 건은…….”

“이번 한 번만.”

연호정의 얼굴은 진지했다.

“이번 한 번만 예외를 인정해 주십시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양천이 혀를 찼다.

“젠장, 자네를 내 어찌 막겠나? 자네가 굳이 직접 끼어들겠다고 했으니 그만큼 위험한 판인 건 맞겠지.”

“감사합니다.”

“나는 그저 걱정이 될 뿐이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자네는 지금 너무 무리하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게 불안한 것 같지는 않은데, 혼자서 너무 여기저기 쑤시고 있단 말일세.”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인정합니다.”

“이번 한 번만이야. 이번 한 번만 용인할 테니,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후우.”

양천은 자신의 잔과 연호정의 잔을 채웠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자네 말이 맞네. 사천성은 절대 무너져서는 안 될 곳이지. 게다가 청성파의 장문인이 그 난리를 피웠으니, 청성도 많이 위축되었을 것이고.”

“그렇겠지요.”

“여러모로 심란하군. 내가 직접 뛰어다녔다면 이렇게 답답하진 않았을 것을.”

“한 번씩 바람이라도 쐬십시오.”

“바람? 글쎄.”

잔을 비운 양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실이나 좀 다져야겠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양천의 기분도 최악에 가까웠다.

엽성의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돌았다. 녀석은 대단한 착각을 했지만, 또 달리 보면 녀석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어쩌면 자신은 방목이라는 명목하에 지나치게 편히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정작 신경 써야 할 곳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물끄러미 양천을 보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기존의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면, 이제는 바꿔 보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자네 눈은 못 속이겠군.”

양천이 입맛을 다셨다.

“지금 와서 어쩌겠는가? 뭐, 하라면 못할 것도 없지만 굳이 지금 제자를 또 들여서 가르치기에는…….”

“또 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이공녀가 버젓이 잘 살아 있는데요.”

“…….”

“솔직히 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이공녀만 한 인재를 찾기도 어렵습니다.”

“허허.”

“무림에서 가장 귀한 재능은 무(武)의 재능이 아닙니다. 살아남는 재능이지요.”

“자네 말이 맞네.”

“굳이 이공녀를 부주처럼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공녀가 후계자로서 좋은 인재라고 생각하신다면, 그저 잘 가르쳐 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말은 쉽지. 둘째가 무극의 경지를 깨닫지 못하면 결국 속 빈 강정이 될 뿐일세. 게다가 둘째는 여자이지 않은가? 강한 놈이 최고라고 떠받드는 세상이라지만, 결국 이런저런 무시를 당할 거란 말일세.”

“그렇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서든 부주님만큼은 강해져야 한다는 뜻입니까?”

“나 정도로 강해져도 무시를 안 당할지 모르겠네.”

“세상에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지.”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럼 부주께서 흑도라는 세상을 바꿔 버리면 되잖습니까?”

“……뭐?”

“어쨌거나 흑도도 사람 사는 곳입니다. 흑도라고 훔치고, 능욕하고, 강도질하고, 살인이 일상다반사로 벌어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요.”

양천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어디 쉽겠는가? 그리고 그건 흑도가 아니야.”

“누가 정했습니까? 그게 흑도가 아니라고.”

“…….”

“흑도도 낭만이 있던 시절이 있었지요. 나름의 규칙과 예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의 흑도에 그런 게 있습니까?”

“……없지.”

“최소한 그 시절로 돌아가기만 해도 좋아질 겁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리할 수 있느냐야. 무림 역사상 흑도를 제 입맛대로 바꾼 사람이나 조직은 없었어.”

“있었습니다.”

“음?”

연호정은 쓴웃음을 지었다.

‘흑제성이라고 있었소.’

흑암제 시절, 흑제성은 흑도 최초의 통일 연맹이었다.

지금의 묵룡부와도 성격이 달랐다. 흑제성은 강철 같은 강함으로 똘똘 뭉친 ‘진짜’들의 조직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흑제성을 동경하는 흑도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흑도는 변했다.

진짜들이 사는 세상으로, 짐승들이 판을 치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 내일을 꿈꾸는 이들이 가득한 세상으로 변했던 것이다.

“흑도를 변케 하기 위해서는 묵룡부가 어떻게 움직일지가 중요합니다. 묵룡부가 모든 흑도인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다면, 그때는 흑도라는 세상을 뒤바꾸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잔을 놓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적당히 드십시오. 절대고수도 세월은 못 막는 법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대전을 나섰다.

그가 대전의 계단으로 내려가기 전, 양천이 물었다.

“세상이 바뀌겠는가?”

연호정은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일단 지켜 내야지요. 저도, 부주님도 그것 하나를 위해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겁니다.”

* * *

사흘 뒤.

“어쩐 일인가? 여기까지 찾아오고. 그리고…….”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복장은 또 뭐고?”

“복장이 뭐가 어때서 그런가?”

황석태의 담담한 반응에 연호정이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철기단장에서 해임됐나?”

언제 어디서나 경갑 갑주를 차고 있던 황석태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벼운 흑색 무복 차림에 붉은색 장창을 든 그의 모습은 묘하게 산뜻해 보였다.

“상부에서 명령이 떨어졌네. 이번에도 자네를 도우라더군.”

“다른 사람이랑 가도 돼. 자네는 철기단과 함께 훈련해야 할 것 아닌가?”

“자네가 짜 준 훈련 일정 덕분에 쉴 새 없네. 몇 달간은 괜찮을 거야.”

황석태가 벽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상부에서의 명령일세.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쩝, 그렇구먼.”

“그래서 언제 출발하나?”

“오늘내일 중으로 출발할 거야. 일단 사람부터 만나야 하지만.”

“사람? 누구?”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서역신녀가 곧 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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