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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550화 (549/963)

550화. 서쪽으로 부는 바람 (4)

촤아아악!

흑룡부가 종횡으로 움직이며 섬뜩한 참격을 뿌렸다.

촤르르륵!

교룡쇄에 연결된 백룡부가 꿈틀거리며 거대한 감옥을 형성했다.

굉장한 일이었다. 양손으로 서로 다른 형태의 움직임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음.’

파바바바박!

신들린 도끼질로 수천 번이나 허공을 베어 낸 연호정이 흑백쌍룡을 회수했다.

연호정이 자신의 두 도끼를 내려다보았다.

‘조금씩 붙는다.’

광룡부가 어쩐지 낯설게 느껴졌더랬다. 흑백쌍룡부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느새 광룡부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다시 흑백쌍룡부의 움직임이 조금씩 익숙해지는 기분이었다.

‘희한하군.’

주병기가 낯설게 느껴지는 상황은 그냥 넘길 게 아니었다. 특히 고수일수록, 큰 깨달음을 앞둔 사람일수록 더더욱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흑암제 시절에도 이런 일은 없었다.

‘병기가 낯설어졌다가 다시 익숙해진다. 낯설고 익숙해짐은 마음의 문제고, 마음의 문제는 곧 기(氣)의 문제야. 그렇다면 내 진기(眞氣)가 점점 변화하고 있다는 뜻인데.’

감각적인 문제도 같은 결이라고 봐야 했다.

그는 한 상황에 지극히 집중하고 있더라도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했다. 연호정 정도의 고수에게는 오히려 그만한 감각이 없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근래 들어 한 상황에 집중하면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흑백쌍룡부가 다시 익숙해진 것처럼 그의 감각도 조금씩 예전대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 또한 진기의 문제일 것이다. 기는 곧 의념, 의념은 곧 마음. 나의 진기가 끊임없이 변화를 부르짖고 있기에 내 무공도, 내 상태도 변하고 있는 것이다…….’

연호정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무학에 대한 그의 안목은 성천십삼좌만큼 대단했다. 과거에 이룬 경지가 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이렇게 이상한 일을 경험해 보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양천은 달랐다.’

그렇다. 양천은 다른 듯했다.

과거 양천은 자신의 변화를 보며 알고는 있지만,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다.

연호정은 양천이 괜한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작은 그릇이 아니었으니까.

즉, 양천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을 한 번 겪었다는 것인데.

‘대체 그게 무엇일까.’

이 상황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깨닫는다고 경지가 상승할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알아내야 했다. 자신의 상태를 본인이 모르고 지나친다면, 훗날 반드시 파탄이 일어난다. 무공은 물론 심신에도.

‘양천이 말해 주지 않은 것은 말해 줘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외면했을 리는 없어. 즉, 지금의 상황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당장 내 몸이나 무공에 큰 이상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곰곰이 생각을 이어 가던 연호정이 이내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역시 나는 재능이 없는 건가.”

없는 재능을 생사의 결전과 사신무로 꾸역꾸역 돌파하여 천하제일을 논할 만한 힘을 얻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에 이르러서는 분명한 한계가 보인다. 누가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혀를 차겠지만, 연호정은 자신의 재능이 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수 없지. 없는 재능을 아쉬워할 때가 아니니까.’

흑백쌍룡부를 수거한 그가 다시 거처로 돌아왔다.

거처 앞에는 어느새 패율과 강량, 그리고 황석태가 서 있었다.

패율이 인상을 찡그렸다.

“잠 안 잤냐? 아니면 진즉 일어나서 수련하고 온 거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내일이나 올 줄 알았다.”

“죄송합니다. 고민이 좀 많아서.”

“오죽하시겠어.”

“막원 선배님은 만나 뵈었습니까?”

“치료 중이라며? 건드리면 안 될 것 아냐.”

“치료라고는 해도 서역신녀가 애를 쓸 일이지, 막원 선배가 고민할 일은 아니잖습니까.”

“뭐가 됐든.”

연호정이 강량에게 물었다.

“준비됐냐?”

“물론이지요.”

“이번 일은 특히 위험하다. 죽지 않게 조심해야 할 거다.”

“죽으면 제 그릇이 거기까지였던 것이지요.”

“웃기고 있네.”

연호정이 황석태에게 고개를 돌렸다. 황석태는 여전히 가벼운 무복 차림에 적창을 끌어안고 있었다.

“철기단과 인사는 했나?”

“누가 들으면 죽으러 가는 길인 줄 알겠네.”

“그간의 어떤 임무보다도 어려운 임무가 될 수도 있네.”

“걱정하지 말게. 정 위험하면 도망칠 테니까.”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적어도 강량이 생각하기에는 그런 모양이었다.

강량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철기단주씩이나 되시는 분도 죽음은 두려우신 모양입니다?”

황석태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철기단주로서가 아니라 무인 황석태로서 참여하는 임무다. 철기단주로서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라면, 나는 언제든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다.”

“대단한 자존심인데요?”

“나도 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준비는 다 된 것 같군. 슬슬 가 봅시다.”

패율이 물었다.

“한데 어디부터 건드릴 거냐? 당가? 아니면 음제?”

연호정이 거처 앞에 세워 둔 자신의 철창을 들며 말했다.

“당연히 당가입니다.”

* * *

쿠르르릉.

벽이 열리고, 백서가 들어왔다.

“부주님.”

“말씀하시게.”

“연 부관 일행이 조금 전 부를 떠났습니다.”

“그랬나.”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양천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잘 마치고 오려나 모르겠군.”

연호정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은 잘 안다.

연호정이 진짜 대단한 점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임무를 성공시켜서가 아니었다.

예전 백서에게 말했을 때와 같이, 연호정은 치고 들어가야 할 때와 뒤로 빠져야 할 때를 귀신같이 안다.

그것은 임무의 성공 여부를 떠나, 생존의 문제였다. 연호정의 감은 누구보다 날카로웠고, 덕분에 패배는 해도 죽지는 않는다.

그래서 믿음이 가는 것이다. 감도 좋고, 능력은 그보다 더 좋으니까.

믿고 일을 맡길 수하라고 한다면, 정말이지 연호정만 한 녀석이 없을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천하의 연호정도 쉽지 않을 것이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아마도 이번 임무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선은, 연호정 그놈의 감각이나 안목 이전에 무공이 될 것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연호정이 이번 임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공의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는 그 죽음의 난장판을 헤쳐 나오기가 지극히 어려울 것이다. 전략 전술로 해결이 가능한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음제의 경우가 그렇다.

하은교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손에 피를 많이 묻힌 고수였다. 그 정보를 어제 보고받았다.

물론 세세한 정보는 없었다. 음제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았다.

마치 창왕 소현립과 백병신군 막원처럼.

‘음제라…….’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까다로운 자야. 어쩌면 성천의 강자 중 가장 까다로울 수도 있다.’

개인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왠지 냄새가 났다.

위험하고 살벌한, 한번 잘못 건드리면 사정없이 난도질당할 것 같은 광기 어린 피 냄새였다.

“연 부관에게 전했나? 음제에 관한 정보?”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시시각각 음제에 관한 정보를 전달할 것입니다.”

“좋아.”

“한데…… 부주님.”

“말씀하시게.”

백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일까 싶은 질문입니다만…….”

“자네답지 않게 뜸을 들이나? 말씀해 보시게.”

“얼마 전, 이공녀도 함께 딸려 보내겠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그랬지.”

“한데 갑자기 생각을 바꾸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선이 위험할까 봐 그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양천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공녀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텐데요.”

“경험 좀 쌓으려다가 목숨이 날아갈 걸세.”

백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이공녀의 목숨을 걱정하셨단 말인가?

양천이 눈을 감았다.

“생각해 봤네. 나한테 뭐가 부족한 건지. 아니, 부족하다기보다는 이대로 가도 좋은지, 아니면 변화가 필요한지를 생각해 봤지.”

“…….”

“아직 답은 얻지 못했네. 다만 이런 생각이 들더군.”

눈을 뜬 양천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둘째가 죽으면 다시 제자를 키워야 할 텐데, 나는 그런 수고를 들이고 싶지 않네.”

살벌한 얘기를 잘도 웃으면서 얘기하는 그였다.

“뭐, 그런 걸 떠나서 둘째는 괜찮은 녀석이야. 좋은 ‘제자’이지. 어지간히 위험한 전장이라면 모를까, 누가 봐도 사지임이 분명한 곳에 보내야 쓰겠는가.”

양천이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쇠사슬에 칭칭 묶인 엽성과 효극이 쓰러져 있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둘째는 이제 후계자의 위치에 가장 가까워졌네. 아직 확정하진 않았지만, 조만간 둘째를 정식 후계자로 공표할 예정이라네.”

“……!”

“후계자로 정했으면, 녀석의 무공을 본격적으로 끌어올려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백서가 고개를 숙였다.

“부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허허, 자네가 죄송할 게 무언가? 결국 그간 내가 자네에게 보여 준 모습이 그리 무정했을 뿐이라네. 자네는 충분히 그리 생각할 수 있어.”

양천이 엽성을 보며 고소를 지었다.

“이 녀석이 무정하고 무관심했던 지난날의 나를 보며 홀로 착각 속의 삶을 살았듯이 말이야.”

백서는 당황했다. 어떤 대답을 드려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오해하지 말게. 비꼬는 게 아니니까. 나는 진심으로 지난날 나의 언행과 정리되지 않은 신념에 대해 반성 중이라네.”

“……부주님.”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는 없네. 후회한다 한들 이 녀석과 나 사이가 다시 봉합되겠는가?”

순간 양천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둘째를 후계자로 삼겠다고 작정을 했으니, 이제는 녀석의 앞길에 방해가 될 놈들을 모조리 치워 버려야겠지. 그것이 내가 나의 후계자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

“그래서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네. 나의 다짐을, 포부를 나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

“예?”

양천이 엽성과 효극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 이 두 놈 입에서 쓸 만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고?”

“……그렇습니다.”

“굳이 주둥이가 두 개씩이나 필요하겠는가?”

우우웅.

양천의 손짓을 따라 엽성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스르륵.

엽성이 눈을 떴다. 힘이 풀린 그 눈동자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양천의 얼굴에 살기가 맺히는 순간.

우두둑!

엽성의 목이 뒤로 완전히 꺾여 버렸다.

양천이 손을 내렸다.

키잉!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엽성이 쓰러졌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혀 내 후계자의 앞날에 방해가 될 종자를 살려 둘 필요는 없겠지.”

“……!”

“이제 내게는 둘째밖에 없네. 지난날 못난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혼란케 했다면, 지금부터라도 스승다운 스승으로서 소중한 제자를 위해 혼을 불태워야지. 안 그런가?”

양천이 뒷짐을 지고 몸을 돌렸다.

“죄인은 다시 형옥으로 돌려보내게. 시체는 태워 버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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