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2화. 붕괴의 조짐 (2)
“진짜 그래도 되겠냐?”
패율의 질문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몸만 편하다고 휴식이겠습니까. 정신도 좀 쉬게 해 줘야지요.”
“흠, 그럼 너도 한잔하지 그러냐?”
“이래 봬도 이번 임무의 책임자인데 저까지 마셔서야 쓰겠습니까. 이런저런 정보도 얻을 겸 밖에 좀 쏘다니다 오겠습니다.”
패율이 입맛을 다셨다.
“그래라. 그럼 난 한잔하러 간다.”
“예.”
연호정이 강량에게 말했다.
“너도 가서 한잔해라. 선배님 혼자 적적하시겠다.”
강량이 대답하기도 전에 패율이 진저리를 쳤다.
“됐다. 나는 혼자가 편해.”
강량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고 하시네요.”
“그럼 알아서 쉬고 있어.”
“그럽지요.”
강량이 패율을 따라갔다.
“술은 안 마셔도 밥은 먹어야겠습니다. 안주 좀 집어 먹다 갈게요.”
“마음대로 해라.”
그렇게 두 사람이 나갔다.
연호정이 젖은 머리를 털며 황석태에게 말했다.
“자네는 안 나가나?”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네들처럼 속 편한 성격이 못 돼.”
“알겠네. 쉬고 있게.”
“어디 가나?”
“근처 분위기 좀 둘러보려고.”
“정보를 얻기 위함이라면 나도 같이 가는 게 좋을 거다. 여기에도 흑도의 정보망이 있어.”
“그렇겠지. 하지만 사천 내에서는 흑도 정보망보다 우리 쪽 정보망을 이용하는 게 더 빨라.”
“개방인가.”
치리리링.
내의를 입고 교룡쇄를 두른 연호정이 깔끔한 백의를 입었다. 요대까지 잘 맨 그가 허리춤에 흑백쌍룡부를 찼다.
“어쨌든 다녀올 테니까 쉬고 있게.”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지. 가만히 있는다고 편히 쉬기도 힘들 것 같으니.”
“은근히 예민한 사람이로구만. 좋아, 같이 가지.”
그렇게 두 사람이 주루 밖으로 나섰다.
날이 쌀쌀해졌다곤 하지만 사천의 기후는 다른 지역보다 온난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일까? 저녁인데도 거리가 무척 활발했다.
“의외로군.”
거리를 걷던 황석태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보통 무림인을 피하는 게 정상인데.”
연호정은 허리춤에 큼직한 손도끼 두 자루를 차고 어깨에는 철창을 걸쳤다. 황석태는 딱 봐도 보병(寶兵)으로 보이는 붉은색 장창을 들고 있었다.
의복은 평범했지만, 누가 봐도 한 수가 있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굳이 다가오려 들지는 않았지만,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연호정이 말했다.
“치안이 좋다는 뜻이지.”
“음.”
“당가는 사천 전 지역에 다수의 분타를 지었어. 거기에 청성과 아미의 분타도 많아.”
황석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철옹성이로군.”
백도 정파에서 최고로 유명한 세력이 세 군데나 모여 있는 지역이 사천성이었다.
어지간하면 사고 자체가 나기 힘들다. 오히려 뒷골목 파락호들이나 염왕채를 놓은 악덕 상인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많아도, 무림인들은 대문파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민생에 문제가 터지면 관부보다도 더 빠르게 개입하여 안전에 최대한 신경을 쓴다.
그런 까닭에 사천인들은 관부보다 당가, 청성, 아미파를 훨씬 더 신뢰했다. 또한, 험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 특성상 사천 지역 밖으로 나가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말하자면 사천성은 하나의 독립된 국가나 다름이 없었다. 외부에서 온갖 일이 터져도, 사천성만큼은 안전하고 풍요로웠다.
사람들이 무림인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였다.
“치안이라.”
주변을 둘러보는 황석태의 눈이 깊어졌다.
연호정이 물었다.
“새롭지 않나?”
“…….”
“외세의 침공을 막느니 뭐니 하고는 있지만, 결국 중요한 건 우리의 이권 따위가 아니야. 바로 지금, 우리가 보는 이 평화로운 광경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지.”
“…….”
“천하제패를 꿈꾸든 천하제일인을 꿈꾸든,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무림과 동떨어진 사람들도 피해를 볼 수밖에 없어.”
“왜 그렇지?”
“그러한 꿈들의 공통점이 뭔 줄 아나? 바로 적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거야.”
“…….”
“천하제일이 되겠다…… 좋은 꿈이지. 낭만도 있고, 무인으로서 일생을 걸어 볼 만한 꿈이라고 생각하네. 하지만 그 꿈에 세력이 붙고 다툼이 더해지는 순간, 그 피해는 오롯이 이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네.”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억측이야.”
“인정하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 중요한 건,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지.”
“…….”
“세상을 바꾸지 말라는 건 아니야. 나도 세상이 바뀌길 원하네. 다만 변화를 맞이하는 세상은, 언제나 기존에 평화를 누렸던 사람들의 희생을 동반하지. 작게든, 크게든.”
연호정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많았다.
“세상의 발전이 조금 더디더라도, 민생의 최소 안전은 보장이 되었으면 좋겠어.”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이해는 하지만, 그 역시 너무 이상적인 말이라고 보네.”
“그래서 이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걸세. 사람들의 최소 안전조차 보장받기 힘든 세상이니까.”
“…….”
“그러니 노력해야지. 무력이든 금력이든 권력이든, 힘이 있는 사람이 노력을 해야지.”
“힘 있는 사람들도 같은 사람이야. 자발적인 희생이라면 몰라도, 힘 있는 사람이 나서지 않는다고 욕을 할 수는 없네.”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다네.”
“대다수의 사람들이 먹을 것 때문에 고통받지 아니하고, 삶에 허덕일지언정 최소의 안전이 보장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어쩌면 나 역시 자네처럼 생각했을지도 몰라.”
“…….”
“최소 안전을 보장받길 원하는 나의 욕망은 이상적이지만, 힘 있는 자의 무관심을 욕할 수 없다는 자네의 의견은 그저 속 편한 소리라고 생각하네.”
“속 편한 소리라…….”
“그렇다네. 강자존, 약육강식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논리도 탄탄한 평화 위에서 발휘된다면 좋겠지. 우리가 짐승과 다른 이유가 달리 있는 게 아니잖나?”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뭐, 사실 이런 말을 해도 내가 제일 짐승 같지만.”
황석태가 연호정을 보며 물었다.
“자네는 평화를 꿈꾸나?”
“평화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무림인은 평화로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어. 우리의 손에는 언제나 창칼이 쥐어져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무림도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
“먼 훗날에는 말이야.”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황석태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군. 나는 자네를 보면서 누구보다도 야성적이고 파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네. 필요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사람이라고 보았어.”
“잘 봤어. 나는 그런 사람이야.”
“한데 지금 내게 하는 말은 또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낭만적이로군.”
“이상을 꿈꾸는 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그리고 아닌 말로, 삼교가 중원을 노리지 않았다면 나 역시 무림이라는 세상에 이리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았을지도 몰라.”
“…….”
“만약 그랬다면, 힘 있는 자가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도 못 했을지도 모르지.”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결국은 다 가정에 불과할 뿐이야. 이렇게 말해 놓고도,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으면 나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나 지으면서 살 생각이었거든.”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자네가 농사를 짓고 산다고?”
“자가당착(自家撞着)이지. 힘 있는 사람이 세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는 벌써부터 고향에서 편히 살 생각을 하고 있어. 내가 가진 힘이 작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야.”
“…….”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네.”
일순 연호정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쓸데없이 말이 많았군. 책임지지도 못할 말들을 잘도 늘어놓았어. 나름대로 오래, 깊게 생각한 부분인데도 횡설수설하는 걸 보면 나도 그렇게 똑똑한 놈은 못 되는 것 같아.”
황석태가 피식 웃었다.
“남들 앞에서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말게. 욕먹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늑대들의 전략 전술이 아무리 뛰어나 봤자 늑대는 늑대야. 나는 딱 그 정도에 불과해.”
“그럼 나는 늑대만도 못한 놈이군.”
“아니지. 본인이 늑대인지 호랑이인지 사람인지를 몰라서 그러는 거지.”
황석태의 눈이 흔들렸다.
농담처럼 던진 말인데도 묘하게 울림이 있었다.
연호정이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난 전략 전술 잘 짜서 사냥하는 늑대가 되어 줄 테니까, 자네들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 생각하게.”
“…….”
“물론 사람으로서.”
황석태는 생각했다. 연호정은 확실히 다르다고.
묵룡부의 철기단장으로서, 양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흑도 최강의 부대를 관리하고 싶었다. 이후, 그 역시 양천처럼 천하 최강의 무인이 되고 싶었다.
아마 무림인들 대다수가 비슷할 것이다. 최고, 최강이 되고자 오늘도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되면, 그때는 돈이나 권력을 원하게 될 테고.
하지만 연호정은,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로 세상에 대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했다.
그것이 놀라웠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르다지만, 황석태는 한 번도 연호정처럼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자네는…….”
“호오.”
황석태의 말을 끊은 연호정의 눈이 일순 번쩍였다.
“역시 술 안 퍼먹고 나와서 두리번거리길 잘했군.”
“음?”
황석태의 시선이 연호정이 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연호정이 누굴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감각을 열게. 집중해 봐.”
우웅.
황석태는 내공으로 오감을 예민케 했다.
순간 그의 기감에 포착되는 한 줄기 기운.
“이 기운은…….”
“그래.”
연호정이 저 멀리 떨어진, 봇짐을 지고 죽립을 쓴 누군가를 응시했다.
“아미파다.”
황석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대화에 정신이 팔렸다지만 그 역시 초절정고수다. 그런 자신의 감각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진기를 갈무리했다면, 이는 보통 고수가 아니었다.
“여기서 오 리(五里) 떨어진 곳에 아미파의 분타가 있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 이쪽 사람을 만나게 되는군.”
“따라갈 건가?”
“따라가야지.”
“우리 임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네. 이 정도는 차라리 개방의 정보를 빌리는 게 나을 수 있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삼교가 사천을 공략 중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의 임무에 얽히지 않은 방파 따위는 없네.”
“음.”
“게다가…….”
연호정의 눈이 은은한 녹청빛을 발했다.
연가신단이 회전하며 청룡기를 깨웠다. 무섭게 예민해지는 감각 위, 청룡기 특유의 부드러운 진기가 일대를 훑으며 그에게 온갖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너무 조심스럽군.”
“조심스럽다고?”
“아미의 분타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것은 둘째 치더라도, 이곳은 사천이야. 사천에서 아미의 위상은 청성이나 당가에 뒤지지 않아.”
황석태의 눈이 멀리 떨어진 비구니의 등에 꽂혔다.
그는 저 비구니가 조심스럽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조심스러운 것 맞나?”
“발소리에 긴장이 느껴져. 아미의 보법은 진중하고 깊은데도 발끝부터 땅을 내딛고 있잖은가. 엄청나게 긴장했다는 증거일세.”
황석태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은 이 거리에서, 이 시끌벅적한 대로에서 저 멀리 떨어진 비구니의 발소리까지 듣고 있었던 것이다.
‘괴물이로군.’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첫날부터 재미있는 일이 터질 것 같아. 가자고.”
보행 속도가 빨라진 연호정을 뒤쫓으며 황석태는 생각했다.
역시 이놈은 짐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