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화. 낙원의 치욕 (3)
풍뢰자(風雷者)가 날카로운 눈으로 야산을 바라보았다.
“저기라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부점주를 납치한 일행이 저쪽으로 이동했다는 정보입니다. 사람들의 증언이 전부 일치하고 있습니다.”
“흐음.”
풍뢰자가 인상을 찡그렸다.
“등화가 기어이 문제를 일으키는군. 내 그래서 진즉에 다 목을 날려 버리라 하였거늘.”
끔찍한 말을 잘도 하는 그였다.
하지만 그 발언은 그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푸르른 청성산 구름이 새겨진 도복을 벗고, 어두운 흑회색 무복을 입은 그의 모습은 이미 도사가 아닌 검귀(劍鬼)나 다름이 없었다.
“면목이 없어요, 오라버니.”
풍뢰자 옆에 선 중년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등화사태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는 여성이었다. 어깨까지 오는 단발에 자연스러운 화장으로 한껏 미모를 살렸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고귀해 보였다.
풍뢰자가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어찌 자네의 잘못이겠는가. 등화는 옛날부터 엇나가기를 좋아했더랬지. 그래서 그 좋은 실력으로도 점주가 아닌 부점주로 활동하지 않았던가.”
“할 말이 없네요.”
“이미 우리는 자파의 허울을 벗어던진 이들이네. 자책하지 말게나.”
여인, 명진(明盡)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아직 문파가 주는 끔찍한 허울을 벗어던지지 못했어요.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때는 이산일가(二山一家)가 와해된 이후일 거예요.”
“그래, 그것도 맞지.”
“그전까지, 우리는 문파에서 내려준 도명과 법명을 벗어던질 수 없어요. 던져서도 안 되지요. 그런 식으로 현실을 외면해 봤자 패배감 가득한 미래만이 우리를 기다릴 거예요.”
세상을 뒤바꾸지도 못했는데 속세의 이름을 쓸 수는 없다.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정한 선이라는 게 있었다.
풍뢰자가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그래서 동생을 좋아하네. 동생은 부족한 오라비에게 과분한 깨달음을 주거든.”
“호호, 과찬이세요.”
기이한 광경이었다.
두 사람은, 뒤에 무수히 많은 고수들이 있음에도 서로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사요, 비구니다. 애초에 속세에서 벗어난 사람들일진대, 서로를 보는 눈에 정욕(情慾)의 기운이 가득했다.
놀랍게도, 뒤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 대다수의 얼굴에도 해소되지 못한 욕구가 가득했다. 필시 이곳으로 오기 전 한껏 색욕을 풀었을 것이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들 중 일부는 청성과 아미의 수행자요, 나머지 사십여 명은 이산일가의 절기를 오랜 시간 수련한 이들이었다.
문파 소속이 아닌 이들이야 그럴 수 있다지만, 열한 명의 초절정고수들은 분명 청성과 아미, 당가의 고위직에 앉은 명성 높은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 속세의 욕망이 가득했다. 색욕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걸친 옷은, 어둠에 녹아들기 좋은 색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놀랍도록 고급스러운 재질이었다.
이미 그들은 수행자가 아니었다. 속세의 욕망에 한껏 젖은 속인(俗人)이었다.
“일단 일부터 하세나. 어찌 되었든 등화를 구해야 하지 않겠나.”
“맞아요. 하지만 만일의 경우에는…….”
명진의 눈에 은근한 살기가 일었다.
“등화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사태를 묻어야겠지요.”
“옳은 말이네.”
풍뢰자가 손을 올렸다.
“자, 가 보자고.”
그렇게 오십여 명의 고수들이 천천히 야산으로 진격했다.
남은 백 명의 암살자들은 좌우로 빙 둘러 진형을 형성해 접근 중이었다. 삼현대라는 조직으로 함께 묶였지만, 애초에 흑안과 오십의 고수들 사이에는 무시 못 할 격차가 있었다.
무공도 무공이거니와 신분의 차이가 컸다. 감히 함께 걸을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전진했을까.
“음?”
풍뢰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흐음…… 놀랍구먼.”
“오라버니도 느끼셨어요?”
명진의 눈이 빛났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그렇구먼.”
야산이지만, 중턱 아래는 거의 수직에 가까웠다.
물론 그들 정도의 고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작정하고 신법을 전개한다면 순식간에 주파할 수 있는 각도요, 거리였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면, 여기에 뭔가 함정을 깔아 두었을 수도 있네.”
“의미는 없겠지만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풍뢰자가 우측을 바라보았다.
“당 아우.”
“예, 형님.”
거기에는 왜소한 체구의 사내가 있었다. 이제 오십이 갓 넘은 듯한 외모인데, 눈빛은 보검처럼 날카로웠다.
당가의 오장로, 당국이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함정의 낌새가 느껴지는가?”
당가는 독과 암기의 조종이다.
하지만 독과 암기에만 능통한 것이 아니었다. 독과 암기는 암습과 함정에서 최고의 효율을 낸다. 자연히 진법이나 함정에도 능통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당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함정의 기색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형 자체가 수성에 유리하기는 하나…… 우리 정도의 고수에게도 크게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이상하군.”
풍뢰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일단 대화부터 나누어 봄이 어떻겠나?”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좋네.”
풍뢰자가 고개를 들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비탈길이 뚝 끊기는 지점.
그곳에 한 명의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풍뢰자가 단전에 힘을 주었다.
“자네는 누구인가?”
울림 넘치는 목소리가 야산 전체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그 음성은 철저하게 야산에 국한되었다. 후방으로는 풍뢰자의 목소리가 퍼져 나가지 않았다.
굉장한 내공 조예였다. 청성파의 최고 장로라는 위치가 아깝지 않은 고수였다.
풍뢰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왕 이렇게 만났으니 통성명이나 해 보세.”
여유가 느껴지는 목소리.
중턱에 있던 사내, 패율이 말했다.
“대단한 내공이시오.”
풍뢰자가 미소를 지었다.
“칭찬 고맙네. 아직 멀긴 했지. 하나, 자네의 실력도 만만치는 않은 듯하네. 얼핏 보아도 자세가 보통이 아니야.”
그는 뒷골목에서 연호정에게 당했던 고수들과는 달랐다.
풍뢰자는 속세에 내려와 맛난 음식을 먹었고, 사치를 배웠으며, 색욕에 맛을 들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경험이 그의 무공을 한 차원 높은 경지로 끌어올렸다. 청성산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환경이, 도리어 새로운 깨달음을 끌어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명진 역시 풍뢰자와 같은 경험을 했다.
물론 그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련은 단 하루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
패율이 말했다.
“청성의 높으신 분이구려. 이 깊고 청아한 내공은 분명 천지일기공(天地一氣功)이 아니오?”
풍뢰자가 껄껄껄 웃었다.
“안목이 대단하구먼. 맞네. 내가 연성한 무공이 바로 천지일기공이라네.”
청성파에서도 손에 꼽히는 신공절학이 천지일기공이었다. 그런 신공을 이리도 깊게 연마했다면, 정말이지 보통 고수가 아니리라.
“안타깝구려.”
“무엇이 말인가?”
“당대에 천지일기공을 당신처럼 깊게 연마한 사람은 몇 없다고 들었소. 이유인즉, 그만큼 난해하기 때문이지.”
패율의 눈이 번뜩였다.
“그처럼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사도(邪道)에 빠지다니, 통탄할 일이오.”
당국이 버럭 외쳤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어디서 추잡스러운 주둥이를 놀리느냐!”
그때, 풍뢰자가 손을 올렸다.
“진정하게, 아우님.”
“하지만 형님.”
“알고 있었잖은가? 어차피 우리가 모든 것을 바꾸기 전까지는 이런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네. 기분이 나쁠 수는 있지만, 크게 흥분할 일은 아닐세.”
“……아우가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아닐세. 이해하네.”
풍뢰자가 다시 패율을 바라보았다.
“서로가 선 위치가 워낙에 다르군.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네.”
“…….”
“통성명을 하기 싫다면, 다른 걸 물어봄세. 등화는 어쨌는가?”
패율이 미소를 지었다.
달빛 아래 드러난 그의 싸늘한 미소는 보는 이의 신경을 곤두서게 할 만큼 섬뜩했다.
“어찌했을 것 같소?”
“죽였는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상태로 만들기는 했소이다.”
풍뢰자의 눈이 깊어졌다.
“그럴 필요가 있었는가?”
“필요? 그런 대화를 하고 싶소? 그렇다면 내가 더 의문이오. 당신들, 그런 무도한 세상에 발을 들일 필요가 있었소?”
“허허, 한 방 먹었군.”
풍뢰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부딪침은 필연이라 하나 조금은 쉽게 갈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당신들이 선을 넘은 순간, 그 누구도 당신들과는 쉽게 갈 수 없소.”
“부인하지 않겠네.”
스르릉.
풍뢰자가 검을 뽑아 들었다.
청성산을 상징하는 송풍검(松風劍)은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검은 무딘 도사의 검이 아닌, 강렬한 예기를 발하는 보석 박힌 패검이었다.
“대답해 줄 것 같진 않지만,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만 묻겠네.”
번쩍!
풍뢰자의 눈에 기광이 솟구쳤다.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보고 받은 인원수는 넷이었네만.”
우우우우웅.
패율이 단창을 뽑아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도 무시무시한 광채를 발했다.
“내가 왜 여기 남았겠소? 당신들을 다 잡아 죽이려고?”
“……?”
“천만에. 이미 내 일행들은 당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소이다.”
화아아악!
오십 고수들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가히 살기의 폭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존심과 배짱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패율이었지만, 이 많은 고수가 뿜는 기세에는 그조차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풍뢰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일을 어렵게 만드는구먼.”
“내가 하고 싶은 말이외다. 이 시국에 참으로 속도 편하시오.”
“안심하지 말게나. 우리의 눈은 사천 전역에 깔려 있네. 자네 일당 모두, 오늘의 일이 상부에 보고가 되기도 전에 잡힐 것이야.”
지잉! 지이이잉!
풍뢰자의 패검에 붉은 광영이 이글거렸다.
패율의 눈이 흔들렸다.
‘적하검!’
풍뢰자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일단, 자네부터 잡아 볼까.”
순간 그의 검이 하단에서 상단으로 그어졌다.
번쩍! 콰콰콰쾅!
수직으로 솟구친 적색 검광이 비탈길에 거대한 검흔을 새겨 놓았다.
절벽을 반으로 가를 듯 패도적인 검력이었다. 그 강렬한 검력은 땅을 가른 것도 모자라 패율이 선 자리까지 그대로 베어 버렸다.
사라락!
패율이 허공을 날았다.
풍뢰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과연, 좋은 실력일세.”
일검을 피해 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가 수준급의 무공을 연성했음을 알았다.
“하나, 허공으로 피한 것은 실수였어.”
우우우우우웅!
당국은 위시한 이십여 명의 고수들이 제각기 독공(毒功)을 끌어 올리며 암기를 꺼내 들었다.
당국이 외쳤다.
“모두 공……!”
그때였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풍뢰자의 전면에서 거대한 투기가 솟구쳤다.
순간 풍뢰자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누구일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런 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땅속에 동굴을 파서 숨어 있기라도 했단 말인가?!
“누……?!”
촤르르르르륵!
교룡쇄가 소용돌이치며 풍뢰자의 목을 노렸다.
풍뢰자가 다급히 패검을 올려 쳤다.
쩌어어엉!
무지막지한 공명음이 모든 고수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
풍뢰자의 눈이 부릅떠졌다.
호구가 찢어질 듯 아파 왔다. 기습에 대응한 검 놀림이었다고는 해도, 정체 모를 상대의 공격이 지나치게 강력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파라라락! 퍼억!
풍압과 함께 한 자루 시커먼 도끼가 풍뢰자의 어깨를 후려쳤다.
비틀거리며 물러난 풍뢰자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의 시야에 새하얀 도끼날이 보였다.
‘피할 수가……?!’
퍼억!
끔찍한 파육음과 함께 풍뢰자의 머리통이 잘 익은 과일처럼 반으로 쪼개졌다.
파아아아앙!
명진의 권풍과 당국의 장력이 쏟아졌다. 하지만 이미 습격자는 몸을 물린 뒤였다.
“후우.”
습격자, 연호정이 백룡부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고작 하나인가. 대단들 하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