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8화. 낙원의 치욕 (10)
암왕(暗王) 당형.
성천십삼좌의 일익으로, 이룩한 경지를 떠나 강호 최악의 인물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성정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다루는 독과 암기가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당가의 공부를 일 년만 배운 사람도 몇 줌 독으로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다.
그런 당가 무공의 최고 정점이 바로 당형이었다. 당관의 아버지이자 전대 가주이며, 당가 역사상 최강의 무인으로 칭송받는 고수가 그였다.
당연히 그 위험도는 감히 짐작할 수가 없다. 아닌 말로, 그가 작정만 한다면 문파 하나를 멸문시키는 데에 일각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강호 초특급 위험인물. 명문가의 고수임에도 그 강함과 독랄함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 모두가 강호에서 가장 위험하다고 여기는 절대고수.
그가 바로 당형이었다.
“지금 당가의 상황은, 실제로 보진 않았지만 매우 좋지 않으리란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지극히 높은 확률로요.”
“…….”
“이번에 저희가 싸운 놈들 보셨습니까? 그들 모두가 사천삼강(四川三强)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일류의 암살자들을 수도 없이 보유하고 있었지요.”
“…….”
“고작 한두 해 정도로는 모을 수 없는 병력입니다. 특히나 개중에는, 삼강에 속하지 않았는데도 삼강의 무공을 연성한 놈들이 있었습니다. 하나하나가 절정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어요.”
“…….”
“최소가 십 년입니다. 사천에서 가장 강하고, 명성도 높고, 영향력도 강한 문파 모두에 배신자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청성과 아미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가에는 가주님과 전대 가주가 계시지요. 두 분의 능력이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
“그런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지요.”
가만히 연호정을 내려다보던 당관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점소이를 불렀다.
“오량액이 있느냐?”
“예, 예!”
점소이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당관의 분위기도 분위기였지만, 그는 이틀 동안 주루 전체를 빌린 사람이었다.
“있는 대로 내오거라.”
“예!”
잠시 후, 점소이가 오량액을 열 병이나 가져왔다.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저거 다 마시면 내장이 싹 녹겠는데요.”
“시끄럽다.”
당관이 연호정의 잔을 채워 주었다.
탁자에 병을 놓은 당관이 빈 잔을 들었다.
“따르거라.”
참 한결같은 사람이야.
연호정이 웃으며 당관의 잔을 채워 주었다.
당관은 그대로 잔을 비웠다.
“너, 성천의 경지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남들 아는 만큼만 압니다.”
정확히는, 자신이 이룩했던 경지만을 안다.
연호정은 흑암제 시절 천하에서 제일을 다툴 만큼 강했다. 그 외에 무극지경을 돌파하여 하늘조차 나자빠질 힘을 얻은 자는 많았지만, 연호정만큼 전투력이 높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모용군과 당관이 있었다. 두 사람의 무력은 연호정과 거의 비슷했다. 경지의 문제가 아닌, 전투력의 문제였다.
그것이 바로 연호정의 무(武)였다. 고매한 깨달음이나 이상을 배제한, 지극히 단순한 투쟁력을 극대화한 사람이 그였다.
하지만 다른 강자들은 달랐다.
연성한 무공에 따라,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지니고 있는 무(武)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수준은 비슷하지만 지향점이 달랐고, 지향점이 다르니 전투력도 천차만별이었다. 지극히 간소한 차이지만, 그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손쉽게 승패가 갈릴 만큼 그들의 무공은 차원이 다른 경지에서 노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만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고수들도 존재했다.
무극지경을 돌파한 이들 역시 싸움의 본질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사소한 것 하나에 승패가 갈렸고, 극미한 차이만으로도 손쉽게 이기거나 절망적인 패배를 거듭했다.
그래서 연호정은 성천의 경지를 잘 알았고, 동시에 잘 모르기도 했다.
추구하는 바가 저마다 달랐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 경지에 오른 자들이 공유하는 공통적인 사항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나는 모른다.”
당관이 다시 잔을 내밀었다.
연호정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가득 채워진 잔을 만지작거리는 당관의 얼굴은,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나는 그 경지에 올라 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겠지요.”
“세상 어떤 분야든, 상승의 경지로 진입할수록 타인에게 설명하기가 난해해진다. 뜻이 모호해지기 때문이지.”
“그럴 겁니다.”
“초급과 중급까지는 언어로 정의할 수 있지만, 고급으로 넘어가는 경지는 필설로 형용이 안 된다. 그럼에도 그 경지에 진입한 자들이 있다는 것은,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뜻이겠지.”
연호정은 당관의 말에 동의했다.
절정고수니 무종지벽이니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경지를 정의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다.
하물며 무극지경은 어떨 것인가.
당대 무림이 최고 전성기였다던 삼백 년 전과 비벼 볼 수 있다는 것도, 무극지경을 돌파한 고수가 중원에 열셋이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한 세대에 한 명이 나와도 대단하다고 하는 경지가 무극지경이다.
그 또한 부르기 쉬운 명칭이 필요하여 무극지경이라 말하는 것이지, 그 경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올라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너는 방금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는 만큼은 안다고. 틀렸다. 그 경지에 올라 본 사람이 아니면, 세상 누구도 무극에 대해 모른다.”
연호정은 속으로 웃었다.
“그렇겠지요.”
잠시 말없이 술잔을 내려다보던 당관이 이내 잔을 비웠다.
“무극에 관해 모른다는 것은 곧, 당형이라는 인물에 대한 나의 인식과도 상통한다.”
당형이라 하였다.
아버지나 전대 가주가 아닌, 당형이라 하였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암왕을 정의할 수 없다.”
“왜 그렇습니까?”
연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부자지간 아닙니까? 어떤 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애정이든 부딪침이든 나름의 관계를 쌓았을 텐데 그렇게까지 모호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당관이 잔을 내밀었다.
연호정은 재차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못마땅해했다.”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잔을 비운 당관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공포스러운 군주였다. 역대 가주 중 그처럼 무섭고 숨 막히는 시기는 없었을 것이다.”
“…….”
“덕분에 본가의 악명이 몇 배는 더 높아졌지.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본가를 더 강하게, 더 위대하게 만드는 일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 엄격한 가법과 철저한 은원 정리가 필요하다고 보았지.”
“…….”
“하지만 무극의 경지를 돌파하고, 아버지의 생각은 바뀌었다.”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철저해진 법치와 확고한 은원 정리는, 당장은 좋을 수 있어도 결국 가문의 미래를 어둠으로 물들이리라는 것을 깨달았지.”
“…….”
“아버지도 사람이다. 불현듯 현실을 깨달았다지만, 지금껏 조립해 온 자신의 정치를 한순간에 깨부술 수는 없었어.”
“그렇겠지요.”
“그리고 하필이면, 내가 가주위를 물려받을 시기가 도래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상황을 다 듣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알 것 같았다. 부자지간에 얼마나 큰 갈등이 있었을지를.
당관이 피식 웃었다.
“나도 어렸다. 당시의 나는 꽤 치기 어린 마음을 갖고 있었지. 당신도 그렇게 했으면서, 왜 나에게는 절대 권력을 지양하라고 말하는가, 가주직을 물려주기가 그렇게 아쉬웠나, 싶었다.”
“…….”
“본가의 정치는 전대의 참여도가 높았다.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현역 중추들의 실수를 막고 가르침을 주기 위해 전대의 인물들이 어느 정도 검열을 했지.”
“좋지 않은 관습이로군요.”
“좋지 않지. 그것이 바로 혈족 간의 끈끈함이 과할 때 벌어지는 악습 중 하나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가주가 되자마자 그것부터 고쳤다. 물러난 전대 인물들의 정치 참여를 완전히 봉쇄해 버렸지.”
“반발이 심했겠습니다.”
“심했다. 그리고 난 반발하는 이들 모두를 뇌옥에 가둬 버렸다.”
당관의 눈이 번뜩였다.
“악습은 악습일 뿐이야. 가주의 명을 거스르는 자는 전대든 현역이든 용서할 수 없지.”
“…….”
“나는 본보기로 전대 대장로, 아버지의 동생이자 나에게는 숙부가 되는 사람까지 뇌옥에 가둬 버렸다.”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나를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와 감정은 다른 영역에 있지.”
“…….”
“그때 이후로 나와 아버지의 관계는 거의 파탄이 나 버리고야 말았다.”
가만히 당관을 주시하던 연호정이 툭 던지듯 말했다.
“전대 가주님께서 손자 사랑은 각별했던 모양입니다.”
“자식은 싫어도 제 핏줄 모두를 싫어하지는 않았지. 나와의 관계가 악화된 이후, 그분은 내 자식들에게 각고의 신경을 썼다.”
“그랬군요.”
이제야 알았다. 이쪽 부자지간이 왜 이리 엉망진창인지.
당관이 당형을 싫어했던 이유가, 단순히 선대의 가법을 바꾸라고 압박해서일까?
아니다. 가족 간의 정은 그런 걸로 끊어질 정도로 연약하지 않다.
그 전부터, 이미 부자지간의 골은 깊어질 대로 깊어졌을 것이다. 당관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형도 자신의 자식들에게 몹시 엄격했을 테니까.
결국 이건 누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않으면 두 사람의 관계는 절대 회복될 수 없을 것이다.
연호정이 조심스레 물었다.
“두 분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전대 가주께서 이 사태를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를 것이다.”
“확신하십니까?”
“그렇다.”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당관이 눈을 감았다.
“당신 스스로를 유폐하셨으니까.”
“유폐…….”
“나를 향한 그분 나름의 존중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나를 향한 분노이기도 했을 것이다. 제아무리 가주라 한들, 자식의 손에 형제가 뇌옥에 갇혀 버렸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복잡하군요.”
“그 이후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유폐지 밖으로 나오신 적이 없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다 알아들었습니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너 같은 싸가지한테 정말 못 하는 소리가 없군.”
“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작전지의 환경에 대해 최대한 알아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요.”
잔을 비운 연호정이 물었다.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
“전대 가주님과의 사이를 회복하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하면, 거부하실 겁니까?”
당관이 눈을 감았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아직 당가의 상황을 자세하게는 모릅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다면, 우리 역시 쓸 수 있는 모든 수를…….”
“거부하지 않는다.”
“예?”
“아버지와의 관계가 개선된다…… 나쁘지 않은 일이지.”
“그렇다면…….”
“하지만 관계를 개선해도, 아버지가 이번 일에 관여하는 것은 싫다.”
“가주님.”
“내 개인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야. 그것이 바로 당가의 피를 이은 자들의 삶이다. 은원의 정리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그 전에 절대 어겨서는 안 될 원칙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지.”
당관의 눈은 확고했다.
“아마 당신께서도 이 사태에 개입하지 않으실 거다. 내가 죽지 않는 한.”
연호정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어떨 땐 화끈하다 못해 파격적이더니,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지독하게 답답합니다그려.”
“타인의 이해를 구할 생각은 없다.”
“젠장.”
연호정이 당관의 잔을 채워 주었다.
“요리나 몇 개 시켜 주십시오.”
“들어가겠다더니?”
“지금 이 시점에 쉴 생각이 들겠습니까? 성질 그만 긁고 얼른 시켜 봐요.”
당관이 얼굴을 찌푸렸다.
“싸가지 없는 놈.”
정말이지, 당가의 가주에게 이따위 말을 지껄이는 자는 온 천하에 이놈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