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화. 반역의 향기 (1)
“흐음.”
저 멀리 숲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저치들이 한발 빨랐군.”
육안으로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 숲속, 어느 건물 부근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살기는 이미 일이 끝났음을 증명했다.
“자, 우리도 가 보세.”
파악!
모용군과 언자방이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
연호정의 눈이 숲으로 향했다.
‘왔군.’
딱히 기도를 갈무리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풍겨 나오는 존재감이 대단했다.
연호정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위험한 기도다.
고요하지만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했다. 이글거리는 전광이 응축될 대로 응축된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의 연가신단처럼 진기가 내단화(內丹化)된 듯하다. 극도로 발달된 뇌기(雷氣)가 뭉치고 뭉쳐,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꽉 조여져 있는 것이다.
‘발전했다.’
예전보다 더.
‘놀랍군.’
모용군 나이에 이 정도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 주기는 쉽지 않다.
깨달음으로 인한 진기의 변화나 보다 고차원적인 무도(武道)를 이룰 수는 있다. 하지만 모용군처럼, 체내 진기 밀도 자체의 성장이 이리 뚜렷하기는 쉽지 않다.
초보자는 누구나 점진적인 성장을 이루지만, 달인들의 성장은 계단 형식을 닮는다.
모용군은 충분히 높은 경지를 이루었음에도, 마치 막 무공에 입문한 사람처럼 꾸준한 성장을 이룬 것이다.
‘기연을 얻었나? 아니면 무공 자체의 특성 때문인가.’
연호정은 과거의 모용군을 떠올렸다.
비할 데 없이 막강한 공격력. 깨달음 역시 대단했다. 검신(劍神)이라는 칭호는 단순히 무림맹주가 되었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역시나, 놀고만 있지는 않았어.’
모용군의 미래가 어떨는지는 연호정도 몰랐다. 이미 흑암제 시절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모용군은 절대 물러나지 않는다. 자신의 꿈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후, 모용군과 언자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일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희미하게.
“오셨구려.”
“함께 움직이려 했거늘 이미 끝났군.”
“그렇소.”
모용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호정 옆에는 강량과 패율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밧줄에 꽁꽁 묶인 이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
모용군의 눈이 차가워졌다.
“저들은?”
“잡아 죽일 놈들이오.”
담담한 목소리 안에 상상 초월의 살의가 들끓었다.
모용군은 연호정의 그런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당장이라도 짓눌려 터져 버릴 것 같지만, 어떻게든 자신을 제어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사정을 설명해 주겠나.”
연호정이 낙원소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언제나처럼 그의 설명은 간결하고 정확했다.
“…….”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사실인가?”
연호정은 팔짱을 낀 채 침묵했다.
패율이 건물을 가리켰다.
“피해자들을 당가주께서 봐주고 계시오. 안에 들어가서 직접 확인해 보시오.”
모용군과 언자방은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건물 안에서 살벌한 기세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왔다.
강량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일까요?”
“뭐가.”
“모용가주의 저 분노 말입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다.”
“…….”
“물론, 분노의 이유는 우리와 다르겠지만.”
모용군의 분노는 도덕적 차원의 분노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물론 사건 자체에 대한 충격도 컸을 것이고, 인도적인 감정에서 오는 분노도 있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용군이 분노한 가장 큰 이유는 삼교에 있다.
지금 이 시점에, 사천 최고의 문파에 속한 이들이 작당하여 이런 곳을 운영 중이란다.
도덕적으로 끔찍한 일이지만, 전시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모용군의 분노는 그러한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을 것이다.
삼교를 향한 모용군의 분노는 가히 맹목적이었다. 현 사태에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주는 사람이나 사건이 있다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서 심판의 칼을 휘두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알기 쉬운 것 같다가도, 또 이렇게 보면 너무나 알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상관없다.”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모용가주의 저 분노는 분명 필요하다. 꾸미지 않은 진심이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지나치게 딱딱한 발언일까?
그렇지 않다. 무시할 수 없는, 무시해서도 안 되는 사태를 목도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미래까지 생각해야 했다.
슬프지만, 적의 감정까지도 이용해야 했다. 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런 것을 짚을 줄 알아야 했다.
‘그랬구나.’
강량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지금은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형님은 자신(自身)에게 집중할 시간이 없어.’
연호정만큼 대륙의, 강호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달리 없을 것이다.
말이 쉽지, 세상을 위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대륙의 어느 지방에서 터진 일까지 조사하고, 그 사건이 대국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매 순간 고민하고 있다.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삼교와의 전쟁이 필연이라면, 그 전쟁에서의 승리를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강량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삶이었다.
‘그런 삶을 살면서도 이렇게나 발전하시는구나.’
강량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감히 힘들다는 말도 못 하겠어.’
그때, 모용군과 언자방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모용군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굳어져 있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활화산처럼 폭발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연호정에게 다가온 그가 말했다.
“어떻게 처리할 생각인가.”
“개방에 도움을 청했소. 곧 그들이 올 것이오.”
“개방의 힘으로 가능하겠나?”
“대화를 나눠 보고, 그들만으로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사천 낙원소의 뿌리를 뽑고 나서 움직일 생각이오.”
“……좋네.”
모용군은 한옆의 바위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밧줄에 묶인 놈들을 보다 보면 모조리 다 죽여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저 멀리서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개방이었다.
“연 대수님.”
“오셨소?”
기충과 휘하 고수들의 얼굴 역시 모용군과 다르지 않았다.
“저들입니까?”
“그렇소.”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기충이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연 대수께 지급으로 온 서신입니다. 본방 직통이지요.”
“누구한테서 온 것이오?”
“용두방주님입니다.”
순간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용두방주께서?”
“그렇습니다.”
용두방주.
십만개방의 주인이자 후개 가득상의 스승이었다.
연호정 역시 용두방주 화진천과 만나 본 적이 있었다. 명가 사태가 끝난 직후 제갈아연과 있을 때 찾아왔었더랬다.
연호정이 서신을 펼쳤다.
이내 그의 눈이 깊어졌다.
패율이 물었다.
“뭐라고 하시더냐?”
“사천에 계신다는군요.”
“용두방주께서?!”
“예.”
연호정이 서신을 접었다.
“한번 보자고 하십니다.”
“……흠.”
이 시점에?
연호정이 기충에게 말했다.
“서신에는 이곳으로 방주 직속의 고수들이 파견되었다고 하오. 알고 있었소?”
“예?”
“모르고 계셨군.”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기충은 이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업무의 대부분을 후개에게 건넸지만, 그분은 여전히 용두방주이십니다. 천하에 산재한 온갖 사건 사고를 다 알고 계시겠지요.”
“아는 건 상관없소. 중요한 건 언제부터 알고 있었느냐겠지.”
“제가 말하고자 한 건 그분께서 이곳의 일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나아가 사천 분타들에 이 일을 전하지 않으신 것은, 그분 역시 조심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잠시 기다리시오.”
연호정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피해자들은 일 층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었다. 이 층과 삼 층에서 가져온 이불을 곳곳에 깔아 놓았지만, 대다수가 정신을 잃거나 겁에 질려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당관과 황석태, 송하신니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주님.”
“바쁘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말해라.”
“중요한 일입니다.”
당관은 몇 알의 단약을 쪼개어 물에 잘 개고 있었다.
연호정은 가만히 기다렸다. 당관의 작업이 무척이나 신중했던 것이다.
잠시 후, 당관이 송하신니에게 약을 건네며 말했다.
“이것을 저쪽 환자들에게 먹이게.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손을 턴 당관이 연호정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냐?”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어디로?”
“용두방주와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당관의 눈이 빛났다.
“용두방주가 사천에 있었더냐?”
“그런 것 같습니다. 따로 서신을 보냈더군요.”
“용두방주에게 전해라. 들을 줄만 알고 뛰어다닐 줄 모른다면, 그 다리는 필요 없을 것 같으니 직접 잘라 주겠다고.”
용두방주가 사천에 있다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대충은 알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런데도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 나름의 사정은 있겠지만, 당관이 그것까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쩌기로 했느냐?”
“개방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두방주가 직접 휘하 고수들을 파견했다 하니, 당분간 이쪽 일은 맡겨도 될 것 같습니다.”
당관의 눈이 빛났다.
용두방주를 향한 분노는 분명했지만, 그의 능력까지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용두방주의 능력은 여타 무림 문파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그가 작정하고 사천 정보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정보 통제에 일가견이 있는 낙원소도 감히 설칠 수 없을 것이다.
“용두방주가 우리 대신에 낙원소 일을 맡아 준다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진실 여부를 떠나 용두방주는 협의의 상징이라고들 하니까.”
잔뜩 날이 선 목소리였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달은 막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 안에 당가 쪽 일을 마무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물론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바로 용두방주를 만나러 갈 테니 당가타(唐家陀) 인근에서 뵙도록 하지요.”
“그러지.”
“조금만 고생해 주십시오.”
포권을 취한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가만히 그의 등을 보던 당관이 툭 던지듯 말했다.
“싸가지.”
“예?”
“당씨 문중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
그 말을 끝으로 당관 역시 몸을 돌려 건물로 향했다.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당가는 은혜를 잊지 않는다. 즉, 이번에 자신을 도와준 것을 꼭 갚겠다는 뜻이었다.
평소의 당관이라면 감히 입에 담지 않을 말이었다. 그만큼 당관 역시 이번 사태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리라.
연호정은 말없이 길을 떠났다.
당관이 그다움을 잃어 갈 정도의 상황이니, 다시 그다운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했다.
* * *
반나절 뒤.
무서운 속도로 움직인 연호정은 어느새 사천 도강언 인근 주루에 도착했다.
주루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미세한 인기척들만이 느껴졌다.
말없이 주루 최상층에 오른 연호정 앞에, 한 노인이 뒷짐을 진 채 몸을 돌리고 서 있었다.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용두방주님을 뵙습니다.”
용두방주, 화진천이 몸을 돌렸다.
“오랜만일세, 고양잇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