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594화 (593/963)

594화. 어둠에 가라앉은 자 (5)

‘여기군.’

당가의 뇌옥은 총 세 개였다.

그중 한 곳으로 온 모용군은, 경비가 생각보다 삼엄하지 않음을 보고 놀랐다.

‘고수들은 많지만…….’

뇌옥의 입구부터 일 층 전체에 깔린 고수들의 숫자는 오십이 넘었다.

뇌옥 하나, 그것도 한 층에만 오십 명의 고수가 포진해 있다는 것은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 개의 뇌옥 중 중죄인들만 가두는 뇌옥, 귀옥(鬼獄)임을 생각하면 조금 어정쩡한 숫자요, 무력이었다.

모용군이 눈을 빛냈다.

‘당가주의 말대로군.’

그는 당관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삼엄하지만, 경비만 돌파할 생각이라면 못 할 것도 없겠지. 하지만 진짜는 그 이후부터요. 지하 오 층까지 이어지는 귀옥은 내려갈수록 더 지독한 독진과 기관 장치가 기다리고 있소.’

‘나라도 불가능하겠소?’

‘뇌기(雷氣)라면 어떻게든 비벼 볼 만할 거요. 그러나 그곳이 귀옥이라 불리는 이유는, 까딱 잘못하면 뇌옥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오.’

‘…….’

‘진법을 해체한답시고 마구잡이로 파괴하다간 우리가 구해야 할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될 것이오. 그리고 당신도.’

천하의 당관이 하는 말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별다른 과장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해 봐야지.’

모용군이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연호정에게 받은 물건이었다.

‘저놈들을 다 죽이는 것보단 차라리 이걸로…… 음?’

순간 모용군이 고개를 돌렸다.

‘이 기세는……?’

벼락과도 같은 진기가 익숙한 기운을 포착했다.

모용군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번졌다.

“당가주?!”

* * *

참 많이 달라졌다고, 당관은 생각했다.

화르르륵!

왠지 모르게 어둡게 느껴지는 하늘.

정작 가문 안에서는 별 대단한 일이 없었다. 저 멀리 서벽 인근 외원에서의 전투도 끝이 났는지, 더 이상 충격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당관의 눈에는 보였다. 불에 타는 가문의 모습이.

굳건하게 서 있던 외벽은 허물어졌고, 헤아리기 어려운 건물들은 붕괴되어 내려앉았다.

외원은 물론 내원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잘 다져진 땅은 혈족들의 피를 빨아들여 평소보다 훨씬 어둡게 보였다.

멸망의 광경이다.

당관의 눈에 보이는 가문의 모습은 그러했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기만 한 이 분위기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사르르륵.

당관의 옷깃이 꿈틀거렸다.

‘흑풍, 그리고 녹의구나.’

서벽 쪽으로 향하는 고수들의 움직임이 기감에 포착된다.

흑풍대와 녹의대였다. 당가 내원 최정예 부대들, 하나만 보내도 어지간한 중소 문파는 반 시진도 안 되어 쓸어 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아마도 패율을 잡기 위해 보낸 전력일 것이다.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그런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역시.’

이 판단이 정녕 당호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라면, 당호는 실수한 것이다.

흑풍대든 녹의대든, 하나만 보내도 초절정고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생사결을 벌인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당가 비전의 독과 암기도 있다.

문제는 신성한 당가의 땅에 발을 들인 초절정고수가, 그만한 부대와 정면 대결을 벌이는 미친 짓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당호는 지금 침입자를 단순 전력으로만 평가하고 있었다. 침입자의 행동과 움직임을 전혀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녀석이 아니다.’

그때였다.

“헉!”

외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가, 가주님?!”

당관은 그들을 무시했다. 인사를 받아 줄 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바랐다. 그들이 그저 지나쳐 주기를.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가주라니! 저 사람은 역도다!”

“아!”

“어서 내원에 알려라! 그리고 모두 저자를 막아라!”

파바바박!

무사들이 당관의 앞을 막았다.

앞을 막았다고는 하지만, 그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얼핏 보아도 십 장이 넘는 거리였다.

독암(毒暗)의 전문가들끼리는 거리를 벌리는 것이 필수였다. 독과 암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숨 한 번 들이쉬기도 전에 죽을 수 있다.

당관의 눈이 무사들을 훑었다.

무사들이 움찔했다. 개중에는 당관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냉정하게 날이 서 있었다. 적도가 침입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선두에 선 무사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가문의 역도 당관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시오!”

차라리 기세 좋게 외쳤다면.

그랬다면 위대한 당혈(唐血)을 이은 후예들에게, 약소하나마 찬사 한 줄기라도 보냈으련만.

당관이 물었다.

“뭐라 하더냐?”

“……?!”

“반역자, 당호가 뭐라 하였기에 너희가 나를 역도라 칭하는 것이냐?”

“다, 닥치시오!”

스르릉.

무사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퍼렇게 빛나는 단검의 날, 비사독(飛蛇毒)이 묻어 있었다.

“무릎을 꿇고 오라를 받으시오!”

“설마하니, 내가 그 말을 따를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

“배포는 좋구나. 하기야, 너희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너희는 그저 반역자의 그럴듯한 말에 홀려 거짓을 진실이라 알고 있을 뿐인데.”

당관이 미소를 지었다.

미소지만, 웃음은 아니었다. 그 속에 즐거움의 감정 따위는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무기를 집어넣어라.”

“…….”

“너희에게는 죄를 묻지 않겠다. 적어도 너희가 민간인을 건드렸거나 본가의 법도에 위배되는 짓을 저지른 게 아닌 이상, 나는 절대 너희를 건드리지 않는다.”

“어서, 어서 무릎을 꿇으라지 않소!”

“그것이 가주다.”

당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가주란 가문을 책임지는 이다. 가문을 책임지는 이에게 있어, 직계와 방계의 구분 따위는 없는 법.”

“……?!”

“내 핏줄에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가주에겐 가인(家人) 모두가 핏줄이다.”

“…….”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 아버지는 자식의 잘못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

무사들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매를 들지 않게 해 다오. 너희가 나 아닌 다른 아비를 섬기고 있지만, 나는 너희를 이해한다. 그 또한 잘못이나, 그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게 만든 원흉에게 원죄가 있는 법이다.”

“…….”

“무장을 해제하거라.”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피눈물이 묻어 있다.

선두에 선 무사가 입술을 깨물었다.

“삿된 말로 우리를 혼란케 하지 마시오! 당신이 본가를 배신하고 외세에 빌붙어 사천을 넘기려 함을 알고 있소!”

“당호가 그리 말하더냐?”

“가주님의 성함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오!”

당관이 나직이 탄식했다.

외세에 빌붙어 사천을 넘기려 한다고? 외세는커녕 무림맹에서조차 콧대를 세우며 모두를 눈 아래로 본 사람이 자신이었다.

‘내 잘못이다.’

당호가 어떻게 가인들을 선동했는지는 모른다. 그 선동이 얼마나 호소력이 있었든, 바르지 못한 선택을 한 저들 또한 잘못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동시에, 저들이 저리된 것은 자신의 잘못이기도 했다.

가주로서 얼마나 믿음을 주지 못했으면 이러할까.

휘하 무사들에게,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도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한 자락도 주지 못한 주제에 어찌 가주라 할 수 있을까.

당가를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전대 가주보다 더 뛰어난 업적을 세우기 위해 나름대로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국 다독여야 할 이들을 다독이지 못했다.

당관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잘못했음을, 자신의 치세가 틀렸음을,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모자랐음을.

“기회를 주겠다.”

당관의 목소리에, 더 이상의 부드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따라오라. 그러나 그곳에서 끝까지 날 막고자 한다면, 너희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뇌옥에 갇힐 수도 있다.”

“……?!”

“너희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원했다면 이미 너희의 몸뚱이는 한 줌 핏물로 화했으리란 것을.”

무사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관의 말이 옳았다.

당관은 당씨 문중의 주인이자, 당대 당가인 중 가장 강한 사람이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들은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대화를 이어 가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들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것이다.

선두의 무사가 외쳤다.

“닥치시오! 그런 말로 우리를 현혹하려 들지 마시오!”

그때였다.

치리링.

그의 뒤에 도열한 무사들이 모두 병장기를 버렸다.

선두의 무사는 당황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병기를 다시 쥐어라!”

당관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아직도 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

“내 뒤를 보아라.”

무사가 당관의 뒤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외세에 가문을 팔고 사천을 넘길 것이었다면, 애당초 대화 따위는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나는 이 사태가 무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안다. 모든 것은 진실이 말해 줄 것인즉, 그러나 그 진실을 나만 알 생각도 없다.”

놀라운 일이었다.

존재감이 너무 뛰어나서 그랬을까? 그들은 당관만을 보았지, 당관의 뒤를 따른 이들은 보지 못했다.

당관의 뒤에는 백여 명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 구성도 가지각색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늙은 사람과 젊은 사람이 있었다.

무사가 있었고, 하인이 있었다. 일꾼이 있었고, 대장장이가 있었다.

이곳, 외원 중앙까지 오는 동안 당관에게 설득당한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관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말했다. 진실을 보여 줄 것이라고.

그 진실 앞에서, 직접 판단하라고 말하였다. 자신이 보여 주는 진실이 아닌, 세상이 보여 주는 진실을 보고 따르라고 하였다.

그런 그의 발언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이것이 지금의 당관이었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자를 물리치며 나아가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이 사태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전의 당관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행위.

어느새 당관은 그렇게, 선대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군주관을 만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와라. 와서 진실을 보아라.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무엇이 진실인지를 고민하라. 알맹이 없이 혓바닥만 놀릴 줄 아는 선동꾼의 말에 현혹되지 말아라.”

당관의 눈이 빛났다.

“내가 당가의 주인이다. 나는 아직 누구에게도 이 직위를 넘긴 적이 없다. 그 사실을, 너희에게 똑똑히 보여 주리라.”

압도적이었다.

본신의 내공을 개방하지 않아도, 위엄 넘치는 눈빛으로 찍어 누르지 않아도.

지금의 당관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군주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 형언키 어려운 깨달음으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 자의 보보(步步)는 그 자체로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힘을 지닌다.

그렇게 하나둘 모여드는 사람들.

당관을 따르는 사람들이 백 명, 이백 명을 넘어.

외원을 가로질러 내원 입구까지 도달했을 때는 어느새 삼백이 넘는 사람들이 긴장한 얼굴로 그의 뒤를 쫓았다.

당관이 외쳤다.

“내원의 문을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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