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화. 명명백백 (1)
“……!”
서벽을 통과해 외원 전투를 치른 패율은 다음 목표로 외원 호위대 본부를 노렸다.
하지만 실제로 난장을 치려니 참으로 막막했다.
어찌어찌 건물 하나로 숨어들어 본부를 살피고 있었지만, 언뜻 보아도 본부를 지키는 무사들의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다.
‘완전히 다르군.’
외원의 병력이라 하여 내원보다 크게 모자랄 거라 생각하는 건 오판이다.
오히려 필요하다면 외원에 더 많은 병력을 쏟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몰래 내원으로 침투하는 적들도 있지만, 보통은 외원부터 차근차근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그걸 감안해도 본부의 무사들은 상당했다.
조금 전, 목숨을 걸고 돌파했던 진법만큼의 위험도는 없다. 하지만 저들의 눈빛은 그야말로 살벌했다. 자기 집 앞마당인데도 절대 방심하지 않는, 진짜 무사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쉬웠군.’
패율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 망할 진법만 제외하면, 외벽에서 뚫고 들어오는 전투가 그리 어렵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천하의 당가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당가는 당가다.
그는 연호정과 당관의 대화를 떠올렸다.
‘서벽이야.’
‘서벽.’
‘외원 호위대 본부와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실질적인 병력을 많이 쏟아붓지 않는 곳이다. 실제로 지형 자체가 적의 침입에서 꽤 자유로운 곳이기도 하다. 어느 방향에서 침투하든.’
‘패율 선배라면 괜찮을 겁니다.’
‘그래서 서벽이다. 사방으로 나누었을 때, 그나마 가장 안전한 곳이지. 하지만 그 또한 위험해. 만에 하나라도 본부에서 고수들을 총출동시키면 초절정고수라도 위험하다.’
‘강합니까?’
‘강한 걸 떠나서 목숨을 거는 놈들이야. 그렇게 가르쳤지. 아버지와 내가 직접.’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가주님께서 시선을 붙들고 계셔야 합니다.’
‘미리 말해 두지. 내가 충분하다고 느낄 때는, 나도 움직일 것이다.’
‘이것만 약속해 주십시오. 당가에서 충분한 병력이 빠졌다고 판단될 때 움직일 것. 그렇지 않으면 설령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닙니다.’
‘좋다.’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저런 대화가 떠올랐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외원 호위대 본부가 강하다는 사실이다.
‘그래도 별수 없지.’
어떤 작전이든 목숨을 걸어야 한다.
목숨을 거는 것은 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패율 역시 음혼단과 싸우며 진심으로 죽을 각오를 했다.
중요한 것은 목숨을 거느냐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느냐다.
‘설령 아군이 전부 침투했다 한들,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도 병력 일부를 묶어 두는 건 중요한 일이다.’
패율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럼 또 시원하게 싸우러 가 볼까.’
그때였다.
두우웅!
‘……?!’
패율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보이는 것은 몸이지만, 의식은 몸뚱이 안이다.
츠츠츠츠.
‘빠져나간다?’
몸에 침투한 약력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다.
정확히는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정확한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화공 뭐라고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람에 따라서 편차가 있지만, 족히 반 시진은 당가의 거의 모든 독에 면역이 생길 거라고 하였다. 다른 사람이 제조했다면 모르되, 자신의 진기로 압착을 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하였다.
‘벌써 반 시진이 지난 건가?’
모르겠다. 아마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지금 이 순간에도 약력은 지속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사라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짐을 느꼈다.
패율이 일어났다.
‘어쩔 수 없지. 조금이라도 빨리 치고 들어가야…….’
그때였다.
‘어?!’
패율의 고개가 내원 쪽을 향했다.
그쪽에서, 한 줄기 불꽃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온갖 전투에서 느껴 본 적 있는 아주 친근한 기세였다.
친근했지만, 그 안에 살기의 폭풍을 담고 있는 기운.
“너?!”
파아아앙!
패율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더 이상 외원에서 난장을 치는 것이 무의미해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
당관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싸가지?’
좌측 멀리서부터 은은하게 느껴지는 화기(火氣).
사람의 몸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기운이라는 것만 빼면, 그 농도는 당가의 화기(火器)가 자아내는 기운을 몇 배나 응축시켜 놓은 것 같았다. 그만큼이나 폭발적인 기운이었다.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의 진기가 드높은 경지에 도달했음을 모르지 않았다. 새삼스레 놀랄 것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연호정이 왜 저 방향에서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느냐는 것이다.
당관의 얼굴에 서리가 앉았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적을 속이려거든 아군부터 속여라.
아마 그런 뻔한 논리로 자신에게 아무 말도 안 한 것일 터였다.
하기야, ‘그쪽’을 노려 보겠다고 했으면 자신이 결사반대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자신에게는 언질도 없었겠지.
‘어쩔 수 없지.’
화가 났지만, 당관은 냉정을 유지했다.
아마도 연호정 입장에서는 ‘그쪽’을 노려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당가가 아닌 다른 문파였다면, 자신 역시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를 노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해했다. 그러나 이해와 분노는 다른 것이다.
당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제아무리 달변이라도 움직일 양반이 아니다.”
어찌 되었든, 연호정도 이곳으로 오고 있다면 이쪽 역시 속도를 내야 했다.
놈의 기파가 심상치 않았다. 놈은 생사결이 아닌 이상 저만큼 강렬한 화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말인즉, 반드시 죽일 놈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죽일 놈은 당호일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우우우우우웅.
단전에서 거대한 내공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형언할 수 없는 힘, 이무기의 송곳니보다도 위험한 내력이 그의 양손에 담겼다.
당관이 부드럽게 손을 앞으로 뻗었다.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내원으로 향하는 문이 움푹 꺼지더니, 이내 뒤로 넘어가 버렸다.
“허억!”
“저, 전투 준비!”
내원의 철문은 높이만 이 장이 넘었고, 두께도 반 자가 넘었다.
그처럼 거대한 철문을 장력 일격으로 밀어 내 쓰러트렸다면,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
당관이 외쳤다.
“모두 물러나라!”
화아아아악!
뿜어져 나오는 화염의 기세가 눈부셨다.
몸 주변에서 뻗어 나오는 화기는 실제로 붉은 화염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그 불타오르는 기가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연호정의 좌우 견갑 쪽으로 널찍한 기운을 형성했다.
그 기운은 마치 한 쌍의 날개를 보는 듯했다. 다른 사신무처럼, 주작공(朱雀功) 역시 성취가 올라가면서 상상력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백호는 야수와도 같은 힘으로, 산중 대왕 같은 위엄으로.
현무는 철벽과 같은 버팀목으로, 폭포수처럼 압도적인 장엄함으로.
청룡은 버드나무와 같은 부드러움으로, 신화 속 용과 같은 신비함으로.
하나하나의 무공을 구사할 때마다, 그 무공에 몰입하며 사신무가 가진 본래의 위력을 깨우기 시작한다. 진기(眞氣)란 곧 의념을 통해 움직이고, 그 의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강한 집중력과 믿음이다.
그러한 집중과 믿음을 넘어, 실제 사신이 되기라도 한 듯 극한의 몰입을 끼얹어 뻗어 나가는 진기의 농도와 형상을 그에 맞도록 변형시키는 것.
상상이 곧 현실이 된다. 연호정은 이미 그러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헉!”
“저, 저게 뭐야?!”
“살기다! 일단 막아라!”
내원이라 그런지 뭔가 다르긴 다르다. 호위대에서도, 부대의 본부에서도 고수들이 줄줄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연호정이 외쳤다.
“비켜!”
그가 쌍장을 휘둘렀다.
퍼퍼퍼퍼펑!
불길이 치솟았다.
“불이다!”
“무, 물러나!”
대지를 박살 내며 거대한 불길을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신화교의 열양공이 천하 최고를 자랑한다지만, 지금에 와서는 연호정의 주작공 역시 그들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기(氣)가 더 강하냐, 약하냐를 결정 짓는 것은 결국 시전자의 이해도와 마음가짐이다. 무공 자체의 특출남으로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학문도 있지만, 극(極)에 이르렀을 때 결국 중요한 것은 무공의 종류보다는 진기를 이해하는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이런 것도 가능한 것이다.
콰앙!
깃털처럼, 혹은 무게가 없는 화염처럼.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던 연호정이 힘차게 대지를 밟으니, 그 신호를 받은 화염의 바다가 하늘 높이 치솟으며 거대한 장막을 만들어 냈다.
“허억!”
“물러나라!”
화르르르르륵!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주인의 의지를 읽은 화기 한 올, 한 올이 그의 상상대로 사위를 휩쓸고 있었다.
그야말로 지상에 강림한 화신(火神)이 따로 없었다. 신화교의 무장들이라도 화기를 이리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주르륵.
연호정의 코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렀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수많은 고수의 접근을 불허했지만, 상상력이나 깨달음이 남다르다고 이만한 일을 쉽사리 구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심하군.’
내공 소모가 극심했다.
연가신단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막대한 양의 기를 생성하고 있었지만, 생성하는 기보다 쏟아붓는 진기의 양이 더 많았다.
거기에 당형의 일격을 받아 낸 충격도 상당했다.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막대한 용량의 내공을 다룸에 있어서는 분명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상관없어.’
괜찮다.
어차피 상처 없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실제로 당호를 잡을지 말지는 상황을 보고 판단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곳, 누구의 침입도 불허한 당가 안에서 ‘과격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 자체였다.
그때였다.
“이노옴!”
좌측방에서부터 날아드는 한 명의 고수가 있었다.
느껴지는 무력이 대단했다. 무종지벽을 돌파한 자, 초절정고수였다. 진기의 연륜으로 보아 장로급 인사가 분명했다.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막으려는 이들에게 직격탄을 날리진 않는다. 그들을 심판할 사람은 당관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직접적으로 노리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상대하지 않아도 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는 정도라면 물러나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저 정도 강자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화기의 온도를 극한까지 뽑아 올리진 않았지만, 주작화기의 장막을 뚫고 들어올 정도라면 보통 대단한 고수가 아니었다.
“습격자로구나! 문답무용! 생포는 않겠다!”
퍼어어어엉!
폭음과 함께 농도 짙은 살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 살기를 자아내는 것은 우모침이었다. 육안으론 보이지 않는 우모침들이 연호정의 후측방을 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연호정의 동공이 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거칠게 손을 휘둘렀다.
콰르르르릉!
허공을 찢어발기는 화염의 발톱에 그 많은 우모침이 모조리 불타서 증발해 버렸다.
“허억!”
돌진해 오던 고수, 당종헌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광폭혈침은 아니었지만, 폭우이화침 역시 피했으면 피했지 막기가 어려운 암기였다. 상대는 그 비전의 암기를 손 한 번 휘둘러서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장난감으로 나를 막을 수 있을 성싶었느냐.”
후욱!
뿜어져 나오는 숨결에 불꽃이 어렸다.
연호정이 외쳤다.
“내 앞을 막지 마라! 섣불리 다가오는 자, 지위를 막론하고 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