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7화. 명명백백 (3)
“…….”
서쪽을 바라보는 강량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우우우웅.
단전에서 올라오는 진기가 몸 전체를 이완시켰다.
귀철검문의 귀검식(鬼劍式)은 패도적이면서도 자유로운 검도(劍道)를 추구한다. 하여 천하일절의 수준을 논하지만, 연성하는 자의 깨달음과 역량에 비례하여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무공이었다.
귀왕진기(鬼王眞氣)는 달랐다.
귀검식이 강하고 자유로운 검결이라면, 귀왕진기는 그 자체로 흑도 제일을 논하는 최고의 신공이었다.
흑도 제일을 논한다는 것은 곧 천하 무림의 선두를 다투는 무공이라는 뜻이었다. 지극히 심오한 귀왕진기는 귀철검문 최고의 기린아라는 강량의 몸에서 활짝 꽃피어, 그의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이라도 더.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무종지벽의 앞에서조차 또다시 발전하는 감각.
검사로서 언제나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려는 강량의 의지에 감명받은 귀왕진기는,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의 경지를 한 발자국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느껴진다.’
무종지벽을 돌파한 초절정고수라도 강량의 감각보다 예민하다고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느껴져. 형님의 분노가.’
타오르는 불과 같은 기세.
까마득히 떨어진 거리지만, 그 흉흉한 기세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오직 신화와 전설에서만 그 존재를 알리는 태양신(太陽神)의 강림이었다. 병오(丙午)의 화신인 주작이 천지를 불태울 듯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이 정도로 과격한 기세를 뿜는 연호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벽산호장 본연의 힘을 최대치로 발산하고 있는 듯했다.
삼교와 연관된 자들과 붙을 때를 제외하면, 이처럼 화려한 기세를 보여 준 적이 없다.
하지만.
‘삼교가 아니야.’
강량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연호정의 분노는 삼교 때문이 아니라고.
삼교를 눈앞에 둔 연호정은 뭔가가 달랐다.
뿜어져 나오는 기파는 비슷해도, 그 안에 본질적인 무언가가 변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창공을 지배하는 불새가 용암을 뚫고 기어 올라온 지옥의 봉황처럼 변모한다고나 할까.
‘형님.’
삼교가 아니더라도, 연호정은 분명 분노하고 있었다.
아니, 분노보다는 안타까움일까. 답답함도 느껴졌다. 강량은 이 먼 거리에서 기세만 읽고도 연호정의 감정을 하나하나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이 격해.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강량의 얼굴이 흐려졌다.
‘무슨 일이 생기긴 했던 모양인데.’
오감으로 연호정의 모든 것을 읽었다면, 이제는 육감까지 동원해야 할 때가 왔다.
‘치고 들어가야 하나.’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당가의 내원에서 빠져나가는 가장 은밀한 퇴로의 입구 쪽이었다.
본래는 황석태가 맡으려 했지만, 황석태는 여러모로 난전의 경험이 출중했다. 게다가 강량의 경지가 특출난다 한들, 독과 암기가 판을 치는 내원에서는 강량보다 황석태의 무공이 더 쓰임이 많을 것이다.
문제는, 지금 이곳에서 적도들의 퇴각을 기다리는 것이 과연 옳으냐는 것이었다.
그는 연호정의 말을 떠올렸다.
‘문제는 예비 병력으로서 움직일지, 그 자리에서 끝까지 전선을 사수할지 판단하는 건 전부 네 몫이라는 것이다.’
‘너를 믿는다.’
강인한 신뢰로 엮인 두 사람의 관계다.
연호정은 이제야 비로소 강량을 전우로 인정하였고, 강량은 연호정의 믿음에 부응할 만큼 성장하였다.
그리고 강량은, 그 믿음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신중해야 했다. 괜한 두근거림에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애송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아직은 신중해도 돼.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이번 작전의 성패를 가르는 진짜 전투는 시작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거야.’
예민한 안목이었다.
강량은 전장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패율이 시선을 빼앗았고, 모용군이 벼락처럼 움직였으며, 당관 역시 녹수주루에서 꽤 화려한 행보를 보였다.
거기에 연호정의 폭발적인 등장까지.
하지만 그 안에, 이번 당가 사태의 판도를 바꿀 만한 싸움은 없었다.
‘이제 곧이다.’
강량은 알 수 있었다.
이 공기, 피비린내 나는 공기가 알려 주고 있었다. 곧 전투가 일어날 것임을.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갈릴 최후의 전투가 벌어질 것임을.
‘그렇다면 나는 그 전투에 발을 들일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이곳을 사수할 것인가.’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상황을 지켜본 연후에 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 어떤 전투도 찰나의 개입만으로 죽을 사람이 살고,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투의 핵심은 시간이다. 적재적소에 상황에 맞는 무력이 투입되지 않으면 전투가 두 배, 세 배로 어려워진다.
강량은 일행 중 누구도 죽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쿠르르르릉!
땅이 울렸다.
공기가 폭발하며 무서운 충격파를 일으켰다. 강량의 귀안(鬼眼)에는 공기가 물결처럼 파랑을 일으키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전투가 시작되었…….’
그때였다.
‘……!’
스르륵.
은밀한 기척을 읽은 강량은 그 즉시 수풀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 움직임이 실로 귀신과 같았다. 빠르고 은밀했으며,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잠시 후.
후욱.
강량의 눈에 일단의 무리가 당가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달리는 것은 맞지만, 언뜻 보면 도저히 달린다는 표현을 쓸 수가 없다. 대체 어떤 신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인지, 허공을 반쯤 부유하며 나아가는 그들의 경신술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기괴하였다.
강량의 눈이 번뜩였다.
‘고수들이다!’
대략 오십여 명 정도 될까.
기괴한 신법만큼이나 진기를 갈무리하는 데에 능한 이들이었다. 진기의 농도만 읽으면 그 사람의 경지를 대략 유추할 수 있는데, 저들에게선 그 농도가 잘 읽히지 않았다.
세 명만 제외하고.
‘초절정고수!’
선두의 세 사람, 흑색 피풍의를 걸치고 붉은 가면을 쓴 오십여 명의 고수들과는 판이한 기세를 보여 준다.
세 사람의 가면은 연한 황색이었다. 얼핏 흰색으로 보일 정도로 밝은색인데, 워낙 어두운 피풍의를 입어서 그런지 얼굴만 둥둥 떠다니는 유령을 보는 듯했다.
‘누구지?!’
기괴한 기도였다.
뿜어져 나오는 기파는 하나하나가 패율에 비해도 큰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진기가 워낙 특이했다. 마치 이승에서 얻을 수 있는 기운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패율보다도 더 무섭고, 더 꺼림직했다. 이룬 경지는 패율이 더 높을 것 같은데, 싸운다면 차라리 패율과 싸우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확실한 것은.
‘저놈들…….’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중원 무림인들이 아니야!’
그때였다.
스륵.
세 명의 황면인, 오십여 명의 적면인들이 동시에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강량은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누가 신호를 준 것도 아니요, 멈추라는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기다렸다는 듯 똑같이 제자리에서 멈추었다. 하물며 달리던 속도를 생각하면 밀리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기묘한 공포를 자아내는 이들.
그때, 가운데에 선 황면인이 뭐라 중얼거렸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려도 확장된 청력으로 들을 수 있을 텐데, 이상하게 그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강량은 긴장한 채로 그들을 주시했다.
잠시 후.
훅!
황면인 셋과 오십여 명의 적면인들이 또 동시에 움직였다. 당가 쪽을 향해 가던 길을 가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강량은 이내 조심스레 수풀에서 몸을 세웠다.
그때였다.
“…….”
강량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주르륵.
그의 이마에서 한 방울 식은땀이 흘러 턱을 타고 내려왔다.
‘뭐지?’
강량은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
그 순간.
한 쌍의 초승달 같은 눈 구멍만 뻥 뚫린 황색 가면이 강량의 우측 어깨 너머에서 나타났다.
파아아아앙!
강량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수풀에서 빠져나왔다.
촤아악!
핏방울이 허공을 수놓았다.
쌍욕을 뱉을 시간도 없었다. 세 줄기 칼날 같은 병기에 등을 긁혔다.
우우우우우웅!
귀왕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린 강량이 뛰쳐나온 수풀 쪽으로 눈을 돌렸다.
“……?!”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언제, 어디로 이동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강량은 주변을 둘러보며 등의 상처로 귀왕진기를 집중했다.
‘제기랄.’
칼날이 근육에 닿지는 않았지만, 베인 살갗에 기분 나쁜 진기가 감돌고 있었다.
무척이나 끈적한 발경이었다. 귀왕진기의 패도적인 힘으로 잔존하는 진기를 그대로 불태워 날려 버렸지만, 여전히 상처가 신경 쓰였다.
기괴한 기도만큼이나 괴상한 내공이었다.
‘제때 제거하지 않으면 진기가 상처를 타고 들어올 것이다.’
침투경이 아닌데도 그렇다. 진기 자체가 생물체의 체내로 파고드는 성질을 지녔다.
체내로 파고든 진기는, 당연히 육신에 크나큰 상처를 입힐 것이다.
‘정말 귀신 같은 놈이군. 대체 어디 있는 거지?’
두근두근!
세차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순간 강량은 귀왕진기를 차분하게 다스렸다. 흥분해서 진기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당할 것이다.
후우우우.
자연스레 내뿜는 한숨.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부글거리던 귀왕진기가 다시 한번 그의 전신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스륵.
그의 왼손 엄지가 검갑 속에서 잠자고 있는 철검의 칼받이에 닿았다.
‘처음엔 몰랐지만, 어쨌든 놈의 존재를 읽었어. 한 번 읽은 기척을 두 번이라고 놓칠 리 없지.’
강량은 눈을 감았다.
시각을 극대화하고 있던 귀왕진기의 일부가 제 일을 찾지 못해 다른 감각에 힘을 더했다.
‘은밀하지만 폭발적이다. 한 번의 공격으로 무조건 적을 죽이는 수법, 말하자면 일격필살에 능한 무공이다. 그렇다면…….’
그 일격이 터져 나오는 순간을 읽으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강량은 기다렸다.
자세를 낮춰 발검을 준비했고, 귀왕진기를 온몸의 체조직 하나하나에 스며들도록 완전히 이완시켰다.
‘나와라.’
감각이 고조된다.
혹 이곳을 벗어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강량은 빠르게 그 생각을 접었다.
공기가 말해 주고 있었다. 아직 그놈이 이곳에 있다고. 이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고.
살기(殺氣)가 아닌 살의(殺意).
순식간에 극단적으로 집중한 강량은, 저도 모르게 적의 살의를 더듬어 내고 있었다.
‘텁텁한 냄새. 냄새가 점점 짙어진다. 분명 거리를 좁히고 있는 거야.’
알 수 있다. 읽히고 있다.
냄새에서 소리로, 소리에서 촉감으로.
‘놈은 분명…….’
번쩍!
강량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여기!’
차아아아아앙!
청아한 발검음과 함께 한 자루 철검이 시원한 참격을 발했다.
발검과 함께 뿜어져 나온 귀살검의 참격이었다. 제대로 맞으면 초절정고수든 뭐든 단번에 두 동강이 날 위력이었다.
“……?!”
강량의 눈이 흔들렸다.
자신의 철검이 지나간 자리에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퍼억!
그 순간, 세 줄기 칼날이 강량의 복부를 뚫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