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명명백백 (6)
후우우웅.
불어오는 배덕의 바람은 그리 무거운데도 옷깃 하나 펄럭이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도 다가온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착잡함과 여유가 공존하고 있었다.
당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맹으로 떠나기 전, 가문의 일을 맡겼던 이가주이자 동생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동생과 지금의 동생은 너무나도 달랐다.
무뚝뚝한 얼굴로 다녀오시라 말했던, 조금은 지쳐 보이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흥분한 기색이 엿보였던 동생.
당시엔 비로소 창설되는 무림맹에 당씨 문중의 주인이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흥분한 줄 알았다. 동생은 언제나 밖을 보고 살았으니까. 가문 안의 일보다,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가졌던 녀석이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대단한 오해였다.
동생은 가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문에 집착하였다.
동생은 가문보다 바깥세상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바깥세상에 자신의 힘을 서서히 깔아 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동생이 지금, 자신의 자리를 강탈한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형님이라 하였다.
조금 전 당사번의 입에서 튀어나온 반역자라는 말보다 훨씬 더 친근한 단어.
그러나 당관은 그 말에 혐오감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당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목소리에서도 동정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대단한 연기력이었다. 진실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구라도 속아 넘어갈 정도다.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만, 설마하니 이리 무모하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당호.”
“아무래도…….”
당호의 눈이 깊어졌다.
“순순히 오라를 받을 생각은 없으신 모양입니다. 그 또한 예상은 했습니다만.”
“오라?”
당관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대(大) 당씨 문중의 주인인 나를, 당씨들이 사는 이곳에서 감히 누가 강제할 수 있단 말이더냐.”
“당씨 문중의 주인을 강제할 수 있는 당씨는 없습니다만, 반역자는 다르지요.”
“반역자라.”
“도대체 무엇이 그리도 부족하셨습니까?”
무표정한 얼굴 아래, 옅게 드리워진 안타까움과 서글픔.
감정이 과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덤덤하지도 않다.
그 표정만으로도 사람을 홀릴 수 있겠다. 그야말로 무서운 연기력, 지닌바 무공보다도 훨씬 더 유용한 당호만의 진짜 무기였다.
“대체 무엇이 그리도 부족하셨기에 외세에 본가를 넘기는 것도 모자라 사천을 내어 주기로 하신 겁니까?”
“……기가 막힐 따름이로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당씨 문중의 주인이라는 자리는 작게는 한 가문의 주인이요, 크게는 사천 제일의 권력자임을 뜻합니다. 이곳에서는 황제나 다를 바 없는 권력을 손에 넣으신 분께서, 어찌 외세와 손을 잡으신 겝니까?”
“…….”
“피를 나눈 혈족들의 목숨을, 어찌하여 외세에 팔아먹으려 하신 것입니까? 어디 말씀을 해 보세요.”
웅성웅성.
당관의 뒤를 따랐던 이들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당당히 대문으로 들어와 진실을 보여 줄 것이라 천명한 당관이다. 그들은 그런 당관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한데 당호의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니, 자신들의 판단에 확신이 서질 않았다.
당관은 그런 군중의 마음을 시시각각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군중의 반응은 언제나 빠르고 변화무쌍하며 솔직한 법이다. 그 분위기에 일희일비하다가는 아무것도 못 한다.
그는 그저 당호에게 집중했다.
동생의 표정과 눈빛에, 목소리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였다.
당관의 입이 열렸다.
“내가 외세에 빌붙어 사천을 팔아먹으려 했단 말이지.”
“아닌 것처럼 말씀하지 마십시오. 형님께서 이곳까지 오신 이상 진실은 명명백백하게…….”
“그 명명백백한 진실을 만천하에 알리기 위해 내가 직접 온 것이다. 네가 보낸 부대를, 고수들을 죽이지 않고.”
“능력이 안 되어 죽이지 못한 것을 살려 두었다고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아니 그 전에,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그리 당당히 하시다니요.”
당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젠 거짓이 일상이 되어 버린 겁니까? 형님이 삼장로와 사장로, 오장로를 죽였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그럼에도 당관은 동요하지 않았다.
씨익.
오히려 당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당호의 눈에서 이채가 번뜩였다. 화를 내고 발광을 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웃다니?
“그 머저리들 말이냐?”
“언사가 거치시군요. 역시 반역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이겁니까?”
“심했다, 아우야.”
“무슨 말씀이신지?”
“권력을 쥐기 위해 외부에 나간 형을 반역자로 몬 것까지야, 지금껏 악착같이 숨기고 있던 네 천품의 일면이라 생각하면 화는 나도 그러려니 할 수는 있다. 그러나…….”
“…….”
“감히 대 사천당가의 장로 자리에 그런 능력도 없고 탐욕만 득실거리는 한심한 종자들을 앉혀?”
훅.
당관의 몸에서 무거운 위엄이 퍼져 나왔다.
“네 파렴치한 거짓 선동과 입에 담기도 힘든 무도한 짓거리를 제쳐 두고서라도! 당씨 문중의 주인이 되고자 했다면 적어도 인선에 있어 능력이 되는 자를 세워야 함이 당연지사다!”
“논점을 흐리지 마시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따위 인선 능력을 보여 주었다면, 둘 중 하나겠지.”
“대죄를 지은 분께서 어찌 인선을 논…….”
“당장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미봉책이거나!”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어 말하는 목소리가 압권이다. 그 많은 사람을 선동한 당호조차도 감히 입을 뻥긋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도 아니라면 너의 능력이 모자란다는 뜻이니라!”
당호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능력이 모자라다.
오늘 하루,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당관과 비교하여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한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그 발언은 당호에게 있어 극심한 분노를 일으켰다.
그 말을, 다른 누구도 아닌 당관에게 직접 들으니 냉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입을 열어 욕설을 퍼붓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
당호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거칠어졌음을 간파한 당관.
그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반역을 저질렀다고?”
“……아니라고 발뺌하지 마십시오.”
“기가 차는 거짓말이로구나.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라, 오히려 나조차도 진실이 아닌가 갸웃거리게 될 정도다.”
“진실을 진실이라 말한 것뿐입니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라 한들, 능력도 되지 않는 자가 어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냐!”
당씨 문중의 주인 자리를 다시 제 손으로 거머쥘 생각이라면 굳이 이런 대화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물론 당호에게도 한 수가 있을 것이다. 당관의 육감이 말해 주고 있었다. 녀석에게 숨겨 둔 한 수가 있다고. 섣불리 손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당호를 몰아치는 이유는 오직 하나, 만천하에 진실을 알리고 자신의 정당성을 되찾아 오기 위함이었다.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인 만큼, 때로는 하책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상황이 그러했다.
무림맹으로 들어가기 전의 당관이라면 쓰지도, 떠올리지도 못했을 방법.
무림맹에서의 오랜 생활이 당관의 무력을, 군주로서의 가치관을, 위정자로서의 능력을 일깨운 것이다.
“내가 반역을 저질렀다면! 이가주인 네가 아니라 너보다 능력이 되는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어야 했다! 내 옆에서 날 보좌했던 네가 아니라! 하루빨리 가문을 수습하고 정식으로 나를 탄핵할 능력이 되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한데 어찌 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냐?!”
당호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당관의 말이 품고 있는 뜻은 명백했다. 가주가 되고자 하는 권력욕 때문에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이다.
당호가 입을 열었다.
“누가 이 자리에 앉든 형님이 죽을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또한, 나의 인선은 잘못되지 않았습니다.”
“말해라. 네가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느냐? 왜 스스로를 가주라 칭하는 것이냐?”
“마지막으로 경고합니다. 형님이 정녕 본가를 위한다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왜 아직까지 나를 잡아들이지 않았느냐!”
당관의 마지막 말은 결정타와도 같았다.
“지난 몇 년간, 어찌하여 나를 소환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나를 막으려 들지 않았느냐! 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앉아 떵떵거리고만 있었던 것이냐!”
“가주라는 자리는!”
당호의 목소리도 기어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 간단한 자리가 아니오! 가주란 작자가 가문과 지역을 팔아먹으려 하는 와중에 본가라도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해 왔소! 그간의 일을 모르는 자의 편협한 추궁 따위 들어야 할 이유가 없소이다!”
“아버지를 찾아뵈었느냐?!”
“……!!”
순간 당호는 입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당관의 눈이 이글거렸다.
“네놈이 정녕 나를 반역자로 몰고 가고 싶었다면, 아니 반역자인 나를 잡고 싶었다면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이 그저 아버지께 찾아갔으면 그만이다! 한데 왜 아버지께서 대리 가주직을 맡고 계시지 않는 것이냐!”
결정타 다음은 치명타다.
당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개소리는 작작 하시오! 전대의 정치 참여를 막은 사람은 당신이었소! 작은아버지까지 뇌옥에 가둬 놓은 작자가 그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그래서 네가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바꾸려는 세상이 제아무리 대단했다 한들, 가주가 반역을 저질렀다는 현실 앞에서 그따위 법도와 가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이 무도한 현실을 뒤바꿀 능력도 없는 놈이!”
“닥치시오!”
“핏줄이 있어야 가문도 있는 법이다!!”
쩌어어엉!
마지막 당관의 일갈은 거대한 폭풍과도 같았다.
크고 강렬한 목소리에 당관의 진심과 영혼이 실렸다.
그 목소리가 가진 힘은 대단했다. 어지간한 성보다도 넓은 당가의 영역 곳곳을 파고들 정도로 컸고, 들은 모두가 전율을 느낄 만큼 밀도 높은 힘이 느껴졌다.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이 있어야 가문도 있는 법이다! 가법으로 다스릴 사람이 없거늘 껍데기만 남은 규칙과 법도가 무슨 소용이냔 말이야!”
“이익!”
“방계를 어찌 내쫓은 것이냐? 순혈끼리만 살겠다고? 하면, 방계는 우리의 핏줄이 아니란 말이더냐!”
“닥치라 하였소!”
“힘이 되어서가 아니다! 우리와 피를 나눈 형제이기에 함께 살았던 것이야! 직계와 방계의 구분은 있을지언정, 가주란 그들 모두의 아비이자 책임자란 말이다!”
당관이 검지로 당호를 가리켰다.
빳빳하게 뻗은 검지 끝에서 무시무시한 분노가 새어 나왔다.
“너는 가주의 자격이 없다.”
“…….”
“권력을 위해 형제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방계까지 쫓아냈으니, 이런 무능력한 패륜아에게 잠시라도 본가가 뒤흔들린 것만으로도 당가 역사의 오점이니라!”
“흑혈대주!”
당호의 외침에 당사번이 고개를 숙였다.
“당장 저자를 포박하라! 진실을 실토할 때까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것이다!”
“사천 당씨 문중 이십칠 대 가주 당관이 명한다!”
쿠르르릉!
당관의 몸에서 진녹색 기류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지금 이 시간부로 본가의 패륜아이자 사천의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여 가문의 이름을 더럽힌 대죄인 당호를 체포할 것인즉, 누구라도 저자를 돕는다면 가주의 이름으로 즉결 심판할 것이다!”
콰앙!
당관의 발밑에서 극속의 추뢰신법이 폭발했다.